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3화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조금 걱정되었다. 의무곡의 작곡가가 에르네스트라는 것을 안 이후 그녀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곡 연구를 하다가 결국 열심히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해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조금 섬뜩한 이야기였다.
경우에 따라 필요하다면 열심히 하지 않을 생각도 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일단 생각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까…….’
얼른 주제를 돌려 우승 상금에 대한 이야기나 인지도가 올라가면 이후 콘서트에서 개런티가 올라갈 것이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일부러 꺼낸 건 타티아나가 단순하게 생각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농담도 섞어 이야기했더니 다행히 타티아나는 그것도 잘 받아 주었다.
‘착하긴.’
알레한드로는 배가 아파질 정도로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가 항의의 의미로 흘겨보고 있었지만 그것도 귀여워 보였다.
의외로 타티아나는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사람을 무시하는 일은 절대 없었고 은근히 위트도 있었다.
‘이게 본성은 아닐 테지만.’
여기까지 올라오기 전,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자신의 본성을 슬쩍 내비쳤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알레한드로는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타티아나의 내면에 있는 뜨거운 열기는 피아노에 미쳐 있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식사나 대화 같은 미적지근한 것은 그녀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성실하게 식사를 챙기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이루었다.
그것이 그녀 나름의 끈질긴 노력이라는 걸 알레한드로는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대견함을 느끼지만 그런 걸 표현하긴 어려웠다.
때문에 알레한드로는 약간의 우려를 담아 농담을 이어 나갔다.
{여자애한테 말랐다느니 하는 소리 했다간 욕만 잔뜩 얻어먹는다는 거 아는데…… 그냥 말할게. 식사를 좀 더 챙기는 게 좋을 거야. 특히 여자들은.}
{음…….}
대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었다. 예민하게 받아치면 변명할 여지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타티아나라면 어쩐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알레한드로는 살짝 도박을 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몸무게가 부족한 건 테크닉으로 보충하고 있어요.}
{나도 알아. 네 파워는 충분할 정도로 강하니까. 하지만 무게가 늘면 조금 더 편해질걸?}
타티아나의 출중한 기술로 만들어진 사운드는 홀을 쩌렁쩌렁 울린다. 알레한드로는 그것을 피부로 느낀 바 있어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피지컬이 조금만 더 받쳐 준다면 정말 굉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근거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피아니스트의 기량은 하드웨어 그 자체에서 나오는 부분이 많았다.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다이내믹스에서 유리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알레한드로는 타티아나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녀가 발끈하면서 이미 다 컸다고 했으니 키나 손은 어쩔 수 없겠지만…… 몸무게는 어떻게든 가능하다.
순수한 기대와 걱정을 담아 알레한드로는 조언했다. 타티아나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손에 든 샌드위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샌드위치 하나 더 부탁해 볼까요?}
{아니…… 점심에 샌드위치만 먹기로 정해 놨어?}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먹고 싶은 걸 먹어.}
{글쎄요…….}
타티아나는 지금 들고 있는 샌드위치에도 그리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듯 말끝을 흐렸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식도락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터라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알레한드로가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요리는 그렇게 잘하면서 먹는 것엔 관심이 없는 것 같네?}
{맞아요.}
{신기하네. 그럼 요리는 왜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어서요.}
어제도 들었던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것처럼 요리도 먹이고 싶다고 했었다.
알레한드로는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웃었다.
{착하네.}
{아, 봉사 정신 같은 건 아니고…… 혼자서 요리를 해서 제 입에 넣으면 그저 그래요. 맛이야 느껴지지만 감동적이거나 하진 않더라고요.}
타티아나는 다급히 변명하듯 마구 이야기했다. 착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조차 그녀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 주는 걸 보면 정말 기뻐요. 제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뭔가 급히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살짝 꼬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끝냈다.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서 요리를 해 먹고 감동할 수 있으면 그만큼 행복한 인생도 없으리라.
비단 요리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운동 등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투자나 노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기애의 결여에서 비롯된 문제. 차라리 자각이 없다면 그럭저럭 무미건조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너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알아서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다시 흘러내리더라도 더 많이 노력하면 된다는 듯.
‘그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겠지만…….’
타티아나를 보고 있다 보면 여러 가지 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걸 굳이 짚어 주는 건 못난 짓이었다.
이미 잘 해내고 있는 그녀에게 해 줄 건 이해와 응원뿐이다.
