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3화 (1,233/1,277)

##  1233화

미발표 의무곡을 처음 보자마자 내가 느낀 것은 이 곡을 빨리 쳐 보고 싶다는 욕구였다.

2주 만에 완성해야 할 협주곡 숙제를 받은 사람의 감상치고는 너무 여유가 넘치는 게 아닌가 싶은 자각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일단 마음에 드니 이 곡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악보엔 음악 자체에 대한 것 외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작곡가 그리고 곡 제목조차도.

‘제목 정도는 적어 주는 게 상식적이지 않나?’

표제 음악이라면 제목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도 많고, 순수 음악이라면 소나타나 판타지 등 곡의 형식을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잘 이해가 가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음악의 작곡가는 상당히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음악으로만 모든 정보를 제공하려 하고 있었다.

음악에서 드러나는 정보는 정말 다채롭다.

특별한 주제나 작곡가의 성향, 생각을 담아 내는 것은 물론이고 더 크게 나아가선 집단과 나라의 시류나 그 시대의 흐름을 포함하기도 한다.

난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도 꽤 많은 곡을 읽고 연주해 오면서 음악의 핵심을 파악하고 필요한 정보들을 더 증폭시키는 데에 상당히 익숙했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조합하다 보면 곡만 보더라도 어떤 작곡가인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오로지 음악적 정보만을 담고 있는 악보를 면밀히 살피면서 음악을 끌어내고 그 이면의 정보도 알아보려고 하던 난 점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익숙했다.

이 곡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측에서 파이널 라운드를 위해 특별히 의뢰한 미발표 의무곡이다.

그러니 일단 현재 살아 있는 작곡가가 쓴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작곡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들뿐이었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 쓴 곡이 내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조금 신기했다.

난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런 곡을 쓸 만한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으로 몇몇 작곡가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대 작곡가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하지만 너무 익숙한 향이 난다…….

‘고전적인 구조가 이토록 견고한데 그 위로 현대적인 화성은 굉장히 세련되었어……. 주제도 상당히 명료하게 느껴지는데 왜 제목이 없지?’

의문과 고민에 휩싸인 채로 난 계속 곡을 읽어 나갔다.

그런데 내 옆자리의 앤서니는 악보를 몇 장 제대로 읽는가 싶더니 그대로 휙휙 넘겨서 정말 페이지만 확인하고는 다시 덮어 놓았다.

{이 곡의 제목은 뭡니까?}

앤서니는 내가 궁금해했던 것을 직설적으로 직원에게 시원하게 물어보았다.

혼자 어떻게든 유추해 보려고 끙끙거렸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바보처럼 옆을 돌아보았다.

난 악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 자리에서 풀어서 제목을 알아내려 했던 것이다.

퀴즈 쇼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혼자서 알아내야만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왜 그런 강박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이 악보를 보자마자 음악의 흐름에 사로잡혔다.

{죄송합니다. 제목은 미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목 미정의 곡을 미발표 의무곡으로 뽑은 건가요?}

{곡 자체의 완성도는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경합을 통해 선발된 곡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한 답변이었다.

본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는 작곡 부문이 있었고, 거기서 우승한 작곡가가 다른 기악 콩쿠르의 파이널에 쓸 미발표 의무곡을 써 주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런데 2012년을 기점으로 작곡 부문은 중지되었고 미발표 의무곡은 외부에 의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콩쿠르 측에서 다른 작곡가에게 접촉하여 곡을 의뢰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명성이 높은 이 콩쿠르 역사에 남을 곡을 헌정하고 싶어하는 작곡가들은 정말 많았고, 자연스레 경쟁도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이 곡 역시 엄청난 경쟁을 통해 이미 우승한 곡이었다.

{그럼 작곡가는요?}

{작곡가분은 일정대로 며칠 뒤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와 앤서니가 온 것으로 파이널리스트 12명이 모두 뮤직 샤펠에 모였다.

그리고 미발표 의무곡도 받았으니 이제 다시 공평한 선상에 서게 되었다.

물론 각 연주자마다 이곳에 와서 곡을 받은 것에 며칠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콩쿠르 측에선 우리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있었다.

{그날 작곡가분에게 질문을 할 시간도 주어질 테니 그사이 해당 곡을 잘 연구하셔서 적절한 질문을 하시길 바랍니다.}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지금은 이 악보 말고는 내어 줄 것이 없어 보였다.

앤서니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와우, 정말 상상 이상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빡빡한 일정으로 완성해야 하는 협주곡을 던져 주면서도 다른 그 어떤 힌트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건 음악으로만 승부해야 한다는 단호한 압력이 느껴졌다.

외부의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도록 스마트폰도 뺏고 감시할 직원들까지 붙여 놓았을 정도이니 당연히 보안과 공정성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고 있으리라.

그 단단함을 느끼면서 살짝 위축된 앤서니와 나에게 직원이 물었다.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이 있어도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우린 고개를 저었고 직원은 깔끔하게 이제 나가 봐도 좋다고 말했다.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마리우스와 또 다른 직원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앤서니의 담당인 것 같았다.

