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0화
벨기에 왕비와 공주, 부총리, 콩쿠르 심사 위원장까지 함께하는 오찬 자리는 정말 고급스러웠다.
지금까지 벨기에에서 몇 주 동안 있으면서 봤던 그 어떤 요리보다 제일 화려한 것 같았다.
물론 브뤼셀 거리나 랑스가에서 먹었던 요리들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벨기에는 미식을 중요시하는 나라고 요리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다.
단지 이곳의 자리나 모인 사람들 때문에 요리의 단가가 올라갔으니 자연스레 고급스러워지는 것도 당연한 것일뿐.
가장 단순한 비교로 샐러드만 놓고 보더라도 일반 가정에서도 플레이팅을 예쁘게 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거의 작품 활동을 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게 보일 정도였다.
나도 집에서 드미트리의 최고급 요리들을 매일 먹긴 했지만 이곳엔 또 나름의 철학과 예술성이 엿보였다.
그 덕분에 요리를 놓고 나눌 칭찬이나 이야기들이 많았고, 벨기에 사람들은 자국 요리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만큼 칭찬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부드러운 소고기는 처음이야. 입에서 녹는데?}
{며칠 있으면서 식사에 불만이 있었던 적은 전혀 없지만……이번엔 정말 다르네. 완벽해.}
{맛있게 드셔 주니 고맙군요, 모두들.}
바네사 왕비님은 콩쿠르 참가자들을 벨기에의 손님으로 대해 주셨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선택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일환으로 왕비님은 절대 부담을 주지 않고 친근하게 대 해주시려 하셨다.
물론 이미 스마트폰을 뺏기고 이곳에 갇혀 있는 상황부터가 부담과 압박이 꽤 심하지만 그건 콩쿠르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침이니 그런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 편하도록 해 주려는 노력이었다.
{이 상큼한 소스를 맛보다 보니 문득 저번 세미파이널에서 임세연 양의 무대가 떠오르는군요.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앗, 감사합니다.}
그 옆의 다른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회에선 각각 부총리와 심사 위원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우리들의 무대를 본 청중으로서 있으려는 듯했다.
그게 우리로서도 편했다.
여기 있는 어른들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일단 우리 연주를 놓고 이야기한다면 그나마 할 이야기가 있었다.
나에게도 몇 번 이야기가 돌아왔고, 난 적절하게 대답했다.
모든 파이널리스트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스몰토크들이니 특별한 의미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며 이야기도 나누니 분위기는 꽤 좋았다. 그런데 난 아까부터 자꾸 묘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말을 걸어 주면 좋겠는데…….’
처음 소개했을 때부터 은근히 날 보고 있던 외제니 공주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열 살 정도로 보이는 공주는 누구에게 말을 걸지 않고 오로지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파이널리스트들이 보고 싶어서 같이 왔다고 하니 무언가 질문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자신이 낄 자리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넘기기엔…… 공주는 날 너무 많이 쳐다보고 있었다.
포크를 한 번 움직이고는 날 힐긋 봤다가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길 반복하는 걸 보니 가만히 있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하면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눈을 마주쳐서 내가 미소를 보내도 외제니 공주는 바로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네.’
내가 먼저 외제니 공주에게 말을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식사 자리에서 파이널리스트 중 한 사람일 뿐인 내가 그렇게 나서는 게 과연 예의에 맞는 것인지 무척 애매했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사교 능력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기도 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적 한계와 능력 부족으로 외제니 공주와 나 사이에선 미묘한 기류만 흘렀다.
그냥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려 준다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미안해…….’
어쩔 수 없이 난 일단 나이프를 들었다.
식사를 하고 나면 차를 마실 시간도 있을 테고, 그럼 뭔가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 할 타이밍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를 노려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고기를 막 썰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날아와 내 접시 위로 툭 떨어졌다. 깜짝 놀란 나는 양팔을 들썩였다.
{무슨……?}
기겁한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고 보니 내 접시 위엔 아까 전까지 없었던 작은 방울토마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치 원래 그렇게 플레이팅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고개를 들자 테이블은 완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내 맞은편에 있는 외제니 공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샐러드 접시를 향해 포크를 찌른 상태 그대로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상태였다.
『아…….』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난 상황을 파악했다.
샐러드 접시에 있는 방울토마토를 먹으려고 포크로 찔렀다가 실수로 포크가 미끄러진 모양이다.
워낙 싱싱한 방울토마토이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자리가 꽤 중요한 자리고, 외제니 공주는 낯도 많이 가리는 성격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계속 활발하게 이야기했다면 귀여운 실수로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선 그녀의 트라우마가 될 염려도 다분했다.
판단을 내린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임기응변의 신께서 날 가호하시길 바랄 뿐이었다.
