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28화 (1,228/1,277)

##  1228화

임세연과 이연주 그리고 아나스타샤. 세 사람의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특히 세연은 못 본 지 정말 오래된 기분이라 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연은 어색함 같은 것과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치 강아지처럼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며 내 앞에서 팔짝팔짝 뛰기까지 했다.

간신히 어깨를 잡아 진정시키고 나서야 세연이 입을 열었다.

{네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요?}

{그럼! 내기까지 했는데?}

과연 내 탈락에 걸어서 돈을 잃게 된 사람이 누굴까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연주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세연은 방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모두가 네가 온다는 데에 걸어서 내기가 성립이 안 됐지 뭐야?}

{아하하, 그게 뭐예요.}

엉뚱한 이야기였지만 모두 날 믿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먼저 파이널리스트가 된 친구들을 따라가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고 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만큼 여기 있는 친구들도 내가 오길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원도 분명 내가 이곳에 올 수 있게 된 도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난 세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모두 고마워요, 기다려 줘서. 이런 곳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나도!}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왔다 갔다 하는 세연을 중심으로 우리 네 사람은 천천히 라운지를 걷기 시작했다.

어떠한 목적성이나 의도는 없었다. 그저 넘치는 행복과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을 뿐이었다.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직원 몇 명과 카메라가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걸 의식하지 않아도 우린 너무 즐거웠다.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처음 흘러간 이야기는 당연히 이곳 뮤직 샤펠과 라운지에 대한 것이었다.

일찍 이곳에 온 세연과 이연주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살짝 앞장서서 걷던 세연이 갑자기 덜컥 멈춰 서더니 날 휙 돌아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이야기 주제를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나저나 어제 어땠어? 무슨 곡 쳤어?}

{순서는?}

{아침부터 기자들 몰려와 있던 거 보면 엄청 잘하지 않았나 싶은데?}

갑자기 질문이 마구 쏟아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까스로 난 하나하나 차분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어제 후회 없이 연주하고 결과를 받았던 것까진 어떻게 말하더라도 세간의 평가에 대해선 이야기하기가 심히 곤란했다.

나도 바보가 아닌지라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평가들을 보고 내가 잘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걸 직접 증거로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내 입으로 말한다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난 적당히 이야기하다가 순간 세연을 끌어당겼다.

{아, 맞아. 세연.}

{응?}

{다이어리를 사라는 건 무슨 의미였나요?}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했던 점이었다. 사실 이곳에 오면 가장 먼저 세연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대체 왜 다이어리를 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던 걸까? 뮤직 샤펠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물이었다면 콩쿠르 측에서 알아서 마련해 뒀을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연주자가 직접 챙겨야 할 물건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직도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어서 그 문제를 낸 출제자를 마주하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연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힐끗 아나스타샤를 보는 걸 보니 아마 아나스타샤도 오자마자 나랑 똑같은 질문을 한 모양이었다.

세연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듯 웃었지만 우리에게 괜한 궁금증을 떠안긴 것을 내심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여기 오면 폰 뺏기잖아. 그러니까 같이 일기 쓰자고…….}

{……예?}

이야기를 듣자 하니 세연은 SNS를 일기 대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이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이어리를 필요로 했고, 곧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우리도 미리 준비하길 바랐다고 한다.

다이어리가 단순히 물건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짜 일기를 말하는 건 줄은 몰랐다. 난 멍하니 물었다.

{혹시 뮤직 샤펠에서 반드시 일기를 써야 하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죠……?}

{학교도 아니고 그런 건 없어.}

{하…….}

이번엔 내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난 평소 일기를 쓰진 않지만 모처럼 이런 곳에 왔으니 일기를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렌스키에게 파이널리스트가 된 선물로 다이어리를 하나 주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먼저 들어온 렌스키가 날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그,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아, 맞아. 원래 아침에 할 일 없으면 여기 나와서 맞이해 주곤 했는데, 네가 조금 일찍 와서 그런가? 아무도 없네. 누구 안 오려나?}

세연은 다시 계단 쪽을 기웃거렸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서 눈길을 돌렸다.

라운지는 우리 네 사람만 거닐기엔 굉장히 넓었다.

애초에 이 뮤직 샤펠은 평소 50명 이상의 거주 연주자를 염두에 두고 건립된 아카데미에 가까운 시설이었다.

지금은 계약자들이 바뀌는 시즌에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들을 수용할 용도로 쓰고 있지만 사실 단 12명이 사용하기엔 과하게 넓은 것이다.

모두 흩어져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라운지에서 모이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더니 세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해 주었다.

{평소엔 다들 각자 연습하거나 모여서 놀거나 그런 식이야.}

{놀아요?}

{응. 여기서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는 건 아니야. 이것저것 일정이 생각보다 꽤 있더라고.}

뮤직 샤펠의 본관 건물은 앞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지만 사실 언덕 뒤로 지어져 있어서 3층짜리 건물이다.

