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2화 (1,232/1,277)

##  1232화

퀸 엘리자베스 뮤직 샤펠은 1939년에 지어진 80년이나 된 건물이다.

대부분의 클래식 연주자들은 이런 오래된 건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면서 새로운 건물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많아졌다.

그 요구에 응해 지어진 것이 바로 2015년에 지어진 신축 건물인 드 로누아 윙de launoit wing이었다.

‘유리로 된 날개처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오전에 봤던 드 로누아 윙은 본관의 뒤편에 양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정말 날개처럼 보였다.

전면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본관과 잘 어울렸는데, 이렇게 이어진 두 건물은 무척 신비로웠다.

이 멋진 곳에서 앞으로 2주 동안 지낸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난 마리우스를 따라 본관과 신관을 잇는 통로로 향했다.

{걸으면서 드 로누아 윙의 내부 구조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살짝 앞서 걷던 마리우스가 가볍게 손으로 좌우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거대한 신관 건물이 지어진 주된 목적은 거주 연주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복층 하우징 스튜디오가 20실이나 갖추어져 있었는데 각각 1층 좌측에 7실 그리고 2층엔 좌측에 6실 우측에 7실이었다.

거기에 리허설 스튜디오가 두 곳에 콘서트홀을 겸하는 대형 스튜디오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연주자들이 거주하면서 음악적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갖춰진 최신 시설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멋지네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곳이라면 더 갇혀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래도 그런 말씀은 지내실 곳을 확인하신 후에 말씀해 주시죠.}

{……설마 이렇게 좋은데 방 안은 아닌가요?}

{직접 확인하시길.}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린 신관 2층의 복도를 걸었다.

천장이 높은 복도의 한 면에는 스튜디오들이 쭉 늘어서 있어서 방문이 여러 개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악기 연주자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은 모두 유리였다.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복도를 아늑하게 밝혀 주었다. 마치 미술관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방입니다. 조금 외진 곳이라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마리우스가 멈춰 선 곳은 2층의 끝에 있는 방이었다. 명패엔 2.13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조용히 연습하면서 지내기엔 좋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당겨 열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밀어서 여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방음을 위한 이중문이었다.

두 번째 문도 밀고 들어가자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날 맞이했다.

“세상에.”

그저 감탄밖에 안 나왔다.

미리 설명을 들은 대로 이 하우징 스튜디오는 복층 구조였다. 때문에 높은 천장과 기다란 창이 탁 트인 느낌을 주었다.

난 멍하니 걸어가 그랜드 피아노를 어루만졌다. 빛을 받아 검은 광택이 일렁이는 피아노를 당장에라도 연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더 이 방을 살펴봐야 할 때다.

옆을 돌아보니 벽면에 계단이 있어서 2층으로 갈 수 있었다. 난 마리우스에게 물어보았다.

{올라가 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조심스레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침대와 옷장, 냉장고까지 있는 생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심지어 개인 샤워실까지 존재했다. 이곳이 얼마나 편의에 신경을 써서 만든 곳인지 느껴졌다.

이미 내 캐리어들은 옷장 옆에 옮겨져 있었다. 난 신기해하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머물렀던 방들에 비하면 정말 비좁다. 하지만 원룸이라고 생각하면 한 사람이 살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게다가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피아노가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하우징 스튜디오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들어 봤던 나는 이제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생활과 연습을 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브뤼셀의 랑스가에서 지냈던 공간도 비슷하긴 했지만, 그곳은 일반적인 방 안에 그냥 피아노를 들여 놓은 것에 가까웠다.

이런 연습실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말 환상적이에요.}

당장 모스크바에 있는 내 개인 연습실도 이렇게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시겠지만…… 어쨌든 이런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건 내게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잔뜩 들뜬 내가 계단 아래 공간을 활용한 수납함들을 열어 보고 있자 마리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들고말고요. 이렇게 멋진 공간이 있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어요.}

{베르체노바 님처럼 기뻐해 주시는 분도 있지만…… 이곳을 오로지 연습만을 위한 감옥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어서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복층 원룸 구조를 한 이 공간이 연주자들에게 원하는 의도도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같이 연습실에서 온종일 있어도 행복하기만 한 이상한 인간에겐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연습과 생활을 분리해 놓고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이보다 나은 조건이 없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마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감옥이 어디 있나요? 지금 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들어 보니 방음도 잘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완벽한 방음 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다시 살짝 발을 굴러 보았다. 무언가 바닥에서 진동을 잡아 주었고 위로 퍼진 소리들도 벽에서 사라졌다.

상당한 고급 방음 기술이 적용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전체적인 음향을 느끼면서 난 점점 이 공간에 익숙해졌다. 다음으로 궁금해진 건 여기에 피아노 소리를 뿌리면 벌어질 일에 대해서였다.

