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0화 (1,250/1,277)

##  1250화

에르네스트가 다른 작곡 콩쿠르가 아닌 퀸 엘리자베스를 택한 이유에 대해 난 여러모로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추리는 한 방향으로 모였다.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서 성공하여 연주자 동료였던 나와 아나스타샤를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어 한 것이다.

서로 도움은커녕 대화조차 힘든 상황에 그가 일부러 들어온 이유라곤 그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멋지고 진취적이지만 참 독선적인 행동이었다.

‘다른 의도는 잘 모르겠어.’

일단 그는 공식적으로 나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모두에게 공개된 곡에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와 그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상황인 것이다.

협력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에르네스트와 난 일종의 대립 관계였다. 이것이 일종의 게임이라면 난 작곡가인 그를 공략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곡을 꿰뚫어보고 완전한 해답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아마 그는 내게 항복하리라.

그렇게 난 에르네스트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전리품으로 곡을 헌정받으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그런데 세연은 약간 다른 추리를 내놓았다. 그가 날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섬뜩한 경계심이었다.

{잠시만요, 세연.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곡에서 특별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혹시 내가 곡에서 놓친 무언가가 있고, 그걸 세연이 발견한 것이라면…… 난 정말로 그만둬야만 한다.

다행히 세연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알아.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 곡을 접한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향하는 메시지야.}

{예?}

{못 느꼈니? 에르네스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즐겁게 웃던 세연은 갑자기 테이블 앞으로 얼굴을 낮추더니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한 사람을 신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있잖아.}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니 세연은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너무 오버했나?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읽어 봤는데 그렇게밖에 안 보이더라.}

파이널 무대에서 연주해야 할 곡은 세 곡. 그 곡들은 분류하자면 기성 협주곡과 자유곡 그리고 미발표 의무곡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중 대중적인 평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건 기성 협주곡과 자유곡이었다.

수많은 레퍼런스로 인지도도 높고 완성도도 보증된 곡들이야말로 연주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인 것이다.

세연의 말대로 신과 같은 찬사를 받고자 한다면 청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어 낼 수 있는 기성곡들을 잘 연주하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세연은 미발표 의무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곡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조차도 그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데…….’

난 작곡가인 에르네스트를 정말 높게 평가한다. 그의 곡이 대단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같이 놓인 기성곡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작곡가들의 작품이었다.

연주자들이 각자 경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르네스트 역시 경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곡 사이에서 에르네스트가 우세를 점하는 건 아마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분명 천재지만 라흐마니노프나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 같은 사람들과 당당하게 대결하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가 단번에 모든 곡을 뛰어넘고 파이널 무대의 메인이 되길 바라는 건 너무 과한 바람이었다.

내가 그를 최고의 작곡가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 현대를 이끌어 나갈 작곡가로서 첫 단추를 제대로 꿸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그가 쓴 곡도 콩쿠르 측의 취지에 부합하는 곡이었어.’

이미 의무곡을 읽고 연구해 본 나는 콩쿠르 측의 조건과 에르네스트가 수용한 부분들을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이와 주제는 물론 난이도 등 여러 부분에서 에르네스트는 엄청난 제약을 안고 작곡했다.

이전 무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 의무곡은 모든 파이널리스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일종의 압박 면접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정한 해답이 있는 게 아니고 음악가로서의 종합적인 스펙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그리고 같은 곡이니 심사를 해도 변별력이 보다 확실했고.

그러니 심사에 있어 에르네스트가 쓴 의무곡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우승자가 되기 위해선 중요시해야겠지.

하지만 무작정 이 곡에만 매달린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순 없었다.

‘그걸 이 아이가 모르진 않을 텐데…….’

이 정도는 모든 연주자가 다 아는 정보였다. 세연도 잘 알 것이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세연은 의무곡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런 그녀의 판단을 무시하지 않았다.

‘연구를 해 보긴 했지만 곡 자체에 집중하진 못했었어.’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 밝혀지면서 난 약간의 색안경을 쓰고 곡을 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할 때도 노이즈가 많아서 곡을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자꾸 외부적인 부분을 빙빙 돌며 살피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세연은 일주일 먼저 와서 곡을 살펴보면서 이미 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세연은 그 곡의 잠재력이 그만큼 높다고 생각하시나요?}

{응.}

{어느 정도죠?}

{음…… 글쎄?}

보통 곡의 수준에 대해 묻는 건 상당히 주관적이라서 딱히 참고가 안 되지만, 우리는 서로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로 의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세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었다.

{완성된 형태가 안 느껴져.}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내게 꽤 충격적이었다.

곡을 완성하기 위해선 무작정 악보를 따라 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과 구조를 파악하고 심상을 또렷하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확실할수록 거기에 근접해 가는 과정이 보다 합리적으로 수렴되고 결과도 정교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세연은 꽤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 밝게 보였던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난 걱정스레 물었다.

{머릿속에 구상이 안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물론 내 공부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반듯한 기교와 화성을 읽는 데엔 문제가 없었는데 그 후의 형태가 보이질 않더라고.}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솔직히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사실 일주일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렇게 시간을 많이 주었는데 15분 남짓한 협주곡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큰 문제다.

난 세연이 얼마나 영리한 연주자인지 잘 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파악하고 필요한 기술과 정보들을 빠르게 습득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날 대상으로 연구해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 세연이 힘들어할 정도로 에르네스트의 곡이 까다롭다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어. 이 곡의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

{아직은 시간도 부족하고 오케스트라의 소리도 들어 보지 못한 상황이니까 그래도 희망적으로 보고 있긴 한데…… 내 생각엔 오케스트라를 붙여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피아노 연주자가 흔들리고 있다면 아무리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붙는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했다.

레퍼런스가 있는 곡이라면 오케스트라가 나름의 해석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겠지만…… 모두가 처음 접하는 곡이라면 당연히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은 피아노 연주자의 해석뿐이었다.

세연은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세연은 박수를 짝 치며 이어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대단한 작곡가야. 콩쿠르 측에서 요구한 조건들을 완벽하게 구현해 놨어.}

{조건이요?}

{응. 일단 파이널 무대에서 피아니스트가 아예 못 치겠다고 두 손을 들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모든 피아니스트가 적당히 곡을 완성할 수 있도록 겉으로 보이는 난이도를 조절해 놓았지. 그래서 깜빡 속기 쉽지만…… 조금만 발을 더 집어넣어 보면 그 깊이가 끝이 없어서 철저하게 변별력이 생기도록 만들어 놨어.}

당연한 조건이지만 그걸 이 정도로 깊이 있게 구현한 작곡가는 아마 드물 것이다. 세연은 역시 대단하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이런 곡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건 이걸 무대에서 완성할 수만 있다면 아마 무엇이든 될 수 있을걸?}

난 이틀 정도 에르네스트의 곡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대부분의 시간을 빈틈을 찾는 데에 주력했다.

무대에서 연주해야 할 곡으로 삼고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세연에게 한마디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물론 내가 무언가 알려 주려고 해도 그녀는 거부하겠지만.

{나 내일 오케스트라랑 리허설 있거든? 일단 오늘 진짜 연습 열심히 해서 내일 해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싶네.}

지금도 세연은 전혀 포기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내게 도움을 구하려는 기색도 없이 그녀는 완강하게 자신만의 도전을 밀어붙였다.

난 그런 세연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도움이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응. 모처럼 큰 무대니까 가장 어린 우리들이 화려한 쇼를 보여 주자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세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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