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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41화 (1,241/1,277)

##  1241화

파이널리스트들끼리 서로 연락할 수단이 없는 뮤직 샤펠에서는 같이 공동 주방에서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불러 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각각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직원들을 통해 전달할 수도 있긴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도 아닌 평범한 식사 권유를 그렇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권유를 받으면 기분이 조금 안 좋을 것 같았다.

때문에 알레한드로는 직접 다른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다행히 마지막에 타티아나가 다른 여자들에게도 권유해 주겠다고 해 줘서 조금 편했다.

‘내가 하는 것보단 잘 들어주겠지.’

솔직히 말해 같이 저녁 먹자고 여자 연주자들의 방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건 알레한드로에게도 조금 부담되는 일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도 많고 공동 주방에서 먹는 것이긴 했지만…… 연락도 안 되는 사이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 생각이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아무래도 대하기가 편했다.

알레한드로는 그 점이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도 조금 신기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론 타티아나야말로 굉장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재벌의 딸이고 품행이 바르고 태도도 무척 꼿꼿한 그녀는 사실 알레한드로와 정반대에 있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그녀가 정말 음악에 반쯤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었고, 그 차가운 본능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알레한드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에 곡 연구를 했다니…….’

의무곡 작곡가 에르네스트와 만난 건 여러모로 알레한드로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더욱 그 충격이 심했는지 대담 내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멀찌감치에서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을 땐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에게 권유하는 일이 굉장히 큰 난관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타티아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말하는 그녀는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엉? 아무것도 아니야.}

혼자 생각하다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앤서니 마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알레한드로는 대충 얼버무리며 넘겼다. 이런 걸 그에게 설명해 줄 순 없었다.

어쨌든 타티아나의 상태가 좋아 보이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구를 해 보고 결정을 해야 했다는 그 말에선 여전히 서늘한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외모와 부드러운 말씨와 다르게 상당히 강단 있는 성격이었다.

알레한드로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타티아나는 훨씬 더 잘 해낼 것이 분명했다.

일단 그녀에 대한 걱정을 접어 둔 알레한드로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앤서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온대?}

{타츠야는 온다고 했고, 루카는 저녁 안 먹는대.}

파이널리스트들을 찾아 권유하는 일은 앤서니도 도와주었다. 미국인인 그는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친근하게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루카 아르젠토에게 거절당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원래 그랬어.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말랐나?}

{아무튼 식사도 식사지만 다들 같이 친목 좀 다지자고 부른 건데 붙임성 없네.}

{귀찮나 보지, 뭐.}

승낙도 거절도 본인 자유라는 듯 앤서니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실 오지 않는 건 루카만이 아니었다.

렌스키도 저녁에 혼자 쉬겠다며 불참을 선언했고, 지금 이 주방엔 알레한드로와 앤서니 그리고 레이 셋밖에 없었다.

앤서니는 이러다 교류회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여자애들은?}

{타티아나가 데려오기로 했는데, 글쎄.}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자 앤서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도 안 오는 거 아니야?}

{그럼 이제 더 재미있어지는 거지.}

{뭐가?}

{범인 찾기에 들어갈 테니까.}

과연 남자들 중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들었길래 기피당한 것인지 색출의 과정이 있어야 했다.

앤서니는 절대 자기 탓은 아닐 것이라며 딱 잘라 말했다. 일단 보기엔 멀쩡하니까 아마 외모적인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앤서니도 성격이 굉장히 독특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앤서니는 당신도 똑같지 않냐며 받아쳤지만 알레한드로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아주 불공평한 구도로 앤서니는 일방적인 공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 너희들 거기 놀고만 있지 말고 여기 와서 불 좀 봐.}

잔뜩 떠들고 있는데 웍을 들고 있던 레이가 버럭 일갈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내 레이는 요리 때문에 바빴다.

요리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일단 지금은 레이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할 상황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슬그머니 그 옆으로 갔다.

{저희 나부랭이의 도움도 필요하십니까? 셰프.}

{사실 필요 없는데 그냥 노는 꼴은 보기 싫어서.}

{진작 말하지. 뭔가 하는 척은 내 전문인데.}

앤서니가 웃기는 소리를 하면서 팔을 걷어붙였다. 레이는 짜증이 담긴 시선으로 앤서니를 보더니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그 손놀림만 봐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알레한드로는 중국인들도 여럿 만나 봤지만 그중엔 요리를 아예 못 하고 전부 사 먹는 사람들도 많았었는데, 레이는 그가 만나 본 중국인 중 제일 요리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순수한 감탄을 담아 알레한드로가 칭찬했다.

