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8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니 루카가 피식 웃었다. 그가 별 악의 없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했던 말들을 돌이켜 보았다. 어제와 달리 난 아무 비판 없이 에르네스트에 대한 칭찬만 잔뜩 했다.
그러니 내 말을 작곡가에 대한 설명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흥미를 가지고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안일함을 반성하며 난 수습에 나섰다.
내가 해야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사실 관계가 어떻든 간에 여기서 내가 에르네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게 허사가 될 테니까.
에르네스트가 공식적으로 이미 관계가 없다고 말해 버리기도 했으니 여기서 난 그 공식 입장에 따라 주는 게 맞다.
‘공식 입장……이지?’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 웃겼다. 에르네스트와 같이 상의해서 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미 상황이 그렇게 정해져 버렸고, 난 그의 입장이나 의도를 이해하지만…… 모든 걸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루카의 농담에 농담으로 맞대응해 볼까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알려 준 것 말고도 에르네스트에 대한 정보를 더 쥐고 있는 것처럼 군다면 나도 루카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쉽다.
‘참아야지…….’
그러나 지금은 루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렌스키도 있는 데다가 문 쪽엔 콩쿠르 측 직원 2명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어제 카페인의 영향을 받는 상태에서도 선을 넘지 않고 잘 조절했으니 맨정신인 지금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가 실수할 이유는 없었다.
상황을 다시 인지한 나는 침착하게 루카를 바라보았다. 예상 못 한 질문에 놀랐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왜 맨날 나만 참는 건지 모르겠다. 불쑥 화가 나기도 했지만 별 도리 없이 난 치솟는 감정을 이성으로 눌렀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루카는 물론이고 렌스키마저 움찔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따지는 것마저 너무 심하게 하면 과민 반응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건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난 수양을 하는 기분으로 차분히 이어 말했다.
{순수하게 정보 공유 목적에서 알려 드리려는 건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제가 아예 작곡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었으면 좋았을까요? }
나도 에르네스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알아서들 생각하게 두고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다만 내 성격상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게 불가능했을 뿐이다.
이러한 입장을 전하자 루카는 뜨끔한 표정으로 날 달래려는 듯 말했다.
{알아요. 농담한 거예요, 베르체노바 양.}
{불필요한 농담이네요……. 이미 그는 저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혔잖아요. 제가 그런 말을 듣고도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자랑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 전달이란 걸…….}
{뭔가 오해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하고픈 말을 다 하고 마무리 지으려는데 루카가 내 말을 끊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전 애인 관계냐고 물어본 적 없어요.}
{예?}
{같은 과 남자 친구 자랑이냐고 한 거죠.}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루카도 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을 순 있지만, 그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난 싸늘하게 대꾸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저 바보 아니에요.}
{음…… 미안합니다. 식사도 정보도 호의인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걸 받고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분위기를 파악한 루카는 빠르게 사과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루카는 장난기가 있긴 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날 가지고 놀려고 든 것이 아니라 아마 내가 에르네스트의 칭찬만 하고 있으니 굳이 짚어 주어서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잠시 멈춰 세운 것이리라.
침착함을 되찾은 내가 한숨을 내쉬자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던 렌스키가 한마디 끼워 넣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타티아나.}
{……그게 더 얄미워요.}
{아니, 왜?}
렌스키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난 코웃음을 치고 그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일단 여기 두 사람에게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 줄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선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하게 흘러가기만 할 것 같았다.
묘한 침묵이 감돌자 이 상황을 만든 루카가 책임지고 침묵을 깼다.
{어쨌든 저희도 나름대로 의무곡에 대해 연구를 꽤 해 봤었는데…… 베르체노바 양이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부분적으로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군요.}
{3악장 말이지?}
렌스키가 얼른 호응했고 두 사람은 이내 에르네스트의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난 거기에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에르네스트의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내 마음이 충족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인정받는 걸 보니 기뻤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완벽하게 갈라선 상황을 조성하고 나와 완전히 관계없는 음악을 써 냈다는 건…… 납득할 수 있으면서도 기분이 착 가라앉게 만드는 일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한 기묘한 감정의 균형 위에서 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
루카와 렌스키 두 사람과 차를 마시고 공동 주방을 나오니 오전 9시경이었다. 슬슬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서 아침 연습을 하거나 돌아다닐 시간이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 요리도 맛있었고.}
{별말씀을.}
렌스키가 정중하게 감사를 표해 와서 나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와 오늘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인상은 조금 기이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막상 마주해 보니 생각 이상으로 속이 깊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복도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던 그는 우릴 바라보더니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음, 모처럼인데…… 내가 이런 말은 좀처럼 하지 않지만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앞으로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호칭 같은 건 멋대로 부를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 베르체노바 양이라고 깍듯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동의를 받는 것만 봐도 그가 제대로 된 사람임은 분명했다.
약간 새삼스럽다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친구가 하나 늘어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물론이죠, 루카.}
{제발 그래 줘. 비소츠키 씨라고 불리는 거 되게 어색했었어.}
렌스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답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 사람들은 성으로 불리는 일이 없기에 해외에서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이자 루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타티아나, 렌스키.}
깔끔하게 인사를 마친 루카는 이만 방으로 가 보겠다며 계단을 올라갔다. 나와 렌스키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렌스키는 계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편하게 부르겠다면서 말투는 여전하네.}
{그건 잘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보니 너도 그렇지…….}
나처럼 친구에게도 경어를 쓰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상당히 특이하게 보인다는 것도 알지만…… 난 내 기준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루카도 자기 기준이 있을 것 같지만 그걸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적당한 거리를 가지고도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렌스키는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럼 방으로 가 볼게.}
{주무시려고요?}
{자긴 뭘 자. 해가 이렇게 떠 있는데. 연습해야지.}
{그런데 하품은 왜 하셔요?}
{……탁구 탓이야.}
난 그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낮잠을 잘 것이라고 내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더 건드리진 않기로 했다.
그렇게 렌스키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나도 슬슬 방에 가서 연습이나 할까 싶었다. 여기 더 있어 봐야 딱히 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막 본관과 신관을 잇는 연결 복도로 나가려는데, 거기서 난 세연과 딱 마주쳤다.
잡지 같은 걸 읽고 있던 그녀는 날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아,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마치 비둘기처럼 잡지를 파닥이며 달려온 세연은 내 앞에 서자마자 물었다.
{아침밥은?}
{먹었어요.}
{그쪽에서 나오는 걸 보니…… 혼자 먹었던 거야?}
{아뇨. 두 사람이 더 있었죠.}
{두 사람?}
굳이 그런 것까지 다 말해 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숨길 이유도 딱히 없었다.
난 루카와 렌스키를 만나서 공동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해 주었다는 걸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연은 갑자기 화를 냈다.
{아니, 뭐가 예쁘다고 밥을 해 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렇잖아? 어제 안 모였으면 땡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전 저대로 기준이 있어서요.}
세연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삐뚜름하게 날 보더니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그럼 우리 차 마시러 가자.}
{저……}
{응?}
{그, 그래요……}
이미 차라면 마셨지만 두 번 못 마실 건 없었다. 세연과 느긋하게 이야기 하고 싶기도 했기에 난 그녀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