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3화
오래전 있었던 작곡가들의 곡을 깊게 연구하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은 음표들만 보고 곡을 분석하지 않는다.
여러 정보를 담고 있는 곡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시대와 작곡가가 머물렀던 나라나 사건들, 동시대에 교류하던 사람들 등 시공간적 배경지식을 모두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되짚어 보면서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파악하고 넓게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시의 음악이 행해질 수 있었던 흐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런 공부가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음악사 연구는 매우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고, 유명한 작곡가들 같은 경우엔 전문적인 음악 역사학자들이 여럿 붙어 연구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르네스트란 작곡가의 생애 전반을 연구할 수 있는 학자가 되진 못할 터다.
여전히 난 그를 잘 모르겠고 아마 죽을 때까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진 못할 테니까.
다만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의 성격이나 행적을 잠시 증언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부분에서 난 정말 할 말이 많았다.
작곡가 에르네스트에 대해 알고 싶다는 레베카의 제안을 받아들인 난 팔짱을 끼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르네스트는 문제가 많아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악적 교류를 하느라 한창 뜨거웠던 공동 주방의 분위기는 내 한마디에 싸늘하게 식었다.
레베카는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듯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라, 갑자기 비판을 하네?}
{같은 학교이니 어떤 사람인지 알려 달라고 하셨잖아요. 작곡가에 대한 배경에 대한 정보이니 솔직히 말씀드려야죠.}
{그 말이 아니라…….}
레베카가 뭘 듣고 싶은지는 알겠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이니까 적당히 농담도 섞어 가면서 이야기하면 좋겠지.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하지만 무작정 좋게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간 공부했었던 작곡가들의 역사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모차르트는 낭비벽이 심했고, 베토벤은 다혈질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음악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쇠하는 일은 없다.
되레 그런 성격적인 결함들이 다채로운 관점으로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괜한 미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또 내 입에서 나온 정보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테고, 지어낸 칭찬 같은 건 거짓 정보를 심어 주는 것밖에 안 된다.
난 이 사람들의 경쟁자로서 불성실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할게요. 그는 어려서 성공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 어어…….}
{주변을 아예 안 보는 편협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는데, 그는 주변을 다 보고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곤 하죠. 그 강한 확신만큼의 실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주변에서 보면 재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 만해요.}
{어…….}
물론 지금 내가 하는 말도 개인적인 편견이 가득 담긴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정도는 알아봐 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분위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레베카는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고, 다른 사람들도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전해 주는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날 일단 우선시하는 것 같았다.
{베르체노바, 진정하고 잠깐 이것 좀 마시고 할래?}
{인터넷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나? 하하하하.}
레베카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물을 건넸고 레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두 사람 다 내 눈치를 엄청나게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카페인이 작용하자 가뜩이나 엉망인 내 사교력이 사고를 친 모양이다. 아무래도 너무 갑자기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서 일단 레베카가 준 물을 마셨다.
목이 시원해지고 나니까 기분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날 지켜보고 있던 알레한드로는 혀를 내둘렀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 무섭네.}
{진심인데요?}
{아무리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라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제가 지금 에르네스트와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었더라도 똑같이 말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수긍했을 테고요.}
정말 난 지금 만약 에르네스트가 내 앞에 있고 막아서는 직원이 없다면 당장 그를 붙잡고 방금 했던 말보다 훨씬 심한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냐고 물어봐 봤자 그는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난 결국 그를 이해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 지금 없는 에르네스트 대신 알레한드로를 노려보니 그는 자신에게 그러지 말라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수긍할 거란 자신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믿음이 있기 때문이란 거 알아?}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난 에르네스트가 터무니없는 망나니가 아니라 철두철미한 지능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할 비판 같은 것도 그가 이미 충분히 대비하고 있으리란 것도 안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그를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모르겠네요. 전 이제 뭘 믿을 수 있을지…….}
그 에르네스트도 이 상황을 조성해 놓고 자신은 할 일을 다 마쳤으니 그다음은 미지수라고 말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살펴봐도 그의 곡엔 문제가 없었으니 아마 이대로 파이널 무대까지 임하겠지만……
방금 전처럼 작곡가의 의도를 나쁘게 평가하고 있었던 내가 과연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곡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 이런 기분으로 쭉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은 든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하니 앉아 있자 이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사람 싫어해?}
지금 내가 한 이야기만 들어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심경은 조금 더 복잡했다.
