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7화
만약 에르네스트가 이전에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내게 힌트를 주었다면 난 곧바로 콩쿠르를 포기하고 나가 버렸을 것이다.
난 음악가로서 그런 상황을 모른 척 받아들일 생각이 절대로 없었다.
지금 내가 그나마 얌전히 앉아 있는 건 정말로 그가 출국하기 한참 전부터 음악적 교류를 일체 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전전긍긍하게 만들 정도로 그는 철두철미했고, 지금 그 모든 행동이 바로 설득력으로 작용하여 날 자리에 앉혀 놓고 있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에르네스트는 이런 상황을 전부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그 정도로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내가 납득하지 못하리란 것도 파악한 그가 다른 사람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장 레이의 의혹은 매우 날카로웠지만 에르네스트는 작곡가와의 대담에서 이런 질답도 으레 오가야 한다는 듯이 차분히 대답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중 어느 한 사람에게만 유리하도록 곡을 쓸 수 있다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설명을 드리죠.}
단순히 특혜 같은 건 없다고 말로만 하는 것으론 설득력이 없다. 에르네스트는 왼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우선 제가 콩쿠르 측에서 요청받은 곡은 세 곡이었습니다. 그중 한 곡은 기본 심사를 위해 외부에서 작곡한 곡이니 지금 여러분과 상관없는 곡이고, 중요한 건 격리 상태에서 쓴 두 곡인데.}
한 손가락을 접고 브이 사인을 흔들며 에르네스트는 잘 들으라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두 곡 모두 제가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콩쿠르 측에서 주제와 형식, 템포와 길이 등 거의 곡 전체를 통제했고 전 철저하게 그 틀에 맞추어 작곡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12명이 공정하게 2주 만에 완성해야 하는 곡이니 길이와 난이도가 적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처음부터 콩쿠르 측에서 조건들을 정해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관리했던 것 같다.
주제와 형식까지 콩쿠르 측에서 제시했다면 정말 작곡가는 감금당한 상태에서 문제를 받아 한 달 동안 답을 써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준비해야 할 곡이 많을 뿐 음악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선 자유로웠던 연주자들보다 작곡가의 입장이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한 의도를 곡에 붙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이곳의 음악가들은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사람들이었다.
조용해진 청중석을 내려다보며 에르네스트는 손을 내렸다.
{심사 끝에 두 곡 전부 통과했으며 그중 한 곡을 고른 것도 제가 아니라 심사 위원단입니다. 이 과정에 의구심이 든다면 보다 자세한 심사 평가지를 서면으로 요청하시면 될 겁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벨기에 최고 권위의 콩쿠르에서 러시아 꼬맹이 둘이 장난질을 하려 든다 한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대로였다.
콩쿠르의 엄격한 심사와 조건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그 정도로 마무리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전 작곡가로서 경력이 짧고 쓴 곡이 많지 않습니다. 절 연구할 수 있을 정도의 데이터가 있을 리 없으니 이곳의 그 누구도 절 그렇게 잘 알진 못할 겁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역시 마찬가지죠.}
그제야 처음으로 에르네스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청중석보다 높은 무대 위,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쥐고 날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아주 냉정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내 이름도 예의를 갖춰 부르고 있었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누구도 잘 알진 못할 거란 말에 조금 오기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에르네스트는 자존심 강하고 독선적이며 조금 오만하다.
하지만 동생을 아끼고 프로로서 팬 서비스에도 진지하며 겉으로 내는 말보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 훨씬 더 깊었다.
난 그런 그의 사려 깊은 면모를 정말 좋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무대 위에 있는 에르네스트는 약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팔에 부상을 입고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 다시 저렇게 무대 위에 선 모습은 정말 존경하지만, 솔직히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불편하고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로 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날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뛰어 올라가 그를 붙잡고 마구 흔들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껴 꾹 참아야만 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레이도 어느 정도 납득은 한 것 같았지만 말끔하진 않은지 재차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선수를 쳤다.
{반대로 제가 궁금하군요. 제가 뭘 해야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거꾸로 날아든 질문에 당황한 듯 레이는 움찔하더니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어떤 식으로요?}
{그…….}
레이는 그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특별한 방법 같은 것이 있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엄정한 심사를 거쳤기에 상식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없었다.