{바로 피아노를 쳐 봐도 될까요?}

{예. 조율은 미리 해 놓았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더 궁금한 건 없으신지?}

{지금은 없어요.}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1시간 정도 후에 다시 와서 다음 일정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1시간은 휴식 시간을 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마리우스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렸다.

피아노를 칠 생각으로 들떠 있던 나는 문득 내가 있는 이 방을 아나스타샤나 세연은 모를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연락을 할 수단도 없으니 잠깐 나가서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정도는 말해 두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밖에 나가 봐도 되나요?}

{예, 괜찮습니다.}

얌전히 있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제약도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복도에선 항상 저희 직원들이 파이널리스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베르체노바 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시면 자동적으로 저나 테오가 따라붙겠지만, 만약 밖으로 나갔는데도 저희가 따라붙지 않는다면 가까운 곳의 직원을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의 모든 파이널리스트는 연락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항시 직원들이 근처에 있었다.

이전에 세연이 했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뮤직 샤펠에서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무조건 연습만 시키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론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놔둔다. 그러나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건 가장 중요한 규칙인 것 같았다.

마리우스는 명심해 달라는 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만약 아무 보호 없이 혼자 뮤직 샤펠 밖으로 나가거나 해서 생길 불이익에 대해선 저희가 어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점만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마 파이널리스트까지 되었는데 몰래 시내까지 나가거나 하는 사람이 있겠나 싶지만 긴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이 분명 있었기에 이런 주의 사항도 생겨났으리라.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우스는 길게 더 이야기하지 않고 잠시 후에 오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겨진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가 먹먹해지는 이 묵직한 적막은 분명 방음 연습실 특유의 공간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피아노를 내려다보니 어쩐지 피아노도 날 올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 친해져 볼까?”

설레는 마음으로 중얼거리며 난 피아노 건반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났다.

‘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이 꽤 흘러가 있던 경험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놀랄 정도로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복잡한 연습을 한 것도 아니고 바흐의 평균율과 에튀드 몇 곡을 쳐 보면서 사운드를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고 난 아직 하고 싶은 것을 반절도 채 못 해 봤다. 앞으로도 2시간은 더 피아노와 놀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다시 건반 위로 움직였다. 그냥 그 흐름에 몸을 맡기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내 집중을 깨뜨렸다.

{잠시 안내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베르체노바 님.}

{아…… 갈게요.}

난 허둥지둥 일어났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도 연습할 시간은 원 없이 많을 것이니 지금 욕심 낼 필요는 없었다.

이중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니 그것만으로도 시끄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난 살짝 몽롱한 상태로 주변을 살폈다. 옆에 서 있던 마리우스가 물었다.

{짐은 다 푸셨습니까?}

{짐이요?}

{설마 연습만 하신 겁니까?}

그제야 난 가지고 온 캐리어가 2층에 그대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마리우스는 크게 웃었다.

{정말로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짐이야 나중에 풀어도 되죠. 그래서 연습실로서의 감상은 어떻습니까?}

{완벽해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이상 극찬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단어가 더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마리우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복도 쪽으로 팔을 펼쳤다.

{전달해 드릴 것만 빨리 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렇게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나……?’

연주자로서 그게 이상한 태도는 아니겠지만 약간은 자중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난 마리우스를 따라 신관 1층에 있는 작은 사무실 같은 곳으로 향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곳엔 이미 앤서니 마셜이 와 있었다. 아마 오늘 이곳에 온 파이널리스트들에게만 필요한 사항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앤서니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우리 앞에 있는 직원이 들고 있던 서류들을 다시 한번 체크하더니 한 부씩 나눠서 내려놓았다.

{읽고 확인한 후 사인해 주십시오. 필요한 서류들입니다.}

영어로 적힌 서류는 그리 복잡하거나 읽기 어렵지 않았다.

그저 뮤직 샤펠에 있으면서 지켜야 할 것이나 콩쿠르 파이널리스트로서 촬영 등에 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서류들이었다.

나와 앤서니는 천천히 서류들을 읽어 보고 사인을 마쳤다.

서류를 되돌려 받은 직원은 문제가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다음으로 또 다른 종이들을 내밀었다.

{이건 무대에서 연주하셔야 할 미발표 의무곡의 악보입니다. 매수와 순서에 문제가 없는지 봐 주시길 바랍니다.}

{올 것이 왔군.}

앤서니가 기대된다는 듯 중얼거리며 악보를 받았다. 나도 떨리는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세미파이널에서도 미발표 의무곡인 라가 주제에 의한 판타지가 있었다. 우린 콩쿠르 참가 한 달 전에 악보를 받아서 그 곡을 완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엔 2주의 시간만 주어졌다. 그사이 파이널리스트들은 이 협주곡을 완성하여 무대에 올려야 하는 것이다.

받은 악보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총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피아노 파트의 악보.

일단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선 총보를 보는 쪽이 좋다. 난 집중하며 악보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창과 초견에 익숙한 내 눈과 머리는 순식간에 악보를 음악으로 변환해 냈다.

그렇게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난 조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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