{골프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네요.}
{……?}
뭔가 문장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농담인 것 같다는 느낌이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말을 맺고 나니 뭔가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 때문에 이번엔 반대로 내가 안절부절못하게 되어 버렸다.
외제니 공주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상황을 이해했을 터다.
설마 내가 공주를 모욕한 걸로 받아들이면 어쩌지? 이런 가벼운 실수를 가지고 모욕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잠시 동안 나와 공주는 뻣뻣하게 굳어 서로를 바라 보고만 있었다.
이 정적을 기세 좋게 깬 건 알레한드로였다.
{푸하하하, 홀인원이네!}
{그러게. 외제니 공주님은 재능만이 아니라 운도 따르시는 것 같은데?}
{보기 드문 걸 봤네.}
그리고 마치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썩하게 한마디씩 덧붙였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즐겁게 넘어가려는 협조였다.
왕비님도 조금 당황한 것 같이 보였지만 이내 즐겁다는 듯 웃으셨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제니 공주는 실수를 무마할 수 있으니 다행이고, 나 역시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오해를 살 수 있었던 걸 알레한드로가 수습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한시름 놓으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외제니 공주의 표정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바네사 왕비님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하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베르체노바 양……. 제가 있을 수 없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불쾌하셨죠? 요리는 새로 내어 드릴게요.}
{예?}
사과도 너무 정중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는데 외제니 공주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데, 왕가에서 약간 엄하게 교육을 시키는 것 같았다.
만약 정해진 방침이 있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게스트로서의 예의다. 하지만 게스트로서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할 필요는 없었다.
벨기에 사람들은 요리에 자부심이 높고, 음식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 앞의 요리는 아직 멀쩡했고 이걸 저 어린 공주의 실수로 폐기하는 건 과한 처사로 느껴졌다.
난 살며시 달래듯 외제니 공주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전 이걸로 괜찮아요.}
{그래도…… 더럽지 않나요?}
{전혀요.}
{불결하잖아요.}
외제니 공주는 계속 요리를 버리길 종용했다.
하지만 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상대가 냉정하게 자신이 먹던 요리를 버려 버린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긴 하겠지만 상당히 우울할 것 같았다.
실수를 평생 기억하게 되겠지.
접시를 아예 쏟아 버렸다면 모를까, 방울토마토 하나 넘어온 것 가지고 더럽다고 하는 걸 듣다 보니 약간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난 방울토마토를 먹어 버렸다.
{괜찮다니까요?}
{헉.}
포크로 찍다가 튕겨 나간 것이다.
어디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샐러드 접시에서 내 접시로 바로 날아들었으니 못 먹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외제니 공주에게 난 웃으며 말해 주었다.
{친히 방울토마토를 전해 주신 걸로 생각할게요. 그런 걸 어떻게 버리거나 할 수 있겠어요?}
접시 통째로 남아 버릴 뻔했던 실수의 증거를 말끔하게 인멸해 주자 그제야 외제니 공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혹시 내가 에티켓에 어긋나는 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어 슬쩍 바네사 왕비님의 눈치도 보았는데, 왕비님 역시 기분 좋은 미소로 날 바라보고 계셨다.
내 처신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이 좋게 마무리되자 다시 포크와 나이프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너도 고기 그만 먹고 야채 좀 먹지 그래?}
{내가 알아서 먹어.}
{아직 한 번도 안 먹지 않았어?}
{꼭 우리 엄마같이 잔소리하네?}
{뭐라고?}
그중엔 정말 유치한 대화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분위기를 띄우는 데엔 더 도움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접시들을 치우는 사이 바네사 왕비님은 셰프를 불러 훌륭한 식사에 대한 치하하기도 했다.
박수를 보내자 셰프는 깍듯한 인사로 답했다.
그다음은 예상했던 대로 티타임이 이어졌다.
{잠깐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
{바로 와야 할걸.}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이 파이널리스트들에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난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를 따라 모이려 했다.
그런데 옆에서 외제니 공주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난 무릎을 굽혀 작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공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깐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베르체노바 양.}
아직도 그 이야기인가 싶어서 난 쿨하게 대응하려 했다. 그런데 외제니 공주는 밝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요……. 아까 방울토마토가 베르체노바 양의 접시로 들어갔을때…… 정말 놀라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어요.}
{……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묻자 그녀는 조금 더 작게 속삭였다.
{사실 제가 여기에 오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을 보고 싶어서였거든요.}
눈빛을 반짝이는 외제니 공주에게선 낯을 가리는 것 같던 조금 전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누구든지 팬이라 한다면 내겐 성실히 팬 서비스를 할 의무가 있었다.
슬쩍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니 그녀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