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1화
세연은 늘 밝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때문에 가끔은 그녀가 아무 근심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곤 하지만, 이 먼 곳에서 혼자 거대한 무대를 마주하고 있는데 어찌 그림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녀도 긴장하고 때론 어두운 생각에 잠긴다. 단지 긍정적인 마인드로 모든 것을 잘 이겨 내려 할 뿐이다.
난 그런 세연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면 분명히 그렇게 되리란 믿음이 든다.
{그나저나 기간이 길어져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오래 볼 수도 있고.}
{그건 그렇지? 원래대로의 일정이었으면 파이널리스트들이 다 모이자마자 바로 다시 빠져나갔을 테니까.}
세미파이널이 끝난 후에 파이널리스트들을 뽑았던 이전엔 이렇게 바로 뮤직 샤펠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각 파이널리스트들이 1주 동안의 텀을 가지고 파이널 무대 순서에 맞춰 하루에 2명씩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모든 파이널리스트가 뮤직 샤펠에 모인 후 바로 다음 주부터 파이널이 시작되며 다시 2명씩 빠져나가게 되었다.
예전의 빡빡한 일정과 달리 이번엔 적어도 1주 동안은 파이널리스트들이 모여 있을 수 있으니 서로 친목을 다질 여유도 있었다.
세연도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기회는 잘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재미있게 지내보자.}
{그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이랑도…… 아, 그래도 자주 요리해 주거나 하진 마.}
{왜요?}
{그럼 다들 네 요리가 얼마나 귀한지 모를 거 아니야.}
세연은 어쩐지 아나스타샤 같은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난 살짝 위축되어선 반박했다.
{그리 어려운 요리는 아닌데요…….}
{어려운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다음부턴 다른 사람들더러 하라고 그래.}
{저와 레이 말고는 못 한다고 했었는데요?}
{세상에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하는 거지.}
막무가내로 절대 그냥 두진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말한 세연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며 덧붙였다.
{다음에 모이면 내가 주도해서 해 볼게.}
요리를 취미로 하는 나나 레이가 아니라 정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 나가는 과정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조만간 좋은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모이기로 한 일정이 있나요?}
{딱히 없긴 한데, 알레한드로가 또 부르겠다고 하더라고. 그때 가면 될 거야.}
살짝 흥미를 가지고 묻자 세연이 대답해 주었다. 어제저녁 모임도 알레한드로가 주최한 것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친목회는 그가 주도할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면 그가 매우 사교적인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난 그가 단순히 재능 있는 연주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뿐이라는 걸 잘 안다.
그는 파이널리스트 모두와 한 번씩 음악에 관련된 논쟁을 하고 싶어 할 사람이었다.
나도 사실 알레한드로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긴 하지만…… 예전처럼 음악을 모든 것의 상위에 두고 사람을 평가하는 시선은 가급적 버리고자 한다.
지금은 그냥 음악가 대 음악가로서 친밀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카페테리아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각도도 점점 높아졌다.
난 세연과 잡담을 나누며 차와 디저트를 즐겼다. 그녀도 이렇게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는지 행복하게 웃고 재잘거렸다.
{오, 타츠야.}
{……좋은 아침.}
우리 두 사람의 목소리만 가득하던 카페테리아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마른 체격의 일본인 시라이시 타츠야였다.
이전에도 몇 번 보긴 했지만 짧게 인사한 것 정도가 전부였는데, 세연은 그사이 많이 친해졌는지 마구 손짓해서 그를 불렀다.
{이리 와 앉아. 타티아나랑 이야기 많이 안 해 봤지? 내가 소개시켜 줄게.}
{난 괜찮은데…….}
{앉으라니까.}
의자를 옆으로 비키면서까지 옆자리를 탁탁 치니 앉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타츠야는 세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가고 나서도 타츠야는 좌불안석이었다.
{알다시피 난 영어도 잘 못 하고…….}
{무슨 소리야? 잘만 하던데. 전혀 신경 쓸 것 없어. 정 안 되면 번역기 쓰면 되니까.}
타츠야는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려 했지만 세연은 언어의 장벽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나도 세연이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라면 친해져 보고 싶었다.
적당히 편안하게 말을 걸어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색하게 내 눈치를 보던 타츠야가 먼저 말했다.
{어젠 고마웠습니다, 베르체노바 양.}
{어제요?}
{비프 스트로가노프…….}
{아하.}
세연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요리를 한 덕에 일단 첫인상은 좋게 잘 박힌 것 같았다.
이때다 싶어 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맛있게 먹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했어요, 시라이시 씨.}
{아, 아뇨…….}
타츠야는 당황해하며 양손을 저었지만 처음 느꼈던 거리감은 벌써 상당 부분 줄어들어 있었다.
