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4화 (1,234/1,277)

##  1234화

이렇게 세연과 마주 앉아 음악을 놓고 대화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곡을 모두 펼쳐 놓고 세세하게 짚어 가면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긴 힘들었다. 무서운 직원 2명이 시퍼렇게 뜬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콩쿠르에선 참가자들 사이에서 음악적 교류가 오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진 않는다.

적당한 교류는 굉장한 도움이 되고 이 콩쿠르가 끝나고 나서도 인적 자산으로 남아 앞으로 음악계의 탄탄한 구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도를 넘는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행위 등은 모조리 차단된다. 조금 전 사인했던 서류에도 그런 항목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가 선이 넘는 것인지 정해진 건 없었으므로 아마 직원들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참가자들 사이를 막아설 것이다.

어지간하면 그 부근에도 가지 않았으면 했다. 세연 역시 이곳에 나보다 오래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이 곡 읽는 데에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저요? 어…….}

{솔직히 말해 줘.}

{사흘?}

{그럴 줄 알았어. 넌 천재니까…….}

세연은 신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솔직히 사흘도 안 걸릴 것 같은데…… 조금 더 길게 말할 걸 그랬나 보다.

난 살짝 힘이 빠진 세연을 북돋아 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세연도 천재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마……. 요즘 들어 정말로 난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

{아, 심각하게 듣지는 마.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눈을 하자 세연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날 그저 안심시키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 오해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기를 쓰려고 했던 게 실수였나 봐. 그냥 내 일이나 잘할걸.}

{무슨 말씀이세요?}

일기 쓰자고 다이어리까지 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이곳에서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만큼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당혹스러웠다.

이야기를 좀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 더 가까이 앉았더니 세연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막상 여기에 일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쓰려고 하니까 일상이 똑같은 거야. 공통 행사들은 파이널리스트들이 다 모인 다음에야 시작되니까…… 그사이엔 그냥 연습하고 밥 먹는 것 외엔 할 게 없었지.}

{아…….}

{그래서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도저히 쓸 말이 없지 뭐야? 오늘은 연습했다. 끝.}

일기를 쓸 생각을 안 했다면 연습을 한 것만으로도 만족했겠지. 하지만 텅 빈 백지를 보면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뭐라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다.

그런 부분에서 세연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이었나……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찾아갔어. 일기에 쓸 거리 만들려고.}

{그것도 좋네요.}

{이상하지 않아?}

{전혀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일기를 쓰려는 건데, 되도록 그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이상할 리가요.}

다른 연주자들을 도와주고 다니면서 친해졌다고 들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

난 그녀가 움직인 계기도 귀엽고 실천에 옮겨서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기뻤다. 세연은 내 말을 듣더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는지 따라 웃었다.

{그리고 전 세연이 다른 분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는 용기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무슨 용기까지야…….}

{저라면 연습하는 데에 몰두하느라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거의 안 했을걸요.}

지나다니다가 만난 사람과 친해지려 하긴 했겠지만 찾아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내 성격상 그건 너무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그러나 세연은 해냈다. 이 멋진 곳에서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물론 세연은 그냥 자기 음악에나 집중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일기를 쓰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다른 연주자들을 보며 무의식중에 영향을 받아 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녀가 잠시 휘둘리더라도 본래 페이스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내 영향권 아래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찾아냈던 세연이었다. 앞으로 더 잘하면 잘했지 못할 리가 없었다.

걱정할 것 없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세연에게 물었다.

{그렇게 친해진 분들이 많나요?}

{뭐…… 영어 쓰는 애들이랑은 그럭저럭. 그런데 그러다가 연습 견학도 했는데…… 못 치는 애가 하나도 없더라고.}

실력에 흠결이 있다면 여기까지 못 온다. 그런 건 알고 있는데도 세연은 약간 압박을 느낀 모양이다.

{그냥 정말로…… 누가 실수 덜 하나 대회 아닌가 싶던데.}

{운이 많이 따라야 할 거예요.}

{운이 중요한 거면…… 나 지금부터 청소라도 하고 다닐까?}

{……예?}

{착한 일을 하면 운이 좋아질지도 모르잖아.}

운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강화할 수 있는 거였나? 언뜻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본 나는 그 말을 그냥 웃어넘기지 못했다.

