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9화
오전 11시까지 합격자가 이곳에 온다는 건 모두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 시간쯤이 되면 한 번은 얼굴을 비추는 듯했다.
“벌써 와 있었네? 어디 보자…… 베르체노바와 마셜인가?”
“그럴 것 같더군.”
러시아어로 농담을 툭툭 건네며 다가온 건 알레한드로 페테르손과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였다.
두 사람은 우선 앤서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비슷한 나이인 데다가 이미 각국에서 명성 있는 피아노 연주자란 위치까지 비슷한 사람들이라서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난 가벼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마주했다.
“알레한드로, 렌스키.”
“잘 왔어, 타티아나. 여기 어때? 괜찮지?”
“멋지네요.”
짧은 인사만으론 부족해서 악수를 건넸더니 알레한드로는 껄껄 웃으며 내 악수를 받아 주었다. 렌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12명이 완성되었네. 네가 마지막 조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우리 최선을 다해 보죠.”
“그래. 그런데 말이야…….”
렌스키는 잠시 고민하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네가 줬던 다이어리 말이야. 여기서 딱히 쓸 곳이 없어서 거기에 일정을 적거나 일기를 쓰고 있는데 상관없는 거지?”
그는 아직까지도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무턱대고 다이어리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그 믿음은 참 고맙지만 미안하게도 나도 세연에게 속아서 산 다이어리다.
하지만 그가 일기로 쓰고 있다는 건 세연의 의도에 딱 맞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괜히 진실을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난 애매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그래? 알았어…….”
“그보다 이제 슬슬 영어로 이야기할까요?”
지금 이곳에 있는 7명 중 4명은 러시아어 사용자지만 그럼 다른 3명과 바로 언어의 장벽이 생겨 버리고 만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땐 상관없다지만 공용 공간에서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였을 땐 되도록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를 쓰는 것이 암묵적 예의였다.
렌스키는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는 듯 앤서니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나 나나 영어를 잘해서 다행이야. 프라이빗한 공간에선 각자 편한 말을 써도 되는데 라운지에선 어지간하면 영어를 쓰는 편이거든.}
{그런가요. 영어를 못 하는 분들은요?}
{프랑스랑 일본에서 온 녀석들이 영어가 좀 서툴긴 한데, 그래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하더라고.}
나와 렌스키가 이곳에서의 규칙과 소통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앤서니도 다른 사람들과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7명이나 되는 인원들이다 보니 이젠 슬슬 떠들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여자 4명만 모여 이야기할 때랑은 분위기가 아예 달랐지만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모여든 만큼 거기에 따라붙는 인원들 역시 불어났다.
각 연주자들에게 붙는 감시 직원들이 라운지 근처에 서 있었는데 그 인원들만 10명도 넘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어쩐지 처음보다 숫자가 더 늘어나 있는 것 같았다.
뮤직 샤펠이란 커다란 음악 시설을 단 12명이 전세 낸 상황이라 약간 텅텅 빈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관계된 사람들이 여럿 모여들다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나도 사과받았다? 그렇죠? 렌스키.}
{그, 그렇지.}
{진작에 잘 좀 하지 그랬어요?}
{미안해, 그건…….}
아나스타샤가 끼어들어 악연이었던 렌스키에게 다시 핀잔을 주기도 하고 모두들 옛날 일을 가지고 한참 동안 웃거나 이곳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세연이 모두의 선배 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준결승 첫날에 혼자서 통과했다. 그 말인즉슨 첫날 뮤직 샤펠에 발을 디딘 건 세연 혼자였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강한 세연은 첫날엔 연습도 안 하고 그냥 뮤직 샤펠 전체를 돌아보고 다녔고, 그 후 온 참가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스레 세연은 모두의 신뢰를 받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웃었다.
세연이라면 분명 어디서든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존심 강한 연주자들만 모인 뮤직 샤펠에서도 그럴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만큼 기뻤다. 세연은 정말로 나 같은 사람과는 다르다.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못했더라도 그녀는 모두의 신임을 받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저도 나중에 안내해 주시는 건가요?}
{응? 그래야지, 당연히!}
{고마워요.}
그렇게 우린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1시간은 더 할 수 있었겠지만, 뮤직 샤펠엔 나름의 일정이 존재했다.
멀리 서 있던 직원 몇 명이 다가오더니 다음 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결정된 파이널리스트들을 위한 오찬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레스토랑으로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파이널리스트인 나와 앤서니가 오기 전까진 오찬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다.