언젠가 내가 연구해서 에르네스트에게 넘겼던 음악 기호. 그게 악보에 들어갔다면 내가 그 의도를 알아보기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게 심사에서 통과될 리 없었다.
심지어 악보에선 기본적인 기호들도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었다.
디지털 사보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덜어 낸 것이다.
굳이 억지로 더 떠올려 보자면 이 세상의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 중 나만이 온전히 쓸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그걸 에르네스트가 악보에 넣는다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수를 써야 한다.
모두들 나름대로 상상력을 쓰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연주자가 나섰다.
{그쯤 하죠, 장 씨. 우리 다 곡을 읽어 보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 중 특정 누구를 위한 곡이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던데.}
루카 아르젠토였다. 그는 더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라고 슬슬 확신한 듯했다.
레이는 뒤늦게 인정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누군가 짚고 가야 할 문제였습니다.}
{당신 말도 맞죠. 하지만 여긴 산 정상입니다. 각국의 음악가들이 한곳에 모이는 자리이죠. 당연히 관계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루카는 당당하게 이곳을 산 정상이라고 칭했다. 그 자신감 있는 태도는 파이널리스트 모두에게 퍼져 나갔다.
조금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 말대로 이 콩쿠르의 참가자들은 수백 명에 달했다. 그중 이곳에 도달한 건 단 12명.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특별한 사람은 당연히 그 주위 사람도 특별하기 마련이고 결국 모일 만한 곳에서 모이게 된다. 그게 바로 정상인 이곳인 것이다.
한 번에 모두를 납득시킨 루카는 피식 웃더니 슬쩍 레이에게 말했다.
{일례로 장 씨가 사사하는 스승께서도 심사 위원으로 있지 않습니까?}
{그, 그건 맞지만 제 심사엔 참가하지 않으시니 상관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심사 위원으로서 말씀은 하실 수 있겠죠.}
이 콩쿠르엔 심사 위원들의 제자도 여럿 참가해 있었다.
물론 해당 참가자가 무대에 오르면 관계 있는 심사 위원은 심사를 하지 못하도록 제외되지만 그 외의 다른 제한 사항은 없었다.
이런 시스템에 가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루카의 산 정상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관계를 따져서 통제할 순 없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 위원에 위촉될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라면 으레 그 제자 역시 뛰어날 테니 콩쿠르에서 좋은 실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펄쩍 뛰는 레이를 보며 루카는 지금 이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는 듯 다시 이어 말했다.
{음악 학교 등의 시스템을 거친 뛰어난 실력의 작곡가가 피아니스트들과 아무 관련이 없기는 정말 어려울 겁니다. 심지어 지금 이곳의 12명만 무관계하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파이널리스트가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73명과의 관계성을 따져 보는 건 비현실적이죠.}
더 넓게 따지면 73명도 아니고 예선 참가자들까지 수백 명에 달한다. 그 정도 관계성에서 벗어난 작곡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레이도 더 이상 억지를 쓸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아르젠토.}
{저희 중에 이해 못 한 사람은 이제 없을 겁니다, 작곡가님.}
상황을 정리한 루카가 무대 쪽을 향해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곡을 받고 2주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불안과 걱정 모두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초점이 약간 흐려진 것 같아서 제가 여러분이 걱정해야 할 부분을 짚어 드리자면…….}
무대 앞을 서성이며 이야기하던 에르네스트는 우뚝 멈춰 서더니 다시 청중석을 내려다보았다.
{미리 말하건대, 제 곡은 어렵습니다.}
그 선언은 섬뜩하게 들릴 정도로 무서웠다. 파이널리스트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에르네스트는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이어 말했다.
{얕보면 큰코다치실 겁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북극 한가운데에 툭 떨어진 것처럼 홀 안에 냉기가 찼다.
여유롭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작곡가가 이렇게 대놓고 어렵다고 겁을 주니 모두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유쾌한 사람은 남아 있었다.
{저기 있잖아요.}
{예, 말씀하시죠.}
{혹시 제가 우승하면 이 곡 저한테 헌정해 줄래요?}
프랑스 출신의 레베카 뒤세. 그녀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콩쿠르 파이널 곡을 헌정해 달라니?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도 못 해 봤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본 지금, 난 살짝 의욕이 나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