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2화
이 저녁 식사 모임을 주최한 건 레이라고 들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난 그게 그의 나름대로의 사과의 표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갚겠다고는 했지만 나 개인에게만 하면 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아예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이다.
난 좋은 마음으로 나선 사람에겐 똑같이 좋은 마음으로 대하려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불러 모으고 드레스 코드까지 맞춰 성의를 갖추기로 한 것이다.
이곳에 오지 않은 렌스키와 루카 두 사람은 좀 아쉽지만…… 앞으로 시간은 있으니 차차 알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레이가 요리 잘하는 건 인정할게.}
{너무 잘 먹었어.}
공동 주방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선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있긴 해도 대부분 빨리 먹고 각자 돌아가 연습을 하거나 쉬는 일이 많은데, 지금은 면 요리를 다 먹고 나서도 누구 하나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다들 기대된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약속대로 요리를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아.’
아직 카페인의 영향이 남아 있는지 기분이 약간 고조되어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때문에 난 앞치마를 착용하기 전에 감각에 문제가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혹시나 칼을 쥐고 불을 다루다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스스로를 점검한 나는 이내 앞치마를 둘러 입었다. 파티용 원피스를 입고 요리를 하는 건 처음이지만 그리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곳에서 여러 사람에게 요리를 해 준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앞섰다. 마치 무대에 섰을 때와 비슷한 고양감이었다.
{뭐 도와줄 건 없어?}
{음…… 괜찮아요.}
{필요한 건? 내가 말해서 가져올게.}
{조금 전에 냉장고를 확인했는데 필요한 건 다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주방에서 요리할 준비를 시작하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다가와서 도와주려 했다.
손이 많이 필요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는 아니라서 괜찮다고 했으나 그래도 혹 필요해질지도 모른다며 루이와 아나스타샤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레이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너희 너무한 거 아니냐?}
떠올려 보니 아까 레이가 요리할 땐 옆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앤서니와 알레한드로는 레이의 말을 듣고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까 도와주려 했는데 초짜는 다친다며.}
{넌 요리 전문가잖아.}
{나도 너희랑 똑같이 피아노 전문이거든?}
레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항변했다.
테이블에선 농담이 오가다 웃음소리와 대화가 이어졌다. 난 그 대화에 끼어들진 못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재료 손질에 집중했다.
요리 자체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난 기억 속 레시피를 떠올리며 능숙하게 움직였다.
와인도 없고 사워크림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대체해서 해낼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비프 스트로가노프бефстроганов입니다.}
오븐에서 막 꺼낸 따끈따끈한 냄비와 파스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양송이버섯과 양파 그리고 소고기를 육수에 부드럽게 끓인 것을 감자튀김이나 파스타 등과 같이 먹는 요리다.
이 간단하고도 고급스러운 요리는 과거 러시아 제국의 백작 가문에서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선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와우.}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걸?}
냄새만 맡아 보았을 뿐인데도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먹어 볼까.}
두근거리는 평가의 시간이 찾아왔다.
날 제외한 9명이 요리를 맛보는 것을 바라보며 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중간에 간을 보긴 했지만 혹시 맛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든다.
가장 먼저 평을 낸 것은 알레한드로였다.
{사 먹는 것보다 낫네.}
{피아노만 잘 치는 줄 알았는데 요리도 이렇게 잘하면 어떡해?}
{요리 자주 하는 편이야? 그냥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닌데?}
그 뒤로도 다행히 호평이 잇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후한 평가들이었다.
난 그제야 안도하며 웃을 수 있었다.
{제 취미예요. 맛있게 먹어 주시는 걸 보는 게 좋아서요.}
{……존경스럽네.}
{아하하, 여러분도 다들 비슷하실 거예요.}
{뭐가? 난 내 입에 넣기 바쁜데.}
레이를 제외한 모두들 요리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연주자라면 손을 중요시해야 하니까 그 점은 당연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난 요리를 하면서도 정말 많은 것을 배운 바 있었다.
{청중분들이 즐겁게 연주를 들어 주시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같은 건가?}
{전 같다고 생각해요.}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감각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은 굉장히 보람차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그런 기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테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말에 알레한드로를 비롯한 몇몇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 복잡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깊게 생각 말고 식사를 드셔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손짓하자 그들도 다시 식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 또한 맛을 음미하더니 날 칭찬했다.
{진짜 요리인으로서의 자격이 있네, 베르체노바 양.}
아까는 피아노 전문가가 우선이라며 펄쩍 뛰긴 했지만, 레이는 요리를 한다는 것에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중하게 사과할 때와는 다르게 날 조금 더 편하고 친근하게 여긴다는 게 물씬 느껴지는 어투였다. 난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아까 해 주신 면 요리도 정말 맛있었어요. 저에게 다른 중식도 가르쳐 주시겠어요?}
{크흠, 알았어. 다음에 또 이런 자리 있으면…….}
레이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가 상당히 솔직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아마 조만간 또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내게 요리를 가르쳐 줄 것 같았다.