{싫어하면 이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아요…….}
{아리송한 대답이네?}
{그게…….}
뭐라 말해야 할지 애매해서 난 우물쭈물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 난 객관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다시 무턱대고 이야기하면 또 무슨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기껏 관계없는 것으로 공식 석상에서 말을 맞춰 놓았는데 여기서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된다.
정말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차라리 그렇게 엎어 버리면…….’
불식간에 든 충동과 이성이 잠시 싸우는 사이, 알레한드로가 빠르게 끼어들어서 말했다.
{같은 학교에 같은 과, 같은 나이니까 부딪힐 일도 많고 엮일 일도 많았겠지.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럴 것 같긴 했는데…….}
대충 이해가 간다는 듯 이연주가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내가 복잡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약간 배려받는 기분을 느끼면서 난 조금 부끄러웠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앤서니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점잖던 베르체노바 양이 이렇게 신랄한 걸 보니 조금 재미있네?}
{재, 재미요?}
{혹시 뭐 개인적으로 실망한 일이라도 있어? 작곡가 에르네스트의 엉망진창인 일화 같은 거 듣고 싶기도 한데. 곡 해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어디까지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리고 계속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앤서니가 흥미로워하는 것 같으니까 적당히 엉망인 이야기 하나쯤 하고 나서 그다음엔 좋은 이야기로 돌려서 균형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좋은 이야기가 더 할 것이 많긴 했다. 에르네스트는 단점이 명확한 만큼 장점 또한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그의 행동에 화가 나더라도 이해하고 마는 건 결정적으로 내가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서 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옆에서 콜라만 마시면서 구경하던 아나스타샤가 이젠 자기 차례라는 듯 끼어들었다.
{저 애는 편입생이고, 들어오자마자 에르네스트의 콧대를 꺾어 놓아서 한풀 죽여 놨거든요. 그래서 진짜로 막 나가던 시절의 그 애를 잘 몰라요.}
{어?}
조금 감정적이었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이젠 자중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해서 사람들의 흥미로운 눈초리에 불이 붙었다.
난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자극적으로 이야기할 건 없지 않나?
{아나스타샤?}
{최근 이야기는 네가 했으니까 예전 이야기는 내가 해 볼게.}
그런데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내가 막 편입해서 그와 대결했던 때가 아니라 그 이전에 초점이 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중앙음악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에르네스트를 봐 온 사람이었다. 정말로 그의 생애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작곡가 에르네스트의 연구자로서 여기서 가장 적합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아나스타샤는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사람들의 기대를 부추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일곱 살 때였나. 그 애랑 듀엣을 하다가 쌍코피 터뜨린 이야기부터 해 보면 어떨까 싶은데.}
{뭐?}
{쌍코피? 싸웠어?}
아나스타샤의 주제 선정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여기저기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잇따랐다.
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나스타샤는 아예 이렇게 된 김에 에르네스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시작을 한 게 나라서 그녀를 탓하기도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싸웠다기보다는 제가 일방적으로 때렸죠.}
{……어릴 땐 여자애들이 세긴 하지.}
{사실 제가 지금도 이길 것 같긴 한데.}
아나스타샤는 농담조로 이야기했으나 그녀의 외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보통 사람 같진 않아서 그런지 모두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사실 말로 때리는 걸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안 되겠죠? 그러니까 옛날에 이겼던 이야기나 풀면서 놀림감으로 삼아야겠네요.}
킥킥 웃으며 제대로 자리를 잡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난 어쩔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나서서 에르네스트의 장점도 이야기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불안해졌다.
‘아나스타샤가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하는데……?’
일곱 살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하여 매년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모두 에르네스트가 어린 치기에 실수한 내용들이었다.
천재이긴 했으나 능력은 아직 덜 성숙했고 자만심이 앞섰던 더 어린 시절의 에르네스트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듯했다.
그 모든 걸 옆에서 봤던 아나스타샤는 정말 그의 생애를 책으로 써도 될 정도로 잘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슬슬 장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에르네스트의 이미지가 회복 불가하게 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 해요?’
지금이라도 책임지고 끼어들어서 장점 토크로 바꿔야 하나 싶지만 언제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상 듣고 있으니 나도 무척 흥미로웠다.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