{그나저나 너 정말 요리 잘한다.}

{기본만 할 줄 알아.}

{나도 해 봐도 돼?}

{아서라. 초보들은 다쳐.}

레이는 요리도 잘하고 성격도 괜찮은데 은근히 오해를 사기 쉬운 타입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슬슬 그를 알 것 같아서 그냥 웃으며 주방 주변의 쓰레기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속속 도착했다. 일본의 시라이시 타츠야와 프랑스의 루이 디아라였다.

{일찍 왔네, 다들.}

{레이가 요리한다고 들었는데…… 본격적이네?}

모두 연습하다가, 혹은 자다가 왔는지 편한 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한눈에 봐도 지금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정말 미안한데 난 요리를 전혀 못 해.}

{나도. 예전에 손가락 다친 적이 있어서.}

{술 같은 거라도 사 올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전부 금지더라고.}

결국 요리는 전부 레이가 해야 할 처지였다. 레이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주방에 모인 인원은 5명이 되었다. 루이는 눈짓으로 사람을 헤아리더니 물었다.

{근데 우리만 있는 거야?}

{아니, 아마 곧…….}

어떻게 될지 몰라서 다시 잘 애매하게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저희가 늦었죠? 죄송해요.}

{어…….}

타티아나가 주방으로 들어서며 사과했다. 그쪽을 돌아본 알레한드로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마치 이브닝 파티에라도 온 사람처럼 차려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뒤로 따라 들어온 아나스타샤와 레베카, 이연주, 임세연 역시 평범하지 않은 의상이었다.

방에서 뒹굴다가 그냥 나온 것 같은 상태였던 남자들은 여기 드레스 코드도 있었냐는 듯 당혹스러워했다.

이 상황을 읽은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 의상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분위기 좀 내 보려고 이렇게 입은 거니까.}

{힘 너무 준 거 아니야?}

{글쎄요. 별로? 모처럼 타티아나가 제안한 거기도 하고.}

정말인가 싶어 타티아나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알레한드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루카와 렌스키를 제외하고 모일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공동 주방은 상당히 커서 10명이 들어와 있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첫 요리를 완성한 레이는 약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갑자기 포멀한 의상을 입고 온 여자들 때문에 분위기가 급변한 것처럼 느낀 까닭이었다.

{단단몐担担面인데 괜찮을까?}

{그럼요.}

{지금 나는 이 맛있는 냄새가 그거야?}

모두들 앞다투어 말했고 그제야 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을 테이블에 옮기거나 식기를 세팅하는 일 등은 다른 사람들이 도왔다.

모두 도와서 움직이자 각자 테이블 앞에 음식이 금방 차려졌다.

앤서니가 앞서 멘트를 던졌다.

{자, 우선 이렇게 요리를 준비해 준 레이에게 박수.}

{정말 맛있어 보여.}

{이런 건 처음인데?}

박수 세례를 받으며 레이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으로 이어서 알레한드로도 한마디 얹었다.

{이미 이전에 인사도 모두 했지만 서로를 잘 안다고 할 순 없겠지. 그러니 이 자리를 빌어 서로 같은 음식을 먹고 조금씩 더 친해져 보도록 하자고.}

말을 마친 뒤 알레한드로는 앞장서서 젓가락을 집었다.

레이가 만든 단단몐은 살짝 맵긴 했지만 그것이 입맛을 더 돋우며 맛있었다.

많은 미식을 접해 본 알레한드로가 느끼기에도 레이의 솜씨는 상당히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음식을 맛보고는 레이를 칭찬했다. 타티아나도 웃으며 이야기했다.

{전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편인데도 맛있네요. 감사해요.}

{뭘…… 별거 아니야.}

{저도 요리를 조금 할 줄 아는데, 중식에도 관심이 가네요.}

{요리를 한다고? 네가?}

{예…… 그런데요?}

모두가 깜짝 놀라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요리 취미가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하는 건 어쩐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면 거기에 부응하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더니 면을 든 채로 말했다.

{그럼 저도 한 메뉴 만들어 볼까요?}

{정말로?}

{기대되는데?}

분위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레이도 혼자서 모든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묘하게 적극적인 타티아나는 그 후로도 잘 웃고 자주 말했다.

알레한드로는 그녀를 조금 지켜보았지만 결국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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