{저번에 말했던 그건가? 혼자선 간지럽힐 수도 없다는 거.}
{……예?}
{똑같은 말이잖아. 혼자 만든 요리를 먹고 스스로 감동하는 건 어려우니까 남에게 먹여서 리액션을 받으면 그걸로 충족시킬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을 시켜서 간지럽혀 달라고 하여 자극을 얻는다는 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전에 들었던 말을 꺼내며 말의 앞뒤를 맞추자 타티아나가 바로 그거라는 듯 눈을 빛냈다.
{비슷한 거겠죠? 맞아요. 전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그런 걸 이용이라고 하진 않을걸.}
{제 만족을 위한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착하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타티아나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아마 음악에 대해서도 그녀는 똑같이 말할 것이다.
음악을 신봉하고 있지만 결국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논리에 허점이 가득하다는 걸 안다.
타티아나는 결여된 부분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끔 느껴지는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정상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노력이 대단한 것이다. 타티아나의 선하고 이타적인 성격은 그 결여마저도 흠이 되지 않게 하고 있었다.
만약 타티아나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마침 알레한드로는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행사를 자주 주도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오늘 저녁도 다들 모여 볼까? 이번엔 내가 요리해 줄게.}
{오늘도요? 아, 그렇지 않아도 세연이 이야기했었는데…….}
{그랬어? 그럼 하자고.}
연달아 저녁 모임을 가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다음 주부터 파이널리스트들은 하루에 2명씩 무대에 올랐다가 사라진다.
그 전에 기회를 많이 만들면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 피아니스트로 살게 될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알레한드로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상금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형태 없는 것들이었다.
***
세연은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건 아니었지만 서양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서양식 문화에는 조금 익숙했다.
피아니스트로 생활하면서 여러 사람과 만난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익숙해진 문화 중엔 파티 문화도 있었는데, 뭔가 놀 거리가 없어도 음료수만 한 잔씩 들고도 몇 시간이고 떠들고 노는 분위기는 세연에게 의외로 잘 맞았다.
‘대부분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던데.’
한국의 정서로는 친구의 친구를 데려오거나 모르는 사람들과 쉽게 대화하며 친해지는 서양식 파티 문화가 심심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하지만 세연은 어지간하면 빠지지 않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교 모임은 한 번 빠지면 계속 빠지게 되니까 텐션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오늘도 가자고요, 언니.}
{난 쉴래…….}
적극적인 세연과 달리 이연주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녀는 무슨 파티를 이틀 연속으로 하냐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파티가 아니라 그냥 같이 밥을 해 먹는 친목회라고 허들을 조금 낮춰서 꼬셔 보아도 이연주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기가 빨린 것이 충전되지 않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세연은 이연주를 방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마친 뒤 공동 주방으로 가자 거기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 모인 건가요?}
{아마도?}
세연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루이와 루카, 렌스키, 타츠야, 알레한드로 그리고 타티아나까지. 총 7명이었다.
어제 오지 않았던 루카와 렌스키가 온 건 꽤 흥미로웠지만 이미 세연은 어렴풋이 그 이유를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타티아나가 아침에 요리를 해 준 것에 대한 부담감을 느꼈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타티아나의 공이라고 생각하며 세연은 웃으며 다가갔다.
{역시 오늘은 안 온 사람이 많네?}
{그렇네요.}
{아나스타샤도 쉰대?}
{예, 집중하고 싶다고……. 이연주 씨는요?}
{언니도 피곤한가 봐.}
그 외에 앤서니와 레이 그리고 레베카도 자리에 없었지만 괜히 없는 사람을 의식해서 분위기를 다운시킬 필요는 없다.
세연은 기세 좋게 앞장서서 루카와 렌스키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 오늘 가만히 앉아서 노실 거 아니죠?}
{……뭔 소리야?}
{저랑 같이 요리나 해 봐요.}
당황한 렌스키는 눈을 깜빡이더니 손을 저었다.
{난 할 줄 모르…….}
{저도 몰라요. 그냥 하는 거니까 그냥 해요.}
{그게 무슨 말인…….}
{자, 앞치마 두르세요.}
세연은 무작정 앞치마를 들고 렌스키에게 다가갔다. 렌스키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지만 결국 세연의 손을 피할 순 없었다.
그의 양심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아 세운 것이다.
세연은 오늘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메뉴를 생각하기 위해 빠르게 냉장고부터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