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7화
렌스키와 루카를 처음 봤을 때 탁구를 치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활동적인 인상이 있었지만, 말끔하게 씻고 온 두 사람은 여느 연주자들과 다를 바 없이 단정했다.
어제 저녁 공동 주방엔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척 시끌벅적했었다.
서로 한두 마디씩만 해도 다 알아듣기 힘들고, 모두와 이야기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에 비해 오늘은 3명뿐이라 상대에게 집중하기 편했다.
‘생각보다 대하기 편해.’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요리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동 주방에 데려오긴 했지만, 약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더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카는 내 주문을 받고는 왜 디카페인 티를 마시느냐고 물었다. 난 조금 고민해 보고는 그에게 사실 그대로 전했다.
{카페인 과민증?}
{예. 심한 편이에요.}
사실 내 약점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카페인에 약하다는 걸 듣고 내가 마실 것에 루카가 해코지를 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약한 부분을 먼저 드러내면 저 두 사람도 솔직하게 따라와 줄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다.
난 렌스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고 싶었고, 약간 독특한 성격으로 보이는 루카가 어떤 반응을 할지도 궁금했다.
루카는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심하다면 얼마나?}
{어제 커피를 마셨더니 자기 직전까지 기분이 좋더라고요.}
{커피 마신 거 맞죠?}
황당하다는 듯 루카가 물었다.
사실 커피가 아니라 탄산음료나 초콜릿에 있는 미량의 카페인에도 영향을 받을 정도로 심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은 건 내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렌스키 쪽을 돌아보니 그는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뭔지 대충 알아. 우리 어머니도 카페인 과민증이 있어서 커피 못 드시거든.}
{아.}
{어, 그…… 그냥 그렇다고.}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받아들이기 좋겠지만…… 렌스키는 뭔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얼버무리더니 연거푸 찻잔만 기울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나도 루카가 끓여 준 차를 홀짝이고 있자니 루카가 물었다.
{아무튼…… 과민증이라면 평소 잘 관리하고 있을 텐데 어젠 왜 커피를 마신 거죠?}
{그게…….}
루카는 자기 마음에 따라 사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인 관점도 또렷한 사람이었다. 그의 질문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어제 그 상황은 아나스타샤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뒤늦게 내가 충동적으로 받아들인, 이성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루카가 간단히 요약해 버렸다.
{작곡가 베샤스트니흐 때문에?}
난 무어라 변명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나름의 이유를 어떻게 떠올리든 간에 본질적인 원인은 루카가 말한 대로였으니까.
결국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되도록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혹여나 오해를 받으면 안 되니까.
{어제저녁에 모이기 전까지 계속 방에서 악보를 읽어 봤어요.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보면 저에게만 전달되는 메시지 같은 것이 보일까 싶어서…….}
{보였습니까?}
{아뇨, 전혀.}
{전 베르체노바 양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리고 작곡가의 진정성도요. 그래서 어제 무의미한 의혹 제기 같은 건 그만두라고 한 겁니다.}
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카는 내 말을 믿는 게 아니라 내 판단을 믿는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가볍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 루카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더니 이어 말했다.
{어쨌든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어지간하면 기권 같은 건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
혹시나 방금 이야기하던 중에 내가 기권 같은 단어를 입에 담았었나 돌이켜 보았지만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
한마디도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에겐 당당하게 말했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만두겠다고. 그건 분명한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난 생각을 숨기는 것을 잘 못 하는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만약 기권하면 그때야말로 의혹이 불거질 겁니다. 파이널리스트의 기권이란 특종을 잡기 위해 모든 카메라가 베르체노바 양에게 향할 테고, 그땐 어떤 해명을 해도 별 의미가 없겠죠. 굉장히 곤란해질 겁니다.}
{……음.}
{어떤 의미론 굉장히 유명해지겠군요.}
콩쿠르에서 그만두는 참가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퀸 엘리자베스쯤 되는 대형 콩쿠르에선 그 여파가 굉장히 크게 미친다.
만약 내가 그만둔다면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는 조금만 상상해 봐도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 즉시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겠지.