기쁜 마음으로 웃자 옆에서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던 앤서니가 가만히 날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처음 베르체노바 양을 봤을 땐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었는데. 역시 사람은 첫인상만 봐선 모르는 법이네.}
{제 첫 이미지요? 어땠는데요?}
{어? 음…….}
내가 그의 말꼬리를 덥석 물자 앤서니는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씀해 주세요. 궁금하네요.}
{뭐…… 좋았었지.}
{음? 방금 마셜 씨가 하신 말씀의 맥락은 제 첫인상을 부정적으로 보셨다는 쪽 아닌가요? 참고로 전 마셜 씨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키도 크고 실력도 좋으시고…….}
{바로 그거! 그런 말 쉽게 하는 사람이었어? 아니잖아?}
{못 할 건 뭐예요?}
난 히죽히죽 웃으며 장난을 쳤지만 사실 앤서니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나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무척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이런 내가 그리 싫은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당히 우울하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의 계획을 확인하게 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실실 웃을 수 있는 게 나았다.
적어도 파이널리스트로서 당당하게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여전히 카페인은 내게 영향을 너무 크게 미치니 앞으로도 커피는 조심해야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다행이었다.
레이와 내 요리로 저녁 식사가 마무리되었고, 차는 세연과 이연주가 끓여 주었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서로가 모두 다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걸 슬슬 파악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고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는 정도도 깊어져 갔다.
이어진 티타임도 친목을 다지는 데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친목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구간은 이게 맞겠지?}
{지금 우리한테 물어본 거야?}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피아노 연주자들이 모인 곳이니 당연히 음악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고, 지금 각자의 음악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음악은 바로 에르네스트의 피아노 협주곡뿐이었다.
그래서 돌고 돌던 음악 이야기는 에르네스트의 곡으로 수렴되었고, 거기에서 서로의 해석 차이와 의견의 충돌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 박자 아니었어?}
{이렇게 해야지.}
레베카가 리듬감 있게 테이블을 손으로 쳤다.
실력 있는 연주자는 리듬만 가지고도 충분히 음악을 만들어 낸다. 레베카는 자신의 해석을 상당히 자신 있게 내세웠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해석이 튀어나왔다.
{그게 아니라 이거라니까?}
{뭔 소리야. 너 박치야?}
{메트로놈 켜고 해 봐. 내가 맞지. 박치는 너인 것 같은데?}
처음엔 조심스럽게 서로의 생각을 묻는 것 같던 대화는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이젠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을 것 같다.
어차피 각자의 해석으로 임해야 하는 콩쿠르인데 이런 곳에서 정제되지 않은 음악으로 교류해 봤자 서로 더 헷갈리기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난 어쩐지 저 틈에 끼고 싶었다.
{음, 전 이렇게 했었어요.}
슬쩍 내 쪽을 보는 눈빛이 있길래 이때다 싶어서 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 세게 한 건 아니고 그냥 적당히 생각나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끌시끌하던 소리들이 갑자기 뚝 멈췄다.
테이블을 치는 소리도, 자기 해석을 앞세우던 목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마치 레이저와도 같은 시선들만이 내 쪽으로 향했다.
{……왜 그러시나요?}
{다시 해 줘.}
모두 뚫어져라 날 보고 있어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4초 정도 테이블을 타악기처럼 썼을 뿐이다.
그런데 내 짧은 리듬 시연이 있자마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저거잖아.}
{저거네.}
{우린 다들 뭐 하고 있었던 거냐?}
‘내 리듬이 그렇게 설득력 있었나……?’
그냥 악보에서 본 대로 쳤을 뿐인데도 모두의 반응을 보니 이렇게 해석하는 게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각국에서 새 시대의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 번에 의견을 굽히는 모습은 조금 생경했다.
{베르체노바 양. 혹시 1악장 전개부는…….}
{그만!!}
또 누군가 내 의견을 물으려는 찰나, 세연이 빽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모두를 혼내듯 말했다.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떡해요? 각자 연구해야지!}
똑 부러지는 정론에 모두 반박하지 못했다.
의무곡으로 주어진 협주곡은 모두 연주하게 되어 있어서 의견 교류 정도는 괜찮지만 연구까지 깊게 공유하는 건 콩쿠르의 기본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우린 경쟁자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곡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해도 괜찮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레베카가 내게 질문했다.
{그럼 에르네스트가 어떤 사람인지나 알려 줘. 같은 학교니까 솔직히 그 정도는…….}
{그것도 실례야! 관계없다고 했었잖아?}
이번에도 세연이 나서서 내가 곤란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난 그녀를 살짝 말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씀해 드릴게요.}
{어? 진짜로?}
그렇게 대답하니 막상 물어본 레베카가 조금 당황해했다. 내가 너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