모든 사람이 모이고 나서야 하는 걸 보니 아마 여러 번 보기 어려운 중요한 사람이 오찬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까 싶다.
난 적당히 예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정말 화려하네.’
레스토랑은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있었다. 난 이 공간을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과 멋들어진 인테리어, 게다가 그랜드 피아노까지 한 대 준비되어 있어서 필요하다면 연주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뮤직 샤펠에 정말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이미 우리를 위한 테이블은 미리 세팅이 되어 있었다. 난 슬쩍 세팅된 자리의 숫자를 헤아렸다.
총 열여섯 자리. 파이널리스트가 12명이니 4명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적당히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자 잠시 후 다른 파이널리스트들도 속속 도착했다.
마침내 12명이 되자 더 떠들썩해질 줄 알았던 분위기는 정반대로 조금 정숙해졌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란 사실을 확인하고 서로를 다시 한번 탐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살짝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지만 서로 노려보거나 하는 형국은 아니었다.
모두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프로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관계 역시 앞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모두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로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때였다.
『□□□□ □□ 바네사 □□□□ □□□□□□.』
프랑스어로 무언가 안내되었고, 레스토랑으로 10명도 넘는 사람들이 들어섰다.
인원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대부분은 수행원으로 보였고 중요한 사람들은 가운데에 있는 4명이었다.
그중 2명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웰컴 파티에서 봤던 바네사 왕비님과 심사 위원장 테오도르 블랑이었기 때문이다.
왕비님과의 오찬이라면 미리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혹시 나만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싶어서 옆을 돌아보았으나 모두들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미소를 띠며 걸어온 바네사 왕비님 일행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왕비님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더니 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 풀어 보려는 듯 웃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모두 반갑네요. 파이널리스트 여러분.}
그러고 나서 왕비님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1명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먼저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웰컴 파티장에서 잠깐 봤었던 것 같은데…… 사실 당신에겐 기대가 많았거든요. 그 기대에 넘치도록 멋진 연주를 보여 줘서 고마웠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루이 디아라.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도 좋은 피아니스트였는데 지금은 더더욱 훌륭해졌네요. 찬사를 보냅니다.}
{가, 감사합니다! 왕비님.}
바네사 왕비님은 모두의 이름을 아는 건 물론이고 연주 무대를 모두 챙겨 본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처음 웰컴 파티에서도 왕비님은 각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참가자와 인사하셨다.
정말 음악가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많으신 것 같았다.
그렇게 1명씩 불리는 파이널리스트들을 보면서 나도 그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루이 디아라, 장 레이, 임세연, 이연주, 레베카 뒤세,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 시라이시 타츠야, 루카 아르젠토, 앤서니 마셜,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아.}
멍하니 대답하자 바네사 왕비님은 빙그레 웃었다.
{그때도 귀여웠는데 지금은 더 귀엽네요?}
뭔가 왕비님 내부에서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는데 살짝 불안해졌다. 바보 같은 모습을 많이 보였던가?
모든 상황을 끌어내어 추론해 보고 있는데 왕비님은 작게 킥킥거리더니 말했다.
{그런데 연주자로서의 멋진 모습은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두 번의 무대 모두 절 전율하게 만들었답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베르체노바 양 같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 영광이었어요.}
물론 왕비님은 모든 참가자에게 최고의 찬사를 해 주셨지만 영광이라는 말까지 들을 줄은 몰라서 난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파이널리스트들을 순서대로 불러 인사한 바네사 왕비님은 이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블랑, 고다르도 소개하셔요.}
{그러죠.}
두 남자는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1명은 우리도 익히 아는 콩쿠르 심사 위원장 테오도르 블랑. 그리고 다른 1명은 벨기에의 부총리인 피에르 고다르였다.
부총리나 되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왕비님의 다음 발언은 더 충격적이었다.
{원래는 총리를 모실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었네요.}
당황한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듣기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파이널리스트들이 날고 기는 각국의 신예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평균 20대 초중반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비님은 옆에 앉은 한 소녀를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이쪽은 제 딸, 외제니. 원랜 예정에 없었는데 꼭 오찬 자리에 함께해서 피아니스트들을 보고 싶다고 조르기에 데리고 왔어요.}
‘평범한 아이는 아닐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외제니 공주는 눈을 빛내며 우리들을 쭉 돌아보더니 마지막으로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난 그녀를 보며 웃으며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