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38화 (1,238/1,277)

##  1238화

콩쿠르 파이널을 위해 작곡된 협주곡은 그 후 어떻게 되는 걸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뒤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곡 자체가 좋아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면 그 후로도 자주 연주되고 판권을 팔아 실질적인 수익을 얻거나 유명세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콩쿠르 측과 계약이 어떤 형식으로 되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에르네스트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애매한 태도로 답했다.

{글쎄요. 바로 확답을 드리긴 어렵네요. 하지만 콩쿠르 측에 문의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면 다음에 말씀드리죠.}

{그런가요…… 음.}

시원한 답변이 나오지 않자 레베카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정말로 협주곡을 헌정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에르네스트는 수많은 작품을 쓸 테고 각각의 곡들은 걸맞은 음악가들에게 헌정되리라.

거기에 내가 간섭할 권리는 전혀 없지만 만약 경쟁을 통해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최선을 다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혼자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다른 파이널리스트들은 각자 기회를 잡아 질문했다.

{다음도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다음 주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할 때 저도 참관합니다. 그때 지금처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럼 그때 피드백도 주십니까?}

{아뇨, 전혀 없을 겁니다. 심사의 일환에 가깝다고 생각해 주시길.}

그를 보는 것이 이번이 끝이 아니란 사실에 조금 안도가 된다.

하지만 그때도 수많은 사람이 우릴 보고 있을 것이고 난 에르네스트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겠지.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우승한다면 내게 곡을 헌정해 주고 무슨 말이든지 들어 주려나?

난 무대 위의 에르네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질문 더 받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질문들이 이어졌다.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하면 에르네스트는 말을 아끼고 원론적인 대답으로 회피해 버리기 때문에 이번엔 조금 더 지능적인 질문들이 동원되었다.

어떻게든 힌트를 얻어 내 보려는 파이널리스트들의 시도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굉장히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의 말실수도 하지 않았다.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

확실하게 작곡가로서 모두를 상대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그사이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따지는 투의 말이 나와 버릴 것 같았다.

이곳에서 에르네스트를 만난 건 사실 반갑다. 내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도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속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서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한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런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우린 충분히 마주 보고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런 날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이런 상황도 모르고 레이는 의혹을 제기하질 않나, 레베카는 곡을 헌정해 달라고 하질 않나……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되도록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지만 언짢은 기색이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옆에 있는 세연도 내 눈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셋이 다 침묵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홀로 입을 열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나온 러시아어이기도 했고.

한순간 주위가 모두 조용해졌다. 에르네스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딱딱하게 대응했다.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지금은 다른 분들도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영어를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뒤편의 직원에게 부탁하여 통역을 하셔도 됩니다.}

{깐깐하기도 하셔라.}

{기본적인 겁니다. 다시 질문하시죠.}

공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에르네스트를 마주하면서 아나스타샤도 친구를 대하듯 할 순 없었다.

{기분이 어떻냐고 물었어요.}

영어로 들어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가만히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삐딱하게 발을 바꿔 서며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군요.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적인 거예요? 오늘 아침에 뭐 먹었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우리 12명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보고 있는 작곡가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것 정도인데?}

아나스타샤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묻고 있었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굳이 물어보자면 작곡 당시의 기분을 묻든지 했어야 했다. 음악이란 그러한 기분에도 상당 부분 움직이곤 하니까.

하지만 이미 우리 손에 악보가 들어와 있는 이상 지금 에르네스트의 기분 같은 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물었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좀 긴장되는군요.}

결국 살짝 양보해 주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뻣뻣하던 기운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오갔다.

{긴장?}

{저게 긴장한 사람이야?}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열일곱 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의뢰를 받아 훌륭한 곡을 써 냈고 그 곡을 파이널 라운드의 의무곡으로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엄청난 일이었고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그리고 무대에서 우릴 대하는 태도도 이미 자신이 할 일을 다 해낸 사람으로서 한참 위에서 여유 있게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뒤늦게 겸허함 같은 걸 갖추려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 콩쿠르에 곡을 내기 위해 도전하면서 제가 미리 예상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지금 이 자리까지입니다. 이후는 저로서도 미지의 영역이죠.}

이룰 것을 다 이루고 나서도 에르네스트는 마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말했다.

