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2화 (1,252/1,277)

##  1252화

오전 내내 연구에 매달린 결과 난 두 가지 결론을 냈다.

하나는 지금까지 했던 연구를 모두 엎어 버려야 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에르네스트가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에 올라 있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모두에게 내는 문제나 다름없어.’

에르네스트는 이 곡에 정말 많은 의미를 담았다. 며칠의 시간 동안 얼마나 깊게 알아볼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딱히 내게 유리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피아노 연주자로서라면 몰라도 작곡가로선 나도 몇 곡을 받아 본 것에 불과하니까. 그의 실력이 닿아 있는 지점에 따라가는 것에 급급했다.

다시 한번 연구하면서 다른 파이널리스트들과 내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난 조금 더 진지하게 이 곡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곡이야.’

철저하게 연구된 수학적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음악 체계와 달리 현대 음악은 살짝 어긋나 있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느끼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은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 느낄 정도만 되어도 너무 멋지게 들렸다.

겉으론 세련된 현대 음악적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도 내적인 근본은 고전에 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쓸데없는 의도 같은 걸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곡에만 집중하자 훌륭한 음악성이 잘 느껴졌다.

이런 곡을 쓸 수 있다면 작곡가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욕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난 이런 천재가 되지 못하니 그저 작품을 실체화시키는 것에 집중하기도 버거웠다.

“후…….”

한참을 연습하던 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해선 한번 시작한 부분의 끝을 맺을 때까지 연습하곤 하는데, 지금은 여전히 안개 속을 헤집는 것처럼 아리송하기만 했다.

새로운 곡을 연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작정 붙잡고 있을 상황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느낀 나는 장기전을 준비하며 자체적 메인터넌스에 들어갔다.

어깨를 쭉 펴고 팔을 스트레칭하며 목 근육도 풀어 주었다. 한 자세로 굳어 있던 자세가 풀리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관리를 수시로 해 주지 않으면 파이널 무대에 서기 전에 몸이 먼저 망가질지도 모른다.

난 곡은 물론이고 몸 컨디션까지 모든 방면에서 완벽을 기하고 싶었다.

‘늦진 않을 거야.’

사실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일반적으로 연주자들은 협주곡 하나를 연습하기 시작하면 최소 한 달, 길게는 년 단위로 파고드는 템포를 가지는데 지금은 시간이 2주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른 곡의 연습도 빼놓을 수 없고.

그러니 모든 부분에서 가속해야만 했다. 하루를 정교하게 나누어서 기존 곡들을 하루에 얼마나 연습할지 정하고,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에 투자할 시간도 정해 두어야 한다.

연구도 연습도 효율성을 따질 필요가 있었다.

절대 완벽하게 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완전하다고 느낄 수준까지 완성시키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식사하러 갈까.”

속도와 효율 모든 면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점심 식사였다. 배가 고프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체력 관리를 해야 오후에도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간단히 샌드위치 같은 거라도 받아서 방에서 먹을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내 담당인 도미니크가 샌드위치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그를 그렇게 내 매니저처럼 부리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건 직접 하는 게 좋다.

느긋하게 레스토랑에 가 보니 이미 몇 명의 사람이 모여서 식사 중이었다. 난 주방 쪽으로 가서 샌드위치를 포장해 가고 싶다고 전하고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기 앉아, 타티아나.}

세연과 루이, 레이가 식사를 하다가 날 돌아보았다. 세연이 얼른 권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앉아서 먹을 생각은 없어서요.}

{왜?}

{샌드위치 포장해 가려고요.}

{아, 바로 갈 생각이구나?}

{예. 그러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 나누세요.}

못 본 척할 수 없으니 인사만 하려고 했을 뿐이다.

내가 금방 떠날 거란 걸 인지한 세 사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도 쉽게 식사를 하거나 대화하진 않았다. 내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세 사람이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짧게 인사만 남기곤 자리를 떠나 주방 옆의 벽 쪽에 가서 멍하니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리네…….’

오전 내내 연구한 터라 머릿속이 온통 선율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레스토랑의 소음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 등이 섞여서 조금 산만해졌다.

그렇게 음악 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되레 정신이 편안해졌다.

스마트폰도 없으니 뭔가 보고 있을 것도 없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난 지금의 이 분위기가 좋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기다렸을까. 셰프 대신 다른 사람이 날 불렀다.

