## 1226화
12시가 넘은 늦은 밤이지만 르스와le soir의 문화부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스테진은 빠른 걸음으로 국장실로 들어섰다.
『리뷰 받아 왔습니다, 국장님.』
『오, 그래! 잘했네!』
따끈따끈하게 인쇄한 서류들을 국장에게 넘기자 국장은 화색을 띠며 그것을 받아 보았다.
스테진이 가지고 온 것은 평소 연이 있었던 미국의 음대 교수와 평론가들이 낸 타티아나에 대한 평론이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유럽 등지에서 도움을 구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 오후 시간대인 미국에서 외부 필진을 구해 온 것은 스테진의 유능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고대하던 서류를 받아 본 국장은 몇 장 넘기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스테진은 그런 국장의 반응을 예상했었기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서류를 살펴본 국장은 그것을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리뷰들을 기사로 내면 둘 중 하나겠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은 신문사가 되거나 아니면 허무맹랑한 삼류 신문사로 조롱을 받거나.』
『하지만…… 대체로 다 비슷한 평이었습니다. 서로 말을 맞추거나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고 말고…….』
국장도 고민이 깊은지 안경을 내려놓곤 눈을 감았다.
몇 시간 전 있었던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야말로 굉장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말은 클래식 평론에 전문적 지식이 없는 국장이나 스테진이 할 법한 말이지, 미국의 교수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스테진이 곤란해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급히 받아 온 평론엔 자세한 기술적 혹은 음악적 분석보다는 그저 환상적이었다는 찬사만이 가득했다.
새 시대의 흐름이 왔다는 등의 극찬은 세미파이널이 끝난 지금 하기엔 일러도 너무 일렀다.
물론 타티아나는 굉장한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모두 다 적절한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인데, 지금 이런 평론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할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가 리뷰를 번역하면서 가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지금 대충 적당한 걸 추려 보니 두 개 정도 나오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걸로 되겠나? 아침이면 다른 곳에서도 엄청나게 쏟아 낼 텐데?』
고민 섞인 국장의 말을 들으며 스테진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전 세계에서 받는 주목은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주와 그로 인한 여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본래 클래식 콩쿠르란 것은 주목을 받아도 항상 한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팝을 훨씬 편하게 듣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젊고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클래식 세계에서나 떠들썩하지 전체 세계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하곤 했다.
통계와 숫자로 영향력을 따져 볼 수 있는 기자들은 특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경우엔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대표적인 통계인 검색량이나 언급도는 물론이고 이런 소식에 기자들만큼이나 예민한 기업들의 관심 역시 엄청나게 쏠린 상황이었다.
발 빠르고 식견 있는 사람들은 타티아나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한 기사만 내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미파이널 기사이니…….』
『그래, 제대로 인터뷰를 할 기회는 앞으로 있겠지.』
국장은 고민 끝에 밸런스를 중요시하기로 결정했다. 너무 지나치다 싶은 평론들은 편집하고 보기 좋게 싣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대신 타티아나와 앤서니의 이름과 사진은 1면에 가장 크게 실을 예정이었다.
『아무튼 고생 많았네. 하이에나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침에 보면 알 수 있겠지.』
종종 국장은 언론계를 하이에나라 부르곤 했다.
그 자기 비판적인 표현은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지금 스테진은 도저히 웃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 하이에나 경력으로도 타티아나가 얼마나 거물일지 좀처럼 가늠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눈을 뜬 나는 묘하게 나른한 기분에 뒤척이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슬슬 일어나야 할 때였다.
“으음…….”
간신히 이불을 걷고 일어나자 조금 추웠다. 느슨해져 있던 신경이 자극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난 팔을 쭉 당기고 목을 틀었다. 정말 희한할 정도로 전날 연주에 따른 피로감은 없었다.
아드레날린인지 세로토닌인지 도파민인지 모를 무언가 때문에 피로를 잊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멀쩡한 컨디션이었던 것이다.
묘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쨌건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은 오랜만이기도 했고. 몸 상태는 멀쩡해도 긴장해 있던 정신이 잔뜩 들떴다가 풀어지면서 생긴 영향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간밤엔 정신 없었지…….’
