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1화 (1,231/1,277)

##  1231화

난 이런 눈빛을 자주 본 적 있었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안다.

이미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도 잘 응대할 정도로 난 팬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외제니 공주가 원하는 건 사인이나 같이 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음악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베르체노바 양께선 기쁨이라는 감정에 대해 두 번 표현하셨죠. 한 번은 작곡가 메시앙의 곡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드뷔시의 곡으로……. 그러한 선곡을 한 데에 이유가 있다면 듣고 싶어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도 깊은 질문이라서 깜짝 놀랐다.

그냥 음악이 듣기 좋았다거나 굳이 묻는다면 마지막 메인 디쉬로 느껴졌을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대해 물어보리라고 생각했는데……

외제니 공주는 내 모든 연주 프로그램을 들어 보고는 그 전체를 꿰뚫는 부분이 대해 파고들었다.

난 조금 더 진지하게 외제니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내가 그리는 기쁨이라는 감정의 해석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선 비슷한 가치관의 소유자를 만난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느껴졌다.

나 역시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대답을 잘 고를 필요가 있었다. 그저 재미있어 보이는 이유들을 택해 답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된다.

그녀가 내 표현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실하게 답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생각을 골라 본 나는 일단 사실을 정확하게 가리기로 했다.

{사실 두 곡 자체에 특별한 연관성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콩쿠르 규칙상 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적어 냈었고, 그중 운 좋게 뽑혔던 곡들이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하지만 기쁨이란 감정에 대해 외제니 공주님이 궁금해하시는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진정한 삶의 기쁨은 느슨하고 반복적으로 길게 이어지더라고요. 짧고 휘발적인 쾌락이 아니라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감정에 대해 전하고 싶었어요.}

오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내 일상이 내일로도 이어지길 바라는 이 단순한 바람은 지난 몇 년간 날 지탱해 왔다.

난 한때 그것이 내 집착의 편린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원천임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서 느낄 한 번의 희열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하는 피아노 연주자지만 난 준비 과정을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내겐 모든 준비 역시 기쁨이었고 그 결과물인 음악과 무대는 오래도록 이어질 증거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는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길게 고민해 왔고 거기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낸 상태였다.

그 가치관은 당연히 음악에도 녹아들어 있었고, 그걸 알아본 사람에게 설명을 한다는 건 나로서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걸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외제니 공주는 더 눈빛을 빛내더니 약간 들뜬 모습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다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평소 생각하고 있던 어떠한…… 상념들을 일깨워 주는 곡이었거든요. 오늘 아침에도 명상하면서 베르체노바 양의 연주들을 듣고 온 참이에요.}

{그, 그런가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돈할 정도로 제대로 활용한다는 건 꽤 오랜 공부를 하고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외제니 공주에겐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 본인도 그 부분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지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피아노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건반도 무겁고 어려워서 현실의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지는데 이걸 뛰어넘으려면 몇 살쯤 되어야 하냐는 등의 현실적인 질문들이었다.

딱 정해서 대답해 주기 어려운 질문들이었지만 난 그래도 최대한 그녀의 의욕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도중, 외제니 공주는 뒤쪽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들떠 있던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머니가 그만 이야기하라고 하시네요…….}

상황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웰컴 파티에서 바네사 왕비님도 나와 길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가셨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일 뿐인데도 형평성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벨기에의 공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파이널리스트 한 사람과 너무 길게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다.

{다른 분하고도 대화하시겠어요?}

어차피 아나스타샤나 세연도 상냥한 편이니까 같이 이야기하면 어떨까 싶어 제안해 보았다. 그러나 외제니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렇게 할 만한 이야기가 있진 않아서…….}

단순한 사교만을 위한 대화 같은 것엔 굉장히 약한 듯했다. 솔직한 태도라서 다시 제안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외제니 공주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웃었다.

{이만 갈게요. 이야기해서 즐거웠어요.}

{후후, 저도요.}

{파이널은 반드시 티켓 구해서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바네사 왕비님 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본 나는 아나스타샤와 세연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이야기했니? 방울토마토 억지로 먹여서 미안하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음악 이야기를 했어요.}

{응? 무슨 음악?}

아나스타샤는 열 살짜리 공주와 내가 무슨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평소 아나스타샤에게도 진지한 소리를 많이 해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곤 했으니까…… 말이 안 통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외제니 공주의 총명함은 생각 이상이었다.

나는 공주가 내 음악을 제대로 읽어 내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질문했다는 것을 말해 주었고,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랐다.

