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7화
집 앞 도로엔 차가 대여섯 대나 서 있었다.
난 당황했지만 그 옆에 늘어선 사람들이 카메라를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을 알아챘다.
일단 저 차들 중에서 한 대는 콩쿠르 측에서 보낸 것이고 다른 두 대는 랑스가에서 철수하려는 빅토르와 경호원들의 차였다.
이외의 나머지 차량들은 모두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온 것 같았다. 내가 랑스가를 떠나는 모습부터 현장 취재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파이널리스트가 되었으니 앞으로 기자들이 내게 집중할 것이고 종종 인터뷰도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런 상황에 처하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메라 렌즈들을 마주하니 긴장감이 올라오면서 정신이 들었다. 바보같이 서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취재를 나온 모두에게 답해 줄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난 당당한 태도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앞서 있던 직원이 날 안내했다.
{짐은 제가 받겠습니다. 그리고 보안에 관한 건 키셀로프 씨와 이야기가 되었으니 저희와 같이 가시면 되됩니다.}
{키셀로프? 아, 빅토르요…….}
빅토르가 허가했다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난 빅토르를 눈으로 찾았다.
그는 차 옆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캐리어는 미리 다 옮겨 놓았고, 내가 가지고 온 건 작은 여행용 가방 두 개뿐이었다.
직원이 뒷좌석을 열고 가방을 안쪽에 넣었다. 그사이 뒤를 돌아보니 랑스가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난 작게 속삭이며 무대를 마친 연주자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떠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쪽이 보다 나답고 자신 있게 보일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자 클레망이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기분 좋게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콩쿠르 측에서 보낸 것은 커다란 SUV 차량이었다. 자리도 널찍하고 편했다.
뮤직 샤펠까진 별로 멀지 않았지만 그 잠깐의 이동에서도 참가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겠다는 정성이 느껴졌다.
무대에 있어선 엄청난 압박감을 강제하지만 편의적인 부분엔 흠 없이 철저하게 해 주는 점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다웠다.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안전벨트까지 맨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의 직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서서히 풍경이 움직인다. 랑스가의 모습도 조금씩 멀어지더니 차가 골목을 돌자 사라졌다.
위치도 알고 연락처도 교환했으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난 창에서 눈을 돌렸다.
차 내부로 정신을 쏟으니 앞에 있는 두 사람이 신경 쓰였다. 저 사람들은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
인사 정도는 할까 싶어서 적당히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그런 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눈치챘는지 조수석 쪽 직원이 내 쪽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베르체노바 님.}
{헉, 예…….}
{저희 소개를 안 드렸었죠? 죄송합니다. 저는 마리우스 도미니크, 그리고 이쪽은 테오 벨입니다.}
{반가워요. 도미니크, 벨. 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합니다.}
{하하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악수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라서 말로만 인사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마리우스는 슬쩍 시계를 보더니 일단 자신이 설명해 주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뮤직 샤펠까지는 20분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그사이 편안하게 휴식해 주시고…… 입궁 후엔 외부 이동이 불가합니다. 그 점은 아시죠?}
이동은 물론이고 통신도 끊긴다. 그건 워낙 유명한 규칙이라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들어간 세연이나 아나스타샤랑은 전혀 연락이 안 되기도 했고.
자잘하게 궁금한 것들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미리 듣기보다 직접 마주하고 겪어 보고 싶어서 난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아요.}
{들어가셔도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희를 시키면 되니 상관은 없으실 텐데…… 혹시 마지막으로 밖에서 하실 일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할 일……. 글쎄요.}
잠깐 여유가 있는 사이 급히 필요한 것을 사는 것 정도는 괜찮은가 보다. 그러나 난 지금 필요한 게 전혀 없었다.
세연이 사라고 했던 다이어리도 렌스키를 주고도 두 개나 남아 있었고, 내 위생 용품 같은 것도 넉넉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굳이 더 챙길 건 없었지만 혹시 나중에 후회할까 싶어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때, 마리우스가 살짝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혹시 내리시더라도 절대 기자들에게 응하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저희가 옆에서 막겠지만…….}
{기자들이요?}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고개를 들고 되묻자 마리우스가 뒤쪽을 보라는 듯 손가락을 세웠다.