{타티아나.}

{아, 알레한드로.}

편한 티셔츠 차림으로 앞에 선 알레한드로는 내 시선을 추적하듯 고개를 돌려 뒤편의 테이블을 보더니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여기서 쳐다보고 있어? 부엉이처럼.}

그가 보기엔 내가 무리에 못 끼고 혼자 동떨어져서 지켜보는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다.

약간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제가 부엉이 같나요?}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올빼미 같다고 해 주세요.}

{왜?}

{올빼미가 더 귀여우니까요.}

예전에 에르네스트와 갔었던 트베르스코이의 카페가 생각났다. 그곳의 올빼미들은 정말 귀여웠었다.

에르네스트는 끝까지 부엉이와 올빼미를 구분하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거리고 있자 알레한드로도 따라 웃었다.

{너 조금 재밌어졌다? 뭐야? 무슨 계기라도?}

{전 원래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알레한드로는 지금에야 제 진면목을 알게 되신 것뿐이죠.}

{진짜 웃기네.}

사실 난 쓸데없이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늘 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나도 친한 사람들에겐 장난을 치거나 농담도 하고 싶어 한다.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던 건 에르네스트의 곡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 무대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과 가치를 지닌 곡이란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멋진 곡을 두고 난 정말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조금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오전에 계속 집중하다가 보니…… 문득 제가 참 바보 같았구나 생각이 들어서요.}

{곡 연구했어?}

난 희미하게 웃으며 알레한드로를 올려다보았다.

{결론적으론 열심히 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꽤 혼란스럽던 생각은 루카나 세연과 대화를 하면서 많이 정리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정해졌고, 그건 내가 자신 있어 하는 부분들이었다.

정리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자 조금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 든다. 귀로 들리는 내 목소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알레한드로는 크게 웃더니 받아쳤다.

{내가 라이벌 걱정 같은 걸 할 것 같아?}

{……라이벌로 봐 주시는 건가요?}

{그래, 당연하지. 너 말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렇게 많기도 하고.}

알레한드로는 이미 파이널리스트 전원을 라이벌로 보고 있었다.

심사와 경쟁을 뚫고 뮤직 샤펠에 온 모든 연주자를 어느 누구 하나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난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공평하시네요.}

그의 그런 점은 나와 비슷했다. 나 역시 모두를 같은 라인에 선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키가 크고 손이 길고 체력이 좋은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알레한드로만 하더라도 나보다 모든 조건에서 낫겠지만, 난 딱히 그를 우승 후보로 보고 있지 않았다.

세계에 통용될 연주로 누가 인정받을지는 해 봐야 알 일이다.

우린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도전적인 시선이 오가고 이내 웃음이 번졌다.

{어쨌든 전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알레한드로도 힘내 주세요.}

{당연하지. 나 상금 타서 우리 애 분유값 대야 해.}

{분유를 얼마나 사 주시려고……. 그리고 사모님이 변호사라고 하셨잖아요. 분유값은 괜찮은 것 아닌가요?}

{집 대출도 있어.}

{아.}

엄청난 무게가 실린 말에 내가 뭐라 반응하지도 못하고 멍한 소리를 내자 이때다 싶었는지 알레한드로는 가장의 무게에 대해 연설하기 시작했다.

내게도 이만큼 상금과 명성을 원해야 하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나……?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이유보다 더 강한 게 세상에 있을까 싶긴 했다.

물론 져 주거나 할 순 없으니 각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도 굳이 따져 보면 에르네스트의 곡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유가 있기도 하고……. 그걸 알레한드로나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순 없지만 말이다.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베르체노바 님.}

{아, 감사합니다!}

주방에서 셰프가 종이 포장한 샌드위치와 플라스틱 컵에 담긴 차를 내주었다. 정말 인스턴트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걸 보더니 알레한드로가 물었다.

{뭐야. 그게 네 점심이야?}

{맞아요.}

{그거 먹어서 되겠어? 키 안 큰다?}

{……저기요.}

연주자로서 공감대와 라이벌로서의 경쟁심을 느꼈고 알레한드로 역시 그러리라 믿었는데…… 그는 갑자기 날 어린애 취급했다.

난 눈을 흘기며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전 다 컸거든요?}

그런데 말하고 보니 뭔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만 들었다.

입을 꾹 다물자 알레한드로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갑자기 혼자 빵 터져선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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