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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40화 (1,240/1,277)

##  1240화

갑작스러운 일들이 워낙 많이 터져서 정신력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동안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던 답답한 마음 등이 해소되어서 조금 개운한 느낌도 있었다.

그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밀어붙이는 계획을 알아차리고도 막지도 못하고 내게 알리지도 못했다.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내게 털어놓고는 숨 좀 쉬겠다는 듯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나도 말렸었어. 구세프 선생님이랑 그 애가 싸웠던 것만큼이나 대판 싸우기도 했고. 하지만 그 고집을 어떻게 꺾니?”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하소연하듯 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정말인가요?”

“정말이고말고. 중간에 레이가 물어봤던 거, 나라고 예상 안 했겠어? 우리 다 같은 학교 같은 과인데. 당연히 누군가 시비를 걸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 전부고.”

나 역시 레이의 질문을 들으면서 결백을 주장할 생각조차 못 했었다.

에르네스트가 제대로 준비해서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일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잔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내 쪽으로 향하며 덧붙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문제는 한창 최고로 주목받는 너겠지.”

뮤직 샤펠엔 파이널리스트와 콩쿠르 직원들뿐만 아니라 각 언론사의 기자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특히 좀 전에 있었던 작곡가와의 대담에선 작정하고 취재를 나온 기자들이 있었다.

중앙음악학교 10학년 피아노과 학생들 사이의 관계성에 집중한다면 기사거리는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었다.

작정하고 악의적인 루머를 담은 기사가 나오진 않을지 걱정되긴 했다.

아나스타샤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레이도 사과했잖아. 에르네스트는 논리정연하게 해명했고 거기엔 빈틈이 없었어. 기자들 입장에선 입맛 다실 만한 자극적인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대로 심사를 거쳐서 뽑힌 사람들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콩쿠르 측에서도 좋을 것 없으니 망상을 기사로 쓰진 못하게 할 거야. 아마도.”

“아마도 말이죠.”

“우린 밖의 소식을 알 수 없으니까.”

에르네스트가 나나 아나스타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없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이해했을 것이다.

러시아도 아니고 먼 벨기에에서 다국적 심사 위원들을 두고 어린 우리가 장난질을 어떻게 치겠는가? 심사 위원 중에 우리와 관계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상한 억지 주장을 펼칠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소리가 나오면 정말 반박하기도 힘들다.

내가 에르네스트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들에 대응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내게 문제 될 것이 없다면 할 일이나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돌 것을 앞서 걱정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필요하다면 대응하겠지만, 기본적으론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명예롭고 공정하게 이 상황에 임할 뿐이다.

“전 떳떳해요. 신경 쓰지 않을래요.”

“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에르네스트도 그런 계산이 섰으니까 당당히 지원한 거겠지만…… 무모하고 오만했던 건 사실이지.”

에르네스트가 여러 위험을 감수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우리까지 전부 끌어들여서.

만약 계획과 준비에 차질이 생겨서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 하려 했는지 궁금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애초에 실패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무엇이든 계획하면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끝없는 자신감과 현실적인 능력. 그것이 바로 에르네스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증명 그 자체였으니까.

오만이란 단어까지 담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불평하던 아나스타샤도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웃었다.

“가끔은 그 애가 부러워.”

“……예?”

“그냥 해 본 말이야.”

당황해서 되묻긴 했지만 나 역시 종종 에르네스트에게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미래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도 나와 같은 맥락으로 그런 부러움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비슷하게 불안정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여러 면에서 아나스타샤와 난 완전히 다르면서도 참 많은 부분이 닮았다.

난 이 콩쿠르를 빌어 아나스타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아마 그녀도 그렇겠지. 다만 아직까지 우린 쌍둥이 행성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대화라기보다는 끝말잇기와 비슷한 잡담을 조금 나누는 사이, 웨이터가 다시 와선 내 앞에 커피를 내어 주었다.

{카페라테 나왔습니다.}

내 앞에만 잔 두 개가 놓였다. 난 남아 있던 루이보스 티를 다 마셔 버리곤 커피에 손을 뻗었다.

“정말 마실 거야?”

가만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말로 날 멈춰 세웠다. 농담으로 한 말을 내가 진담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그녀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안다. 그리고 지금 나도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아주 진지한 장난을.

“저도 무모하고 오만하게 한번 도전해 보죠.”

“조금만 마셔.”

에르네스트만 고집이 세고 막 나갈 줄 아는 건 아니다. 나 역시 한번 한다고 정했으면 실행에 옮기고 마는 사람이다.

카페인을 입에 대지 않은 지 워낙 오래되어서 무섭긴 했다.