뒤를 보니 익숙한 검은 차량 두 대와 그 뒤편으로 따라오는 커다란 밴들이 보였다.
{따라오고 있었네요……?}
{저희가 가는 과정도 모두 찍히고 있을 겁니다.}
대체 일거수일투족을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이동하는 건 중간에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생략하면 안 되나 싶었지만, 지금 따라오는 기자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별 상관은 없었지만 어쩐지 긴장이 되어서 다시 앞을 보니 마리우스가 웃으며 농담했다.
{헬기가 안 뜬 게 아쉽군요.}
{헬기요?}
{위에서 찍으면 꽤 장관인 행렬일 텐데 말입니다.}
그냥 농담이라기엔…… 마리우스는 가능성을 느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뮤직 샤펠로 향하는 이 행렬은 아마 평범한 건 아닐 테지.
일단 내 경호 인력들이 따라 붙었으니 일반적인 다른 파이널리스트들보다는 확실히 규모가 더 커 보일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중요한 사람이 이동 중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 있었다. 유명인들이 차량으로 움직이는 과정을 헬리콥터까지 동원해서 촬영해 방송하는 걸.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뭔가 조금 무서워졌다.
{갑자기 부담스러운데요…….}
{예? 하하하, 익숙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마리우스는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게 되레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붙긴 하지만 그들은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감시당한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사람이 따라붙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반응을 본 마리우스는 크게 웃었다.
{그런 무대를 보여 주신 이상 당연한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즐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난 무엇이든 마주해 보려 애써 왔지만 그건 해 보지 않아도 어떨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그건 성격적인 문제라…….}
{그럼 어쩔 수 없죠! 하하.}
일단 마리우스가 유쾌한 사람이라서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난 되도록 뒤쪽에 신경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시간을 보냈다.
뮤직 샤펠까진 정말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앞으로 최소 2주간은 연락하지 못할 것이라고 알렸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의 이 엄격한 규칙에 대해선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모두 쉽게 납득하셨다.
연락을 마치고 나니 뭔가 적적해졌다.
외부적으론 부담스러울 정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내부적으론 사람들과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는 괴리감이 상당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던 거니까.’
만약 아무 대비 없이 이런 상황에 툭 떨어졌다면 정말 당황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모든 걸 미리 생각해두고 있었고, 그렇게 심적 준비를 해 놓은 만큼 그리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뮤직 샤펠입니다.}
테오가 그야말로 우아하게 차를 몰아 정원 안쪽으로 향했고, 난 주변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에 감탄했다.
뮤직 샤펠은 숲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현실 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이곳에 머물 수 있게 허락된 사람이 전 세계에서 12명뿐이란 것이 조금 더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난 기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자들이 많네요. 여기선 인터뷰에 응해야 하나요?}
{아뇨, 그건 나중에. 지금은 입궁 절차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설명하고는 먼저 내려 날 에스코트했다.
건물 입구까지 향하는 길은 정말 예뻤지만 느긋하게 둘러볼 상황은 아니었다.
난 일단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겐 웃고 그렇지 않으면 최대한 걷는 데에 신경을 집중했다. 사실 잘 걷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입구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직원 몇 명이 내 짐 검사를 맡았다.
{가지고 계신 다른 전자 기기가 있으십니까?}
{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뿐이에요.}
전원을 끈 전자 기기들을 모두 맡기고 가방을 돌려받았다. 당연히 가방은 물리적으로 가벼워졌지만, 뭔가 그 이상으로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부터 찾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걸 내려놓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불안하거나 하진 않았다.
되레 전자 기기에서 해방되었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이곳에선 오로지 피아노만 치겠지.
미리 듣기론 저명한 교수님들이나 작곡가들도 찾아와선 같이 음악적 교류를 하는 시간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어떤 일정으로 이루어질지는 전혀 모르겠다.
난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앞으로 향했다. 그렇게 입구로 들어설 때까지 내 뒤에선 카메라들이 바쁘게 내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오…….”
뮤직 샤펠 본관 내부는 절로 감탄이 날 정도로 크고 아름다웠다. 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런데 로비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 있던 사람 몇 명이 이쪽을 보더니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난 주춤했지만 곧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저도 왔어요.}
{어서 와!}
세상에서 분리된 이곳. 난 드디어 퀸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계단에 친구들과 함께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