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5화
전날 커튼을 안 치고 잠들어서 그런지 아침이 밝자 햇살이 잔뜩 들어와 날 깨웠다. 자연적인 알람 시계나 다름없었다.
하우징 스튜디오 2층에서 첫 밤을 보낸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뀌긴 했지만 그런 건 내 컨디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베개만 바뀌어도 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난 생활 환경에 대해 그리 예민하지 않은 편이었다.
“으음…….”
아침이 개운하니 어쩐지 이후 2주간의 일정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기세 좋게 일어나선 간단히 샤워를 하고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사실 정해진 일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전날 마리우스에게 물어보니 일어나는 시간도 아무 때나 편할 때 일어나면 된다고 했고, 당연히 아침 식사도 먹고 싶을 때 먹거나 안 먹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연주자 본인이 알아서 관리해야 하는 부분은 가급적 통제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만약 콩쿠르 측에서 억지로 아침에 깨우거나 하는 일과를 강제했다가 컨디션 난조가 오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침은 빵으로 할까?”
물론 난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할 때 몸 상태도 제일 좋았고.
편하게 준비를 마치고 슬쩍 복도로 나와 봤더니 휴게실 근처에 앉아 있던 내 담당 직원, 테오 벨이 날 발견하고는 눈짓했다.
일찍 움직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벨 씨.}
{좋은 아침입니다, 베르체노바 님.}
테오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거리더니 내게 다가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간밤엔 편안하셨습니까?}
{예. 푹 자고 알람 소리도 없이 일어났네요.}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가볍게 아침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난 테오에게 아침 식사를 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다. 테오는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
{조식을 원하신다면 레스토랑으로, 간단한 커피 등은 카페테리아로 가시면 됩니다. 원하시는 곳으로 가시죠.}
{레스토랑으로 갈게요.}
난 잠시 내 상태를 점검했다. 혹시 레스토랑에서 누군가를 만나 인사하더라도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본관으로 향하는 통로를 거쳐 본관 1층의 레스토랑에 입장했다. 테이블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운영하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직원들이 있는 걸 보니 그냥 연주자들이 아직 아무도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난 살짝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 받겠습니다.}
원래 조식은 대부분 호텔에서도 뷔페 형식이지만, 지금 뮤직 샤펠엔 거주 중인 파이널리스트가 12명뿐이니 개별 주문을 받는 듯했다.
이런 서비스 하나하나도 모두 특별한 대접으로 느껴졌다.
난 아침부터 많이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빵과 샐러드만 주문했다.
‘조용하고…… 평화롭네…….’
난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며 잠시 햇살을 만끽했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냈을 테니 여러 정보에 머리가 어지러웠겠지만 지금은 그저 편안하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생각보다 꽤 좋았다. 앞으로도 가끔은 스스로 이런 시간을 만들어 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전엔 연습이나 하면 되겠지?’
식사를 하고 나면 잠깐 산책이나 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가 연습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기본적으론 자유 연습이니까 뭘 하든 마음대로였다.
연습에 대한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내 머릿속은 음악으로 가득 찼다. 난 그 선율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베르체노바 님.}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마리우스가 날 불렀다. 난 웃으며 그를 마주했다.
이미 테오가 붙어 있는데 굳이 날 찾아 온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을 것을 권하자 마리우스는 감사를 표하곤 앉았다.
{식사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직 주문하신 것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 사이에 오늘 베르체노바 님의 일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괜찮아요.}
기본적으로 모든 일정이 자유라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대우를 받는데 협조하지 않고 내 연습에만 집중하는 건 양심에 굉장히 찔리는 일이다.
어떤 종류의 일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가급적 따라 줄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우스가 설명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오후 1시 30분에 간단한 인터뷰가 있을 예정입니다. 여기 질문지를 미리 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사전에 조율된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난 그가 전해 준 질문지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렸다. 마리우스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라는 듯 덧붙였다.
{전부 세세하게 생각해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읽어 보시고 머릿속으로 적당한 답변들을 생각해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잠깐 읽어 보니 특별히 까다로운 질문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당장 누가 물어보더라도 어느 정도 대답은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한 번 읽어 보고 대비를 하는 것과 안 하는 데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
난 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읽어 보기로 하고 고개를 들었다.
{촬영도 동반되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20분 이내로 끝나더군요.}
{알겠습니다.}
{그다음 5시부턴 미발표 의무곡을 제공한 작곡가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내가 가장 바라던 일정이었다. 아마 다른 참가자들 역시 이 만남을 엄청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마리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곡에 대한 질의응답 등을 하실 기회가 있을 테니…… 이 역시 미리 질문할 것들을 생각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 혹시나 이젠 알려 주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았다.
{작곡가님의 성함은요?}
{현장에서 아시게 될 겁니다. 일부러 그 부분은 파이널리스트 모두가 동시에 알 수 있도록 기밀로 해 둔 부분입니다.}
{직전까지 전혀 알려 주시지 않으시네요.}
{규정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칼같은 규정은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조금 안달이 났다.