아무리 조금만 마셔 본다고 하더라도 난 몸으로 생체 실험 비슷한 걸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몸이 굉장히 안 좋았을 때도 난 그럭저럭 버텨 냈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때보다 나으면 나았지 나쁠 리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쯤은 확인했어야 할 일이다. 그게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를 기묘한 충동이 날 움직였다. 난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했다.

한 모금 마셔 보자 달콤한 향이 입가에 감돈다. 카페라테는 커피라기엔 너무 달콤했다.

오랜만에 커피를 마셔 봐서 맛 구분을 잘 못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난 한 모금 더 마셨다.

“음…… 너 괜찮니?”

“멀쩡한데요?”

“진짜로?”

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자 아나스타샤가 흥미 반 걱정 반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난 커피를 마시는 순간부터 몸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눈앞의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 크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생각보다 증상이 그리 심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정도에 그친다고 할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쉽게 못 믿겠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럼 문제라도 하나 내 볼까? 맞혀 볼래?”

“내 주세요.”

“45332 곱하기 29398을 암산해 봐.”

주르륵 말한 숫자가 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난 황당해하며 말했다.

“평소에도 그런 건 암산으로 못 풀어요.”

“됐어, 그럼.”

“……무슨 장난인가요?”

카페인은 기본적으로 각성제이긴 하다. 하지만 과민증이 있다고 해서 카페인을 먹으면 엄청난 두뇌 각성 효과 같은 게 발현되는 일은 없다.

내 반응을 본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왜 곱하기 문제를 냈는지 설명했다.

“할 수 없는 건데도 오기로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을 정도의 사리 분별 능력은 있네.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사리 분별이라뇨…….”

취객을 대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난 기분이 조금 좋은 것 말고는 정말 괜찮았다.

아나스타샤가 말하는 것처럼 억지로 헛수고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전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하니까.”

“악보 살펴보려고?”

“예.”

“같이 가 줄까?”

“아뇨, 혼자 할래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누구와 곡을 같이 보고 연구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난 절대적으로 혼자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면밀하게 파악하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렇게 카페에서 아나스타샤와 헤어진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각성 효과가 있긴 한 것 같네.’

방음 처리가 된 조용한 방에 들어오자 심장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난 예민해진 신경으로 모든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보면대엔 에르네스트의 협주곡 악보가 놓여 있었다.

‘만약 내가 무언가 찾아낸다면…….’

맨정신일 때도 이 악보를 몇 번 읽어 봤었지만 난 이것이 에르네스트가 썼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당연히 내게만 유리할 만한 맥락도 없었고.

그러나 지금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선 무언가 보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걸 찾아낼 수 있다면 난 고민하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가서 그만두겠다고 할 각오를 다시 다졌다.

정말 어렵게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뭇거릴 이유는 안 된다.

“만약 내가 찾아낸다면 네가 진 거야, 에르네스트.”

아무도 듣지 않는데 중얼거리며 도전을 선언한 나는 악보의 첫 장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1시간이 흘렀다.

‘전혀 모르겠네…….’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력을 모두 쏟아부어서 악보를 분석했는데도 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이전에 내게 헌정했던 곡이나 보여 주었던 곡의 프레이즈 등이 반복되어 나타나진 않나 싶어 여러모로 뜯어보고 거꾸로 보기까지 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작곡 능력은 고전의 탄탄함에 기반했고, 거기에 낭만적인 색채와 신비한 표현력도 다채롭게 다루고 있었다.

분석하면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원숙해진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몇몇 구간을 피아노로 옮겨 본 나는 결국 항복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곡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편집증적으로 달라붙어 따져 볼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하고 썼다는 건 확실했다.

그는 내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 트집도 잡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누가 완벽주의자 아니랄까 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세상에 에르네스트밖에 없겠지. 그 어떤 특혜를 받은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받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기묘한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확인을 마치고 일단 그만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리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심장은 더 거세게 뛰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카페인은 좀처럼 약해지지 않았다.

방 안을 빙글빙글 돌던 나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우뚝 멈춰 섰다.

{타티아나. 안에 있어?}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레한드로였다. 난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마치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조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연구요.}

{……지금?}

{예. 영 아닌 것 같으면 결정을 해야 해서요.}

알레한드로는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캐묻지 않고 날 찾아온 본론을 이야기했다.

{오늘 저녁은 공동 주방에서 다 같이 먹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레이가 요리를 해 주겠대. 어떻게 할래?}

파이널리스트들의 친목 교류 자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생각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난 빠질 생각이 없었다.

{아, 저녁 시간이네요…….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럼 7시 30분까지 본관 1층의 공동 주방으로 와.}

{알겠어요. 음…… 혹시 도와드릴 거라도?}

{딱히 없긴 한데……. 아, 그럼 다른 여자애들한텐 네가 권유 좀 해 줘.}

알레한드로는 그나마 친분이 있는 내게 먼저 들른 모양이었다. 난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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