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9화
카페에 다다르기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걸으면서 이야기했다간 불만만 터져 나오리란 것을 서로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런 감정 상태로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일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 앞에서 말실수를 할 순 없었다. 심지어 그것이 에르네스트에 관한 내용이라면.
감정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난 그녀와 해야 할 이야기들을 차분히 정돈했다.
“저기 앉자.”
생각하면서 걷는 사이 우린 본관 1층의 카페테리아에 도착했다. 지금은 아무도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바리스타와 웨이터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적당히 앉자 웨이터가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뮤직 샤펠의 모든 서비스는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난 루이보스 티를, 아나스타샤는 에스프레소를 한 잔 주문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다시 테이블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안했다.
“커피 한번 안 마셔 볼래?”
“……예?”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진담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희미하게 웃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인 것 같았다.
다른 곳이라면 아나스타샤와 어울려 주기 위해 뭔들 못 하겠냐마는. 지금은 정말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난 난색을 표했다.
“카페인은 안…….”
“알아,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르고 마셔 보라고 하겠니?”
강요하는 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아나스타샤가 턱을 괴었다.
난 카페인에 예민한 체질이라서 심장이 크게 뛰고 기분이 들뜨는 등 과민 반응을 보인다.
지금 그걸 알면서도 권한다는 건…… 내가 좀 들뜨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보기에도 어지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난 속으로 조금 후회하며 물었다.
“제가 지금 그렇게 기분 상한 것같이 보이시나요?”
“음…… 조금?”
“아나스타샤는 어떤데요?”
지금 아나스타샤의 겉모습만 봐선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각인지 알기 어려웠다.
오래 알고 지낸 눈치가 있긴 했지만 난 그녀를 떠보려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귀 부근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네가 언짢아하는 걸 보니 좋다가도 싫기도 하고……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네. 그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한 거야.”
좋을 이유는 또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심경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인지 천천히 이야기하던 아나스타샤는 아예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너한테 사과할 일도 있고.”
“사과요? 왜요?”
“이따 말할게.”
무슨 사과일지 짐작도 안 간다.
아나스타샤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한동안 창가를 내다보았다. 아까 에르네스트에게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처였던 난 조금 위축되었다.
다행히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곧 아나스타샤가 다시 똑바로 고개를 들고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가 너 때문에 저 자리에 지원했다는 거 알고 있지?”
이 모든 상황의 근원에 접근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장 레이가 제기한 의혹처럼 그가 내 우승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지원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다른 곳이 아닌 퀸 엘리자베스에 지원한 동기가 가느다란 실로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요…….”
“넌 거기에 불만이 있을 테고.”
“……당연히 그렇죠. 전 에르네스트가 천천히 음악계에 복귀할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려 했어요. 그사이의 간극은 충분히 대화로 메울 수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저 때문에 무리했다고 하면 제가 도대체 뭐가 되나요?”
에르네스트는 수술을 마치고 여전히 재활 중이다. 난 모든 시설과 자원이 있는 모스크바에서 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치료에 필요한 것들은 물론이고 곡을 작곡해 온다면 얼마든지 초연을 해 주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전하며 음악가로서도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주려 했다.
그것이 내 도리이자 책임이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서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와 동등해지려 애썼다.
난 그것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했다.
그래서 작곡 콩쿠르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심지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참았었는데…… 그게 퀸 엘리자베스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로 서로의 도움이 원천 차단되는 곳에서 나와 마주하고 싶었던 거야?’
무시무시한 규정과 보안으로 유명한 이 콩쿠르에서 난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하거나 돕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성과를 이루고 나 역시 그를 따라야 궁극적으로 동등한 무언가가 완성되리라 생각한 듯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는 볼멘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냥 콩쿠르도 아니고 긴 시간 연락도 안 되고 감금 상태로 집중해야 하는……. 그사이 진찰이나 제대로 받았는지 의문이에요. 그런데 심지어 전 그걸 지금 물어볼 수도 없죠.”
짜증을 내지 않으려 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말에 두서가 없었다.
겉보기에 그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 꾹 억눌러 왔던 생각들이 마구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걸 차마 말로 다 꺼내지 못하고 어깨를 떨자 아나스타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해. 의사가 계속 봐 줬을 테니까.”
“안 봐 줬다면요?”