그의 눈빛이 청중석을 쭉 훑었다. 중간에 내 쪽에도 잠깐 시선이 왔다.

너무 순간적이고 거리도 멀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날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제 손을 떠났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면서 여러분이 제 곡을 잘 연주해 주시길 바라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파이널리스트들은 모두 에르네스트의 멘트에 박수를 보냈다. 그 뒤엔 다시 이어서 몇 가지 단조로운 질문들이 오갔다.

난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가 뭘 원하는지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는 형식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이곳에서 그걸 이해한 사람은 몇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작곡가와의 대담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몇몇 직원이 나와선 상황을 정리하고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나갔다.

따라 나가서 말을 걸려고 하면 직원들이 막아서겠지. 잠깐이라도 그와 이야기할 방법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퇴장하는 에르네스트를 향해 파이널리스트들은 짧게 박수를 보냈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는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곡가님 열일곱 살이라고 했었나? 갑자기 마지막에 조금 약한 모습 귀엽지 않았어요?}

{실컷 내려다보더니만, 뭘?}

{무대가 위니까 내려다보는 거겠죠.}

{어디 내 곡을 쳐 봐라 우민들아, 하는 태도 아니었어?}

{무슨 억지 모함을 해도 그렇게 무식하게 해요?}

레베카와 앤서니는 티격태격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난 두 사람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한다. 아마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왜 가까워지려는 내 모든 노력을 무시하고 이런 장소와 상황을 고른 걸까.

생각을 너무 많이 했는지 머리가 아팠다 나는 일단 방으로 가서 조금 쉴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체노바 양.}

그런데 레이가 날 불러 세웠다. 그와 이야기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 부르셨나요?}

{그게…… 어…… 아깐 미안했어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난 그에게 별로 감정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사과를 받아야 한다면 제대로 받고 싶었다.

{뭐가요?}

{확인되지 않은 일을 토대로 이야기해서요……. 당신도 분명 곤란했을 텐데.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경솔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레이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 때문에 나서긴 했지만 거기에 특별한 악의 같은 건 없었던 듯했다.

물론 상황이 안 좋아져서 내가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레이로선 나쁠 것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억지 의혹을 만들어 내세우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일단 좋게 마무리 짓고 싶어서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조용한 곳에서 따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걸요. 해야 할 질문이라면 해야죠.}

나와 에르네스트 그리고 레이만 삼자대면 같은 걸로 의혹을 풀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 난 차라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되레 잘됐어요.}

{네?}

{저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제가 하는 것보다는 다른 분이 나서 주시는 것이 낫죠.}

{그…… 저한테 화가 많이 났나 보네요.}

{아뇨? 전혀.}

모처럼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려고 하는데 왜 화가 났냐고 묻는 건지 모르겠다. 난 레이에겐 정말 나쁜 감정이 없다. 에르네스트라면 모를까.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미안해요. 나중에 갚을 수 있다면 갚도록 하죠.}

레이는 끝까지 몇 번이나 사과하고 나서야 떠났다.

대체 이곳에서 뭘 어떻게 갚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휙 가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어쩐지 조금 지친다. 난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러자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불렀다.

{타티아나.}

{예.}

{우리 잠깐 카페 갔다가 갈래?}

이 상황에 대해선 아나스타샤도 무관하지 않다. 그녀 역시 에르네스트와 어려서부터 같이 커 온 소꿉친구였으니까.

난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어졌다.

아까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나보다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보니 상황을 무겁게 생각하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럴까요.}

난 나도 모르게 눈으로 세연을 찾았다. 마침 그녀는 이연주와 대화 중이었다. 아나스타샤와 떠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린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찾아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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