입구가 2층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1층으로 내려가면 음악가의 마을artists village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있고, 그곳엔 여기보다 더 큰 공동 라운지와 공동 주방, 레스토랑, 도서관, 체육관까지 있다고 한다.

거주자들은 배드민턴이나 탁구, 보드게임 등을 즐길 수도 있고 심지어 자전거를 빌려서 주변을 산책할 수 있기도 했다.

물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들은 이동에 제약을 받고 감시되고 있는 상황이니 자전거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세연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꽤 복잡해서 설명만 듣고는 한 번에 머릿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봐야 알 것 같았다.

일단 고개만 끄덕이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세연은 재미있는 게 생각났다는 듯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예 놀기만 하는 사람도 있어. 그…… 루카 아르젠토 알지?}

{예. 이탈리아분.}

{그 사람은 탁구 대회에 나가려는 것 같던데?}

{네……?}

{온종일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탁구만 치더라고.}

그냥 쉬면서 한두 번 치는 게 아니라 세연이 본 바로는 탁구장 근처에 가면 무조건 있다고 하니…… 어지간히 즐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탁구를 쳐야 하나 싶긴 했다.

물론 실력에 문제가 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 본인의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특이한 사람들 꽤 있어.}

{그, 그래요?}

파이널리스트 12명 중엔 이미 아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나치며 인사만 살짝 나누었을 뿐 별로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경쟁자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2주 동안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난 그들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직원들이나 기자들의 발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파장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입구 쪽에서 미국의 연주자인 앤서니 마셜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자 앤서니는 잠시 멈춰 서더니 넉살 좋게 웃었다.

{내 환영을 이렇게 거창하게 해 줄 필요는 없는데.}

딱히 인연이 없는 우리가 그 때문에 여기 나와 있는 게 아니란 건 그도 잘 안다.

알면서도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는 사람에게 괜히 무어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성큼 다가와선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보니까 네 사람은 이미 친한 관계인 것 같은데…… 맞아?}

{예, 맞아요.}

{그럼 내 환영은 아니겠군. 사이좋아 보여서 좋네.}

약간 얼떨떨해 있는 우리 넷 중에서 가장 빠르게 반응한 건 이연주였다.

앤서니와 나이도 비슷하니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그녀가 말했다.

{파이널리스트가 되신 것 축하해요, 마셜 씨.}

{고마워, 이연주 양.}

역시 서로 이름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 서로 복잡하게 인사 같은 걸 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하는가 싶던 앤서니는 날 보더니 눈빛을 달리했다.

{베르체노바 양?}

{예?}

{어제랑 오늘 어땠어?}

느닷없는 질문에 난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온 클래식계의 스포트라이트가 너에게 비춰졌잖아. 어땠냐고.}

말을 알아들어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보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시비를 거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의 눈빛엔 되레 호의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앤서니는 팔짱을 끼더니 장난스럽게 힌트를 더 주었다.

{잘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네. 별로 만끽하지도 못한 것 같고. 그럼 자리를 비켜 준 보람이 없는데?}

{……자리를 비키다뇨?}

멍하니 되물으면서도 내 머릿속에선 퍼즐들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깨닫고 나서야 난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설마 어제 결과 발표 자리에 오시지 않았던 건…….}

{맞아. 너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기 위해서였어.}

{예? 대체 왜 그렇게……?}

{준결승 마지막 날, 모든 초점이 쏠리는 그 순간 최고로 빛나는 건 한 사람이어야 그림이 괜찮잖아?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너여야만 했고.}

만약 그가 어젯밤에도 있었더라면 분명 카메라는 그에게도 많이 향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연주자이기도 하고 그 명성대로 실력을 보여 주고 파이널리스트가 되었으니까.

때문에 그 상황을 미리 예상한 앤서니는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특종을 찾아 헤매던 기자들의 카메라는 자연스레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냥 다른 이유가 있어서 현장에 없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일부러 그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맙다기보다는 사실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데, 내 대신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듣자 하니 준결승에서 타티아나에게 졌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솔직히 그날 내가 가져온 걸로는 안 되겠더라고.}

그렇게 앤서니는 시원스레 인정하더니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 결승은 내가 우승하려고. 여기 선전포고해도 되는 자리지?}

앤서니는 여전히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날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선 기이한 집중력이 일렁였다.

그가 무서운 연주자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난 위축되지 않고 똑바로 앤서니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준결승에서 그는 내게 졌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결승에서도 똑같이 인정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와 앤서니는 눈싸움을 벌였다. 이대로 5초만 더 있으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연습실로 가자는 말이 나올 상황이었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다시 끼어들었다.

{상관은 없지만 다른 분들 의견도 들어 보시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몇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전에 이곳에 와 있던 다른 참가자들의 발소리였다.

파이널리스트들이 한곳으로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 같은 시대의 음악가이자 각국의 기대를 받는 연주자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 익숙한 검투사들이었다. 그중엔 앤서니처럼 호방한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난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앤서니같이 커다란 사람이 노려봐도 끄떡없었으니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난 스스로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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