{오…… 정말로? 저 애가 그런 이해력이 있어?}

{예. 제 의도와 암시를 분명히 이해하고 묻는 질문들이었어요. 아침에 명상도 했다고 하던데요.}

{명상? 대단하네. 예전에 요가 잠깐 배울 때 해 봤는데 난 그거 3분만 하면 온몸이 뒤틀리더라고.}

뭐든지 잘하지만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아나스타샤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쨌건 네 연주가 제일 가슴에 꽂혔나 보네. 애들도 알 정도로 선명하다는 건 분명 좋은 거겠지.}

{그런 걸까요?}

{나한텐 아무도 그런 깊은 이야기 안 하잖아. 다들 알캉을 얼마나 연습했냐 같은 거나 물어보고 말이야.}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푹 쉬며 투덜거렸다.

그녀가 이루어 낸 음악은 정말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나머지 사람들은 피상적인 부분에 감탄하는 것에 그치기도 했다.

사실 알캉의 음악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깊은 묘미가 있는 음악인데…… 그러한 음악성도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아나스타샤로선 아무래도 약간 아쉬울 수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직 아나스타샤가 세상의 빛을 본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아나스타샤란 연주자를 연구할 테고, 그럼 미처 두드러지지 않았던 강점들도 속속 밝혀질 터다.

난 분명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현재 평가에 그저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았다.

{이것도 다 협주곡을 망쳤던 탓이지. 이번엔 제대로 해 보려고.}

{믿고 있어요, 아나스타샤.}

{경쟁자인데?}

{경쟁자라도요.}

난 밝게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마주했다. 그녀도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널 믿고 있어, 타티아나. 협주곡이 뭐든 간에 잘 해낼 거라고.}

{우리 다 여기까지 왔잖아?}

거기에 세연까지 끼어들어 우린 다시 서로의 신뢰와 각오를 확인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테이블 정리가 끝났다. 파이널리스트들은 다시 테이블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엔 티 세트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웨이터들이 다가와선 개별 주문을 받아 각자 앞에 있는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차 내음이 뒤섞이며 묘하게 느껴졌다. 난 내 앞에 놓인 캐모마일의 향에 집중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가는 부드러운 분위기에 먼저 공통적인 주제를 내놓은 건 바네사 왕비님이었다.

{올해는 파이널 무대의 풍부함과 연주자들의 피로도를 생각하여 독주곡을 포함시키고 2주의 기간을 두었어요. 모두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말대로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부문 파이널 라운드에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16년도에 의무곡과 협주곡뿐이었던 프로그램에서 독주곡이 한 곡이 포함되었다. 무대에서 해내야 할 곡이 세 곡이 된 것이다.

참가자의 부담이 늘어났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건 16년이 특이했을 뿐이지 그 전인 13년, 07년, 03년, 99년을 돌이켜 보면 쭉 파이널 라운드에선 세 곡을 쳤어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뮤직 샤펠에서 머무는 기간이었다. 아무래도 부담감이 너무 심하다는 평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2주로 기간을 확 늘려 잡은 건 정말 대단한 변화였다.

이 뮤직 샤펠은 콩쿠르만을 위해 세워진 시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이용해 주어야만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콩쿠르를 위해 2주나 비워 두는 것은 비용 면에서도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퀄리티 향상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먼저 감사를 표한 건 앤서니 마셜이었다.

{시간을 더 주신 만큼 훌륭한 연주를 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2주면 충분하죠.}

{이번 의무곡의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 것도 기간에 영향을 받은 건가요?}

그 외에도 여러 결의와 질문이 쏟아졌다. 바네사 왕비님은 미리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차분히 모든 참가자들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가끔 콩쿠르 운영 방면에 집중된 질문엔 심사 위원장님이, 정부 차원의 질문으로 넘어가면 옆에 있는 부총리님이 대답해 주기도 하니 모든 질문에 거리낌이 없었다.

차를 마시면서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슬슬 할 질문도 없어져서 모두 찻잔만 만지작거리게 되자 왕비님은 오찬을 끝마치셨다.

{오늘 모두 즐거우셨다면 좋겠네요. 아마 한두 번 정도 더 비슷한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되도록 모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오찬 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먼저 호스트인 왕비님과 그 일행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고,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던 우리 역시 라운지 쪽으로 나왔다.

식사도 너무 즐거웠고 이야기도 많이 해서 조금 피곤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슬슬 방으로 돌아가 쉬겠다는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그런데 난 돌아갈 방이 없었다.

‘어……?’

생각해 보니 이곳에 와서 라운지와 레스토랑만 왔다 갔다 했지 정작 내가 머물 곳은 본 적이 없었다.

‘내 짐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마지막으로 짐을 맡아 준 건 내 담당 직원인 마리우스와 테오였다. 난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길게 찾을 것도 없이 나와 눈이 마주친 마리우스가 곧장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예, 부탁드려요.}

‘방 소개를 까먹고 있었던 건 아니었구나…….’

난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장 서 가는 마리우스의 뒤를 따랐다. 2주 동안 머물 방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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