‘5시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눈을 감았다 뜨면 5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너무 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난 그 생각의 폭풍을 잠시 가라앉혔다. 5시 전에 있는 시간들 역시 내겐 무척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연습도 해야 하고 인터뷰도 해야 하니까. 그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뤄 두고 5시만 애타게 기다릴 순 없었다.
난 무언가에 집착하면 다른 걸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성향을 알기에 되도록 차분한 마음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잘 준비하고 있으면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둘 다 중요한 일정이네요…… 준비할 게 많겠는데요?}
{오늘 오후는 조금 바쁘지만 내일부턴 자유롭게 하시고 싶은 것들을 할 시간이 훨씬 많아질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파이널리스트들이 뮤직 샤펠에 모두 모였으니 공식 일정들이 하나씩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해하고 있어요. 그럼…… 오전에는 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혹 더 궁금하신 사안이라도?}
{지금은 없어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시길.}
그 말을 끝으로 마리우스는 날 두고 일어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웨이터가 내가 주문한 것들을 가지고 와 주었다.
갓 만든 빵은 정말 입에서 녹을 정도였고 샐러드는 신선했다.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난 빵을 우물거리면서 방금 마리우스가 주고 간 질문지를 검토했다.
인터뷰도 몇 번 해 보다 보니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잘하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
파이널리스트와의 랑데부라는 이름의 인터뷰는 잘 마무리되었다.
콩쿠르의 향방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뮤직 샤펠 내부에서 2주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많았다.
국가적 축제이자 전 세계에서도 주목받는 콩쿠르이다 보니 당연히 정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높은 듯했다.
그 목소리들에 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자들을 통한 인터뷰 등이었다.
‘미리 준비하길 잘했어.’
질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직 열일곱 살인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콩쿠르에 참가했는지 그리고 파이널리스트가 된 지금은 어떤 심정인지 등을 묻는 간단한 문답이었다.
난 그 모든 것에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잘 대답했고, 내게 인터뷰를 한 기자도 내 대답들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한 나는 이후 오후 시간엔 계속 의무곡을 잡고 연구에 시간을 쏟았다.
작곡가에게 물어볼 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떠오른 걸 모두 질문하면 바보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난 이 정도로 수준 높은 곡을 쓴 작곡가에게 할 질문이라면 철저히 검토한 질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거듭 고민하면서 중요한 질문들만 우선적으로 잘 추려 보았다.
{베르체노바 님. 슬슬 일정에 참가할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4시 30분쯤이 되자 마리우스가 찾아와 말해 주었다. 난 마지막으로 악보를 챙겨 들곤 마저 준비를 마쳤다.
작곡가와의 대담이 진행될 장소는 본관의 콘서트홀이었다.
무대에 의자가 세팅되어 있는 걸 보니 아마 저기에 작곡가가 앉고 연주자들은 청중석 앞자리에 앉는 구조인 것 같았다.
공정함을 중요시하는 콩쿠르 특성상 작곡가와 대화할 기회를 준다고 하더라도 공개된 장소에서 모든 대화를 공개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때문에 이런 콘서트홀이 그 대담 장소가 된 것이다.
콘서트홀엔 이미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기자와 직원들이 각자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연주자들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왔니?}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와는 점심에 만나서 같이 식사하고 오후엔 각자 시간을 보낸 후 이제 다시 보는 것이었다.
내가 방에서 곡을 연구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기대되네요. 과연 누구일지.}
{응, 그러네.}
그런데 들뜬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차분했다. 작곡가로 누가 오더라도 어차피 할 일은 똑같다는 듯한 쿨한 태도였다.
난 아나스타샤를 따라 침착함을 되찾았다. 되도록 작곡가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고 싶었다.
아까 전 세계에 나갈 인터뷰를 할 때도 비슷한 생각으로 임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했다.
어른스럽게 신중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좋겠지. 이미 그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해 왔다.
남은 건 이제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뭐 이런 곳에서 대화를 해?}
{가까이 붙어 있으면 귓속말이라도 할까 봐 그런가?}
이윽고 다른 연주자들도 모두 모여 청중석에 앉았다.
이런 곳에서 대담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약간 희한하다는 듯한 반응이 잠깐 일었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5시가 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기자들이나 직원들 사이에서 말소리가 사라졌다.
난 지금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걸 느꼈는지 잡담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대를 울리는 그 소리는 묵직하고도 경쾌했다.
‘……어?’
무의식을 후려치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며 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의무곡을 받아 보고 나서 곡에서 느껴지던 묘한 익숙함 그리고 이 곡의 작곡가에게 들었던 궁금증.
오늘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빨리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까지.
모두 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바라보는 사이 그는 무대 중앙에 섰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입니다.}
낮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는 청중석의 파이널리스트들을 압박했다.
파이널리스트들은 길고 치열한 경쟁 끝에 여기까지 온 역전의 용사들이고, 2주 동안의 시간을 테스트하는 마지막 시련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시련의 주인으로서 작곡가 에르네스트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그가 맞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여전히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