기자들이 바라는 대로 사진을 찍어 주고 사인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사인도 해 주고……
파이널 진출자인 앤서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 일을 조금 분담해 갔을 텐데, 그가 없는 바람에 난 정말 혼자서 파이널리스트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플라지에 있다가 일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각이 1시 정도였다.
드레스를 벗고 최대한 빠르게 씻기만 하고 바로 잠자리에 눕자마자 바로 기절하듯 잠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잠이 딱히 모자란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난 기지개를 쭉 켜면서 남은 잠을 쫓아냈다. 창밖에선 새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 방을 쓴 지도 벌써 3주나 되었다. 아늑하고 익숙한 기분이 편안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자 거실 쪽에서도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데보라 아주머니겠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신 모양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니 아주머니가 먼저 날 발견하셨다.
“일어났니?”
“예. 좋은 아침이에요, 아주머니.”
“간밤에 잠은 설치지 않았어? 늦게 자기도 했고.”
“전혀요.”
밝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나누고 거실 쪽을 보니 클레망과 파스칼 아저씨도 일어나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분도 안녕히 주무셨나요?}
{음…… 그래.}
{잘 잤어?}
난 소파 옆에 있는 의자에 슬그머니 가서 앉았다. 클레망은 리모컨을 쥐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뉴스를 틀어 놓았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뉴스를 보던 나는 갑자기 화면에서 내 얼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클레망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아침부터 내내 네 이야기밖에 안 하던데? 그 앤서니라는 친구보다 훨씬 더.}
{그…… 부끄러운데요…….}
물론 사진 찍히는 걸 허락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예상도 했었다.
세연이나 아나스타샤 때도 이렇게 아침부터 뉴스에서 전날 결과가 나오는 건 똑같았으니까.
그런데 내 일이 되니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아무리 자주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찍히는 것까진 프로 정신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그걸 모니터링하는 건 성격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나는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채널을 보자고 부탁해도 클레망은 들어주지 않고 되레 소리를 더 키웠다. 참지 못한 나는 그에게 한 소리 하고 말았다.
{정말 마지막까지 왜 이러세요?}
{마지막? 음…… 그래, 마지막이긴 하지.}
{앗.}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클레망이 반응했다.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난 뮤직 샤펠에 감금되어야 한다. 정겨웠던 이 랑스가도 안녕이겠지.
모두 그걸 알고 있었기에 어제도 이야기를 많이 했고 좋게 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몇 시간 안 남긴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굳이 그걸 콕 짚는 듯한 말을 한 건 정말 실언이었다.
당황한 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양손을 휘적였지만 더 바보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클레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난 숨죽이며 기다렸다.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일단 내 잘못이니 무조건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클레망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기회니까 더더욱 장난을 쳐야 하지 않겠어?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이래 보겠어?}
{……예?}
{안 그래?}
어이가 없어 멀거니 되묻자 클레망은 보란듯이 또 다른 뉴스 채널을 틀었다. 거기에서도 패널 몇 명이 나와선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그냥 전부 포기했다. 각오는 되어 있었던 것이니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내 성격을 아는 클레망이 이렇게 대놓고 가지고 노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그도 아쉬운 마음에 이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다행히 뉴스를 계속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된 덕분이었다.
난 빠르게 부엌으로 가서 데보라 아주머니의 일을 도와드렸다.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이 흘러갔다. 그러나 이 집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란 것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왔다.
{보통은 짐이 늘어서 가던데…… 왜 더 줄어든 것 같지?}
{드레스류는 정리해서 빅토르에게 보냈거든요.}
이곳에서 산 물건들이 있으니 당연히 짐이 늘어야 정상이겠지만 난 혼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다른 참가자들보다는 확실히 편한 상황인 것이다.
그 부분에 감사하며 차분히 짐을 모두 정리했다.
그걸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준비가 되자마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데보라 아주머니와 함께 현관으로 나가자 정장 차림의 직원 2명이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
{뮤직 샤펠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베르체노바 님.}
뭔가 특별한 취급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난 약간의 미련이 남아서 뒤편을 돌아보았다.
랑스가 가족들은 모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갑자기 세차게 치밀어 올랐다.
난 마지막으로 이 고마운 사람들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편히 있어 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그리울 거예요.}
{분명 거기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따뜻한 목소리는 내 귓가에 머물다가 마음속 어딘가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