평소의 행실 같은 것이 그대로 카르마에 적용된다는 이론은 내겐 상당히 현실적인 이론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난 저 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신과 운명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던 길에 봤던 휴게실에 의자 정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은…….}

{뭐라고? 거기 어디야?}

세연이 벌떡 일어났고, 나 역시 질세라 일어섰다.

{제가 정리할게요. 따라오지 마세요.}

{안 돼! 내 운 뺏지 마!}

{제가 발견한 건데요?}

우리는 작은 운이라고 하더라도 콩쿠르에 도움이 된다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절박한 연주자였다.

이런 부분에선 양보하는 것보다는 더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

세연 역시 나와 경쟁하는 걸 즐길 줄 알았다. 난 이 아이가 날 그렇게 봐 준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

뮤직 샤펠에서의 첫날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후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연습을 하며 의무곡을 읽어 내렸고, 해가 저문 뒤엔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났더니 셰프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맛이 어땠는지 묻는 건가 싶어서 찬사를 보냈더니 갑자기 셰프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점심 때 요리를 전부 맛있게 먹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외제니 공주가 자신이 실수한 음식을 폐기하길 권했을 때 내가 그냥 다 먹어 버렸던 것이 이 셰프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셰프도 기분 좋아 보였으니 더할 나위 없었고.

특별히 셰프가 내어 준 디저트 아이스크림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니 피곤함이 엄습했다. 한숨 자고 싶었지만 저녁에도 내 연구는 계속되었다.

‘곡의 완성도는 정말 높아…….’

난 작은 테이블에 악보들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었다. 이런 분석으로 여러 가지 더 자세한 사항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일단 이 곡의 작곡가는 엄격하고 절제된 성격을 지녔을 것 같았다.

보통 작곡가들은 자기 스타일을 브랜드화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피아니스트가 자신만의 음색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지향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더라도 그 색이 묻어 나오기 마련이고, 특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무대에 곡을 낸다는 것은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니 더더욱 욕심이 날 만도 하다.

비단 작곡가라서가 아니라 음악가라면 그런 욕심을 내려놓기 힘들다.

하지만 이 곡은 조금 특이했다.

정갈하고 반듯한 주제 표현력은 어딘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듯했으나 작곡가 본인에게 초점이 가 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 정도로 객관적인 곡을 쓸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스타일도 내겐 굉장히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곡을 다루는 방식하고도 많이 닮았어…….’

예전에 난 자신의 음악이란 것에 집착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각 음악에 딱 맞는 음색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지금 내가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평가를 듣는 건 그 덕분이었다.

이 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제를 선형적으로 펼쳐 놓았는데 그게 결코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굉장히 수준 높고 넓게 느껴져서 이 작곡가의 역량을 가늠해 보면 아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말 누굴까…….”

난 중얼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세연도 다른 파이널리스트들도 분명 이건 기성 작곡가의 작품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게 현실적인 유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자꾸만 신예 작곡가가 이 곡을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관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듯한 이 곡에선 역설적으로 도전과 열정이 살아 있는 신예 작곡가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근거였지만 난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정말 신예 작곡가라면…… 어마어마한 천재겠는걸.”

오늘 하루 이 곡을 읽고 연구하면서 난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깊게 파고들어 볼수록 치밀한 계산과 센스가 돋보이는 곡이었다.

이 안에 녹아들어 있는 수백 년의 작곡 기법이나 수준 높은 실력은 내가 제대로 구사해 낼 수 있을지 겁이 날 정도로 굉장했다.

이런 곡을 쓰려면 정말 엄청난 재능과 노력이 한 몸에 겸비된 천재여야만 할 테지. 분명 그 누군가가 이 곡을 썼고 현존하는 사람이다.

난 연구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기만 하는 궁금증을 간신히 누르면서 일단 음악 자체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밝았을 때, 난 작곡가와 만날 일정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곡을 받았을 때 만큼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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