앤서니는 자신의 담당 직원에게 가서 서류들을 맡기더니 악보만 달랑 들고 잠시 서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쪽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베르체노바 양.}

{아, 부르셨나요…….}

{이 곡 어떻게 생각해?}

너무 광범위한 부분에 대해 묻는 느낌이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좋은 곡이네요.}

직관적으로 느꼈던 감상이고 진심이긴 했다.

앤서니도 구체적인 대답을 기대하거나 했던 건 아니었는지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하…… 모르겠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다시 봐도 어려워 보이네. 왜 평범한 현대곡이 아닌 거지?}

{평범했으면 당연히 저희 손에 오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넌 참 착실하구나. 내 헛소리에도 대답해 주고.}

나도 모르게 답했을 뿐인데 앤서니는 피식 웃더니 투덜거림을 멈추었다.

{난 그럼 이거 연구나 하러 갈란다. 넌?}

{저도 그러려고요.}

{그래. 각자 힘내자고.}

예의상으로도 같이하자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우린 어디까지나 경쟁자니까.

각자 어느 정도 기틀을 잡고 난 후에 약간의 교류 겸 정찰로 의견을 슬쩍 떠볼 수는 있겠지만 시작부터 합동으로 연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앤서니는 손을 휘적이더니 쿨하게 자리를 떴고 나 역시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움직였다.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다랐을 때였다. 앞의 휴식 공간에 있던 세연이 날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불렀다.

{타티아나!}

이 건물에서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파이널리스트들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 조금 재미있었다.

{아, 세연. 이런 곳에서 다시 보네요.}

{응? 설마 너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닌가요?}

그러나 학교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선 스마트폰을 쓸 수 없는 대신 담당 직원에게 묻는 것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너랑 만나고 싶어서 물어봤더니 사무실에 갔다고 하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 직원분에게 여쭈어 보면 위치도 알려 주나요?}

{응. 우리만 스마트폰이 없지 직원 분들도 없는 건 아니니까.}

연락 수단이 없는 파이널리스트끼리 만나고 싶을 때 직원에게 물어보면 바로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뮤직 샤펠은 헤매고 다닐 정도로 큰 건물을 아니지만 특정 인물을 찾아다니기엔 무리가 있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이런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난 세연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네 방은 봤어? 어때?}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지? 나도 그래. 복층 스튜디오라니. 일반적으론 상상도 하기 어렵잖아? 몇 호실 받았어?}

{2층의 13호실이에요.}

{끝쪽이네? 난 2층 4호실!}

신나게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세연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잠깐 우리가 보지 못한 며칠 사이 하고 싶었던 말이 정말 많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점심 오찬이 잡힌 데다가 그 뒤엔 내가 방 소개를 받고 사무실에 가서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세연은 그래도 오늘 날 내버려 두지 않고 이렇게 찾아 주었다.

혹시 조금이라도 궁금하거나 어려운 점이 있다면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잘 느껴졌다.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난 나도 모르게 일부러 궁금한 점을 하나 만들어 냈다.

{그…… 아까 오다 보니 본관과 연결된 통로에 뭔가 있었는데요…….}

{아, 거기? 기념품 숍이야. 뮤직 샤펠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팔더라고.}

{기념품이요?}

{응. 우릴 대상으로 한 건 아니지만.}

뮤직 샤펠은 콩쿠르 시기에 파이널리스트를 감금하고 평상시엔 거주 연주자만 머물게 두는 공간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은 1년에 연주회를 수백 번도 넘게 할 정도로 굉장히 활발한 스케줄로 돌아가고 있었고 당연히 대중에게도 공개되어 있었다.

기념품 숍은 연주회에 오는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에코백 같은 건 하나 사니까 편하더라고.}

{음…… 그런가요?}

기념품이라고 하니 흥미가 조금 생기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둘러보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지금 물어본 건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무엇이든 제발 물어봐 달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세연에게 맞춰 주기 위해서였으니까.

사실 내가 정말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저기, 세연.}

{응?}

{미발표 의무곡 방금 받아 왔어요.}

{아, 그래. 알고 있어. 지금 들고 있는 그거지?}

세연은 내 무릎 위에 놓인 서류철을 가리켰다. 이미 내가 사무실에서 뭘 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다른 건 사실 그녀와 상담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받은 곡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똑같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살짝 물어보았다.

{혹시 세연이 생각하기에 떠오르는 작곡가가 있나요?}

계속 머릿속을 간질거리는 무언가 때문에 답답했다.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한데 딱 꼬집어 낼 수가 없었다

현대의 작곡가들에 대해 잘 모르는 나로서는 떠올릴 수 있는 한계가 너무 뚜렷했다.

한계 같은 것에 사로잡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모르는 정보를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연 역시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글쎄……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다들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유명한 작곡가가 쓰는 경우가 많긴 한데, 신예가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만약 신예라면 우리가 알 도리가 없지.}

{그렇겠네요.}

{응. 물론 그럴 확률은 낮긴 해. 기성 작곡가들 사이에서 우리보다 더 어려운 경쟁을 거쳐야 했을 테니까…….}

세연도 나름대로 그사이 알아본 것들을 내게 말해 주었다. 우린 한참 동안 그렇게 음악가로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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