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9화
카페테리아엔 아침 햇살만이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난 세연과 함께 햇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세연은 이곳에서 내가 긴장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연주자들과 이야기할 땐 어쩔 수 없이 사교와 태도 등에 대해 신경 쓰게 되는데, 세연과는 이미 그런 걸 신경 써야 할 관계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공유해 왔다.
그런데 세연은 오늘따라 그녀답지 않게 묘하게 내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슬그머니 더 물어보더니, 사실 내가 차도 이미 끓여 마셨다는 걸 털어놓자 펄쩍 뛰며 말했다.
{차도 마셨다고? 그럼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괜찮아요. 두 잔 마셔도.}
중요한 건 차 같은 게 아니다. 이런 건 어차피 다 계기일 뿐이고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세연과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이야기할 틈도 없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세연은 이곳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만났었지만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는 잔뜩 교류하면서도 막상 세연에겐 시간을 내어 주지 못했었다.
세연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난 그녀를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루카는 이곳을 전 세계 연주자들이 한 지점에 모이는 산 정상이라고 말했다. 세연이 자기 실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난 세연의 친구일 뿐이지 그 이상 무엇도 아니었으니 이런 내 뿌듯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하고 싶은 표현을 제한당한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전엔 막연히 미안하고 불안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그런 흔들림 없이 한결 따뜻한 기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약간 복잡하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잘 정리된 마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어 다행이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세연도 싱긋 웃었다.
{뮤직 샤펠은 어때? 괜찮아?}
마치 선배 같은 말투였다. 실제로 일주일이나 먼저 와 있었으니 선배가 맞기도 했고.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특히 하우징 스튜디오는 저희 집에도 만들어 놓고 싶을 정도예요.}
이곳의 하우징 스튜디오처럼 복층 구조로 만들려면 아마 건물을 새로 짓든지 아니면 별관을 완전히 개조해야겠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저금을 쓰면 공사비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난 그 정도로 진지하게 하우징 스튜디오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연은 내 말을 듣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넌 이미 개인 연습실 가지고 있지 않아?}
{거기서 잘 순 없거든요. 집안사람들이 반대해서요.}
{왜?}
{만약 그런 공간이 있으면 제가 거기서 나오지 않을 것 같나 봐요.}
{풉, 아. 바로 알겠어. 나라도 반대할 것 같네.}
세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허벅지를 쳤다. 내가 피아노 연습에 정말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리더니 눈만 들어 날 보며 말했다.
{그거 알아? 어제 네가 요리해 준 덕분에 너 이미지 엄청 좋아졌다는 거.}
{이미지요?}
{응. 다들 너랑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야.}
그전엔 그럼 어떤 이미지였던 걸까? 그녀가 말하는 다들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많이 친해져서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모양이다.
누구든 나랑 친해지고 싶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특히 세연과 친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세연이야말로 다른 분들과 금방 친해지신 것 같네요.}
{나? 나야 뭐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긴 하지만 난 세연이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이미 들었다.
모두 다 세연이 열심히 한 덕분인 것이다.
그럼에도 세연은 겸허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다들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그보다 난 지금도 내가 여기 있는 게 기적 같아.}
이미 며칠이나 있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세연은 여전히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세연이 이어 말했다.
{내가 예술 중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도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피아노 본격적으로 전공한 지 불과 몇 년 안 되었다고 하면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해.}
{그만큼 세연의 재능이 대단한 거죠. 노력도 열심히 하셨고.}
{나 혼자선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먼 곳을 향해 있던 세연의 시선이 갑자기 정확하게 내 쪽으로 향했다. 가끔 그녀는 이렇게 진지한 눈빛을 하곤 했다.
{나한테 재능이란 게 있다면 그걸 일깨워 준 건 교수님이었을 테고…… 노력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건 바로 너였으니까.}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말을 듣긴 했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도 똑같은 말을 해 준다는 건 그녀가 진심으로 내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난 약간 궁금해졌다. 과연 세연이 내게 고마워하는 것과 내가 세연에게 고마워하는 것, 양쪽을 저울에 매달면 어느 쪽으로 기울까?
그걸 정확하게 재 볼 순 없겠지만 난 내 쪽 고마움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저도 그래요.}
{응?}
{세연이 있어 준 덕분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세연은 내 말을 그냥 예의상 하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진심이에요. 만약 세연이 없었으면 전 작년 가을부터 아마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 허공을 젓던 세연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사건은 세연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테지.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저기…… 타티아나.}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 그렇지?}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 누구도 에르네스트의 부상에 대해선 입에 담기를 꺼려 했었다.
그러나 세연은 어제 에르네스트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난 그녀가 그저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묻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좋아졌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난 근 두 달 사이 그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일단 보기엔…… 그래요.}
{수술은 잘되었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 후로 못 보고 있다가 오늘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더라.}
세연도 에르네스트가 의무곡 작곡가란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웨이터가 와서 우리가 시켰던 차를 내어 주었다. 세연도 나도 똑같은 캐모마일 차였다.
세연은 천천히 차로 입술을 적시더니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물었다.
{너도 그 애가 여기 작곡가로 지원한 거에 대해서 정말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던 거야……?}
{그렇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으니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난 이런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도 조금 신경질이 나곤 했었다.
아무것도 없어야만 한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굳이 그래야만 하는 길을 택한 에르네스트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하지만 충동적인 생각을 몇 번 추스르고 나자 감정도 가라앉았다. 적어도 흥분하지 않고 대응하는 것 정도는 이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내 손 위에 따뜻한 무언가가 덮였다. 세연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세연이 속삭였다.
{섭섭했겠다.}
{예?}
{적어도 너한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네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에르네스트가 잘못한 거야, 이건.}
내 심정을 잘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갑자기 또 감정을 표출하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쏟아 내더라도 세연은 다 받아 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난 굳이 마음을 써 준 세연을 더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제가 어제 화내서 더 그러시는 거죠?}
{괜찮아?}
{괜찮아요. 제가 무엇을 어쩌겠어요? 냉정해져야죠.}
문제가 있다면 그만두겠다느니 하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세연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봐야 괜히 자극적으로 들리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루카에게 들었던 말도 있고…….
여러모로 난 생각하는 것이 밖으로 잘 드러나는 사람이니 한층 더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특히 더더욱 그렇고.
아직 깔끔하게 모든 게 정리된 건 아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멋대로 이런 상황을 조성한 만큼 나도 나름대로의 목표가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에르네스트를 최고의 작곡가로 만들어 줘야겠어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맴돌던 생각을 말로 하고 나니까 비로소 조금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그의 계획은 상당한 궤도에 올라왔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고, 그가 남긴 결과물들을 세상에 현실화하고자 하는 연주자도 많아지고 있었다.
기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졌다.
만약 그중 한 사람이 곡을 완성시킬 수 있는 거라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그 역할을 맡고 싶었다.
{역시 너희 둘은 생각하는 게 비슷하구나.}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 애도 똑같이 생각했을 거야. 널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세연은 생긋 웃더니 찻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