나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는 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작곡가로서의 목숨 줄을 내게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새겨들을게요.}
{무슨 말인지 알았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할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미 루카가 말한 것 정도는 나도 혼자서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입 다물고 있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있으면 져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옆엔 내가 있을 테고.
나름의 각오를 되새기고 있는데, 루카가 가볍게 덧붙였다.
{뭐…… 깊게 고민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생각도 그래. 난 네가 피아니스트로서 명예를 지키는 것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고 있어.}
두 사람 다 은근히 날 변호하는 듯 말하고 있어서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 원래 감정을 감추는 걸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최근 들어 점점 더 다른 사람들에게 표정을 잘 읽히게 되니 약간 훈련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 두 사람에게 부담 같은 걸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주어야 할 건 모두와 나눴던 정보였다.
{아, 그래서 말인데…… 사실 알려 드려야 할 것들이 있어요.}
{뭔데?}
{어제 다른 사람들과는 모두 공유했던 정보예요. 에르네스트에 관한 정보요.}
에르네스트가 아무리 곡의 공정성에 신경을 썼다고 한들 그의 인품과 성향 등을 알고 있는 나와 아나스타샤는 곡 해석에 있어 조금이라도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와 정보를 될 수 있는 한 나누려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없었던 루카와 렌스키에게도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었다.
아마 알레한드로는 불러도 오지 않은 두 사람을 굳이 신경 써 줄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하겠지만…… 내 입장에선 괜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제가 옆에서 보고 겪은 주관적인 정보이지만…… 알려 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정보 공유도 공정한 게 좋고요.}
{그래 주면 고맙지. 난 그 작곡가에 대해 잘 모르거든.}
의외로 선선히 내 호의를 받아들인 루카는 잠시 에르네스트에 대해 떠올려 보는 듯 천천히 찻잔을 기울이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거라곤 원래 피아니스트인데 부상을 입고 작곡으로 전향한 지 1년도 안 되었다는 것 정도.}
{……맞아요.}
이미 상당히 널리 퍼진 이야기여서 그런지 역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자라면 누구나 그런 사고 이야기는 섬뜩하게 여기기에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 편인데, 루카는 그저 있는 진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건조하게 이야기했다.
무엇이든 내가 쉽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 시작할까.’
어제는 에르네스트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부터 감정적으로 모두 쏟아 내며 시작했었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카페인까지 작용한 탓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아나스타샤가 도와준 덕분에 잘 이야기되긴 했지만…… 난 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작곡가를 평한다는 목적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점을 그렇게 신랄하게 늘어놓는 건 친구로서 못 할 짓이다.
그래서 한참 고민하던 나는 일단 오늘은 칭찬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하루가 지나서 그런지 내 충격도 조금 정리된 상태였고, 에르네스트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만큼 에르네스트는 의지력도 강하고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에요.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 제의도 한참 전에 받았고…… 얼마 전엔 파리 음악원에서도 와 달라고 하기도 했고요.}
에르네스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음악원에서 스카우트를 받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대단함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긴 했지만…… 그런 걸로는 그의 능력을 10%도 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에만 있지 않았다. 난 그것을 조금이나마 더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자신이 있어야겠다고 정한 음악 학교에서 공부해서 지금 이 정도 위치를 다시 얻어 낸 건…… 솔직히 존경스러워요.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진심으로 난 그렇게 생각했다. 피아노를 잃고도 음악을 사랑하는 의지를 잃지 않고 일어설 수 있다는 건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내 친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칭찬도 한 번 시작하고 나니 말하는 것이 편해졌다. 그 후로도 난 계속해서 루카와 렌스키에게 에르네스트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대로 1시간은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적당히 호응하면서 듣던 루카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예.}
{남자 친구 자랑하는 것 같이 들리는 건 나뿐인가?}
{예?}
놀란 내가 뭐라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자 그는 짓궂게 웃었다.
날 놀려 보려는 의도가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정말 그렇게 들렸던 걸까? 혹시 어제도?
난 부정을 해야 할지 변명을 해야 할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