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6화
어지러웠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를 못 본 지 얼마나 되었지? 거의 두 달?’
한창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바쁘던 때,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자신도 작곡 콩쿠르에 나가야겠다면서 훌쩍 떠나 버렸다.
그땐 제대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떠난 것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이 있었을 뿐, 지금 이렇게 마주할 때까지 난 그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곡을 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지금 내 상황과 똑같았지만,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연주자와 달리 작곡가는 작정하면 외부 도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으니 다른 콩쿠르들도 으레 다 그렇게 외부 연락은 차단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아쉬운 마음이 울컥 솟아났지만 사실 그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리라.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건 왜 하필 퀸 엘리자베스냐는 것이었다.
세상엔 다른 작곡 콩쿠르도 많다.
그중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요구되는 난이도는 굉장히 높은데 막상 스포트라이트는 작곡가가 아니라 연주자들에게 향한다.
작곡가의 명성도 물론 올라가긴 하지만 아무래도 주인공이라고 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에르네스트는 이곳에 곡을 냈다. 난 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연주자로서 참가했으니 그는 작곡가로서 참가한 것이다.
‘대체 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게 뭘 바라고 있길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마주하자 약한 패닉마저 왔다. 난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음악을 놓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완전 새하얗게 날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현실은 명료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피아노 연주자들이 가늠하기 어려운 지점에 가 있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모두의 인정을 받아 파이널리스트들에게 곡을 내어 주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난 이 콩쿠르의 마지막 난관으로 에르네스트가 우리 앞에 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마치 음악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무대 중앙 의자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아마 저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러시아 중앙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며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한 지는 1년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짧은 이력이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 그가 쓴 곡을 충분히 연구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그의 미숙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천재성의 증거였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무언가가 무대 위에 올라 있었다.
모두의 침묵이 무거웠다. 그 속에서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마쳤다.
{여러분들께 제 곡을 선보이고 연주를 부탁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충격에 빠져 있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모두 수준 높다고 평가하며 분명 기성 작곡가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음악이 겨우 열일곱 살의 작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까스로 애쓰는 상황이었다.
그 긴장감 속에서 처음 입을 연 건 알레한드로였다.
{제가 알기론 커리어가 그보다 더 화려하신 걸로 아는데요?}
에르네스트가 가진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경력은 지금 다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다. 하지만 그는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작곡가로선 이게 전부입니다.}
그 태도는 아주 견고하고 건조해서 더 이상 무어라 묻기 어려울 정도였다.
능글거리며 말 걸기를 잘하는 알레한드로조차 말문이 막혔는지 조용해졌다.
알레한드로는 에르네스트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땐 아마 압도적인 선배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알레한드로가 도전자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쉽게 깨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의자 팔걸이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짧은 커리어이니 여기에 대해선 달리 말씀드릴 것이 별로 없군요. 대신 제 음악에 대해선 문의하신다면 길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파이널리스트들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을 상기한 듯했다.
지금 모두들 상당히 충격을 받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연주자로서의 목적이 바뀌진 않는다.
{이 곡을 작곡하시는 데엔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한 달입니다.}
{한 달?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입니까?}
기간을 물어본 앤서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에르네스트가 곡을 악보에 쓴 건 한 달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보다 오래되었으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대답했다.
{절대적인 시간을 놓고 보면 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 두 곡을 동시에 작곡했으니까요.}
{……?}
{먼저 어떤 과정을 통해 제 곡이 여러분들께 가게 되었는지 설명 드려야겠군요.}
말문이 막힌 앤서니를 두고 에르네스트는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제가 있었던 곳도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전자 기기를 쓰지 못하고 외부로 나갈 수 없는 격리 공간이었죠. 그곳에서 전 한 달 동안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온 게 격리 이후 첫 외출입니다.}
난 그가 말하는 것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마 심사를 대기하던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을 격리되어 있었으리라.
아무 통신 수단 없이 외국에서 있었던 두 달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끼친 건지, 아니면 미리 준비를 많이 해서 온 건지…….
그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의뢰받아 작곡한 곡은 두 곡. 그중에서 다른 작곡가들과 경합하여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간 그 곡입니다.}
두 곡을 작곡한 다음 한 곡만 고르다니…… 우리가 앞서 치렀던 경선에서 겪은 일과 똑같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무척 까다롭기로 유명하지만 그건 참가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곡을 낸 작곡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이 콩쿠르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규정은 잘 알고 있다. 에르네스트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어 루카 아르젠토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곡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데…… 미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왜죠?}
그것도 모두가 궁금해하는 부분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딱히 표제를 염두에 두고 쓴 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추후 짓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협주곡 1번으로 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몇 번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자 분위기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당혹스러워하던 연주자들은 순서대로 손을 들고는 궁금했던 것들을 에르네스트에게 물어보았다.
{이 협주곡에 악장 구분은 없지만…… 형식은 역시 소나타입니까?}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템포가 상당히 변화무쌍한데 비해 스타일 지시는 드문드문 있더군요. 일부러 이렇게 하신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임의대로 해석하여 연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콩쿠르 측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인 질문들에 대해선 에르네스트도 딱히 더 말해 줄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난 조금 더 심화된 질문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도저히 그에게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와 세연도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가만히 듣고만 있는 상태였다.
내가 태연하게 먼저 물어본다면 조금 나아질까? 사실 이렇게 위축되어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난 그가 작곡가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여기에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용기가 나질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무슨 말을 들을지도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무서웠다.
{질문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죠?}
{이 곡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미리 말하신 적은 없습니까?}
질문한 건 장 레이였다. 별것 아닌 질문이었는데 난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난 불안하게 그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격리된 상태에서 작곡한 곡입니다.}
{격리 전에 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계속되는 질문은 진한 의혹을 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모르쇠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는 간접적으로 묻는 걸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직설적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풍문에 약한 저도 들었습니다. 중앙음악학교라면 베르체노바 양이나 이즈마일로바 양과 같은 학교이지 않습니까? 작곡가님은 그중 베르체노바 양과 깊은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의혹을 가지고 있는 건 비단 저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근거 없는 소리는 그만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교내에서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그런 소문이 돌아다닌 지는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런 소문에 진지하게 대할 여유도, 이유도 찾지 못해서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해결해야 할 상황이 산더미인데 내 의사와 관계없이 조성된 소문에 구태여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 내버려 둬서 돌고 돈 소문은 이미 사실인 것처럼 불어나 있었다. 어떻게 해명한다고 하더라도 불리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에르네스트가 파이널 무대의 의무곡 작곡가라는 것을 보자마자 난 이런 상황이 올 것이란 걸 무의식중에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만두기라도 해야 하나?’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위기에 강한 건 대체로 무대 위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이미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정리하여 이야기했다.
{우선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믿고 이런 장소에서 묻는 건 신중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당연히 정보를 미리 알려 준 적도 없고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니 당연히 더 걸고넘어질 건 없었다.
하지만 난 굳이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든 에르네스트에게 화가 났다.
레이는 자신이 너무 공격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경솔한 질문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음악적 관계에 대한 건 확인된 사실입니다. 소나타를 베르체노바 양에게 헌정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음악적으로 교류가 잦았으니 그만큼 서로를 음악가로서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고, 이런 곳에선 그런 관계가 유리함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에르네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