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4화 (1,254/1,277)

##  1254화

이른 저녁이었지만 요리에 들일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다며 세연은 빠르게 움직였다.

가위바위보 같은 거라도 해서 오늘의 요리 담당을 정할 줄 알았는데, 세연은 거의 반강제로 루카와 렌스키를 차출해선 앞치마를 두르게 했다.

렌스키는 둘째 치고 루카조차 그런 세연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연은 멍하니 따라다니는 두 남자를 데리고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 보며 재료부터 확인했다. 척척 움직이는 모습만 보면 마치 프로 같다.

하지만 냉장고를 확인한 세연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멈칫했다.

{왜 그래?}

{뭔데.}

{아…….}

자신 있게 모두를 주도했던 세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스마트폰으로 레시피 찾아보면서 하려고 했는데…….}

요리가 처음이면서 의욕만큼은 충만했던 이유는 바로 인터넷에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손재주가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에 있는 레시피를 꼼꼼하게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요리들을 할 수 있으니까.

나만 하더라도 드미트리에게 기본 교육을 받은 후엔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따라 해 봤었다.

하지만 뮤직 샤펠에선 그 어떤 전자 기기도 이용 불가다. 세연의 계획은 시작부터 파탄 난 것이다.

슬쩍 문 쪽을 보니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대화를 다 듣고도 미동도 않고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레시피만 볼 테니 잠깐만 쓰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더라도 저 깐깐한 이들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넘은 세연이 아직도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이상 행동을 보이자 렌스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생각했던 것보다 되게…….}

{되게? 되게 뭐라고 하려고요? 이어서 말해 보세요!}

{바보 같다고.}

{진짜 말하다니 너무해.}

세연은 억지를 썼고 렌스키와 루카는 허탈해했다. 요리를 하겠다고 시작한지 15초도 안 되어 세 사람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테이블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와 알레한드로 그리고 루이, 타츠야의 표정도 점점 걱정스러워졌다.

{쟤들 큰일 난 것 같은데?}

{그러네요.}

그나마 자신 있던 세연도 넋을 놓았고 다른 두 사람은 애초에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이라도 앞치마를 벗으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꼼지락거리자 세연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지 않을까요?}

{……엉?}

{이런 상황에서 요리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세 사람의 센스를 느껴 보고 싶네요.}

아무 사전 지식 없이 한 요리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토스트 하나만 식사로 올라오더라도 그걸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처럼 즐기는 심정으로 지켜보고자 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루이는 불안하다는 듯 눈짓하며 물었다.

{그거…… 우리도 먹어야 하는 거지?}

{……그렇죠?}

{난 지금이라도 나가도 될까?}

그제야 난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바로 옆 레스토랑에선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무료로 주문할 수