“그렇진 않아. 콩쿠르 측 입장에서 아픈 사람을 의사도 없이 무작정 가둬 둘 수 있겠니? 혹시나 문제 생기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건 그렇네요.”
난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이 카페테리아에도 단 12명을 위한 직원들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
아마 에르네스트도 동등한 지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의사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아나스타샤처럼 그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안심할 수 있으면 나도 편하겠지만…… 난 어쩐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솔직히 불안했다.
상황을 머리가 이해했어도 마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입을 삐쭉 내밀고 토라져 있자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그런데 화는 잘 냈어. 에르네스트 봤니? 네 눈치 잔뜩 보고 있던데.”
“냉정하던데요.”
“아하하, 전혀 아니야. 그 애가 말했었잖아. 앞으론 미지의 영역이라 자기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고.”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던 것을 기억한다. 난 그게 단순히 파이널리스트 모두에게 던지는 멘트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증명해 주었다.
“그거 너한테 하는 말이잖니.”
“……그렇겠죠.”
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에르네스트 역시 거기까지 예측하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화내지 말고 음악에 집중해 달란 의미로 부탁을 전했던 것이다.
그 말을 하기 직전엔 긴장 중이라고 하기도 했고……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건 아마 그도 비슷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잠시 그의 입장도 생각해 보다가 아나스타샤의 통찰에 감탄하며 물었다.
“그걸 다 예상하고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보셨던 건가요?”
“응? 음……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쭈뼛거리더니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슬슬 사과할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런 말도 했었지.
도무지 짐작도 안 가서 그냥 잊고 있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이젠 말해도 되겠다는 듯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 나 에르네스트가 이 콩쿠르 작곡가 모집에 지원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예!?”
아까 홀에서 에르네스트를 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왔다.
어떻게 안 거지? 설마 곡을 보고 알아챈 건가? 난 전혀 몰랐는데 아나스타샤에겐 무언가 보이기라도 했었나?
너무 당황스러워서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요? 언제부터요?”
“학교에서 그 애랑 구세프 선생님이 싸우는 걸 들었거든. 추궁해서 알아냈지.”
“그럼 처음부터잖아요.”
“응.”
곡을 받고 모종의 확신을 느껴서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단순한 방식으로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계획을 들켰던 것이다.
한 달 전 학교에서부터 아나스타샤는 모든 걸 알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난 학교에서 그녀가 갑자기 거리를 조금 두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콩쿠르 도중에 그녀가 했었던 몇몇 말들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군요.”
“입 다물고 있어서 미안해. 아, 걱정하지 마. 나도 에르네스트가 무슨 곡을 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저 애는 나한테도 철벽이었거든.”
그 점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난 지금껏 봐 왔던 아나스타샤의 태도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세미파이널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내게 반드시 파이널로 와야 한다고 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한 응원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일단 아나스타샤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건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 마음고생도 그녀가 더 했겠지.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도 똑같이 그랬을 테니까. 때문에 배신감 같은 게 들진 않았다.
하지만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솔직히 나도 저 애가 그린 계획대로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어. 역시 난…….”
“아뇨, 아직 몰라요.”
“응? 뭐가?”
난 아나스타샤의 말을 툭 잘랐다.
아나스타샤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 지금 그녀에게 화를 낸다면 그만큼 미친 사람도 없을 테지.
그래서 난 상황을 단순하게 압축하고 내가 할 일을 명료하게 결정하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마침 웨이터가 우리가 주문한 음료들을 가져왔다. 난 앞에 놓인 루이보스 티를 마시지 않고 웨이터에게 다시 부탁했다.
{죄송합니다. 여기 카페라테 한 잔 더 가져다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두말하지 않고 웨이터는 내 주문을 받아 주었다.
커피 주문에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갑자기 웬 커피니? 안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깐 마셔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아나스타샤도 느끼는 듯했다.
난 지금 한결 머리가 맑아져 있는 상태였다.
커피를 마시고 조금 더 들뜨게 되면 한결 더 맑아질 것 같았다. 그럼 해야 할 일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방으로 돌아가면 당장 악보를 다시 꼼꼼히 체크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기권하려고요.”
우승 상품에 곡 헌정이 붙어 있다면 욕심이 나긴 하지만 그건 아직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난 확실한 것부터 하나씩 잡아 나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바로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웃으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애가 네 성격 모르겠니?”
나와의 모든 교류를 없었던 것처럼 했으면서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반대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