난 방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조금 더 미루고 두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에서 혼자 연습을 30분 더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보다 값지진 않으리라.
***
세연 그리고 타츠야와 함께했던 티 파티는 아나스타샤와 이연주까지 합쳐져서 최종적으론 5명이나 되었다.
4명의 여자 사이에 낀 타츠야는 거의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를 배려해서 모두가 편하게 대해 준 덕분에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차만 세 잔 정도 마시고 우린 오전 연습을 위해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친목을 다지는 것도 좋지만,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반나절 중 적어도 몇 시간은 연습에 반드시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난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에르네스트의 악보를 펼쳤다.
‘지금까지 보던 관점을 모두 버려야 해.’
에르네스트는 작곡가고 난 그의 곡을 연주해야 하는 연주자다. 기한은 2주. 딱 그 정보만 놓고 머릿속에 맴도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그 상태로 다시 악보를 보니 마치 처음 보는 것과도 같았다. 총보도 한 번에 읽어 버리는 내 독보 능력은 순식간에 음들을 배치하고 선율을 끌어냈다.
‘그리 어렵진 않아.’
세연도 말했듯 이 곡의 난이도 자체가 감당 안 될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굳이 어려운 부분을 따지자면 리듬 쪽이었는데, 고전적 피아니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 음악적인 자유분방한 리듬을 흩뿌려 놓아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꽤 어렵게 느껴졌다.
어제 다른 연주자들도 이 곡의 리듬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중에선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았었다.
‘그 감각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몇 가지 확신을 이정표로 하여 천천히 곡을 짚어 나갔다. 가끔은 괜찮아 보이던 길도 막다른 길이거나 벼랑 끝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돌아 나와선 다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고양된다. 이 과정은 마치 모험을 하는 것만 같아서 뭔가 들뜨게 되었다.
그렇게 곡을 한 번 다 읽어 봤을 때, 난 어렴풋한 형태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작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엉성했다. 세연이 한 말처럼 이런 걸로는 제대로 된 곡을 연주할 수 없다.
잠시 악보를 들여다 본 나는 첫 마디의 첫 음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이 정도로?”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답은 내 내면에 떠오르고 있었다.
대답에 따라 난 다시 한번 음을 짚었다. 음색이 조금씩 변화하면서 이후 이어지는 곡 전체의 흐름을 잡는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방향성을 맞춘 후 그다음으로 난 1악장의 마지막 음을 짚었다.
이번엔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도록 눌러야 하는 음이었다. 이 음 역시 적당한 끝맺음이 되도록 여러 번 짚어 음을 찾아냈다.
10분 넘게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내가 찾아낸 음은 단 두 개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난 1악장 전체의 흐름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어라?”
그런데 큰 그림을 잡고 연구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그간 보이지 않았던 구간들이 툭툭 불거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짧게 나누어 놓고 보면 필요한데 곡 전체 흐름엔 방해가 되는 기묘한 부분들이었다.
완전히 배제하면 어떨까 싶어 여러모로 시도해 봤지만 에르네스트가 정교하게 맞춰 놓은 구조에서 무언가 한 조각을 빼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곡 흐름에 잘 맞도록 이 조각들을 잘 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원인을 파악하고 나자 일단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아르페지오로 시작되는 한 프레이즈였다.
난 그것을 내 해석에 맞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 연주를 시작했다.
‘……?’
그 순간 아득한 무언가가 내 몸을 깊게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난 순간적으로 빨려 가지 않기 위해 어깨를 웅크렸고, 연주가 틀어진 덕분에 그 기묘한 감각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난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악보를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인가요…….”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기술을 펼치자마자 그대로 습관처럼 손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 건 어떻게 보더라도 에르네스트가 의도한 바였다.
그만큼 편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잘 썼기 때문이지만, 일반적인 흐름으로 쳐서는 곡 전체의 흐름에 맞추지 못한다.
난 반드시 이 부분에 깊게 파고들어 고칠 필요가 있었다.
그 말인즉슨 편한 것을 내버리고 일부러 불편함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기량과 작곡가로서의 실력 두 가지 모두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 합쳐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난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렸다.
이 뒤로도 비슷하게 함정 같은 구간들이 족히 수십 개는 존재했다. 그 모든 걸 파악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만약 할 수 없다면 몇몇 부분은 항복하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편하게 연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완성도는 그만큼 떨어질 테고.
‘사람 우습게 보지 말아요.’
난 다른 사람을 쉽게 따르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자로선 전혀 아니다.
그 어떤 음악이라도 내 통제를 벗어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가 쓴 곡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놀랐었던 가슴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와 제대로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와 대결을 할 수 있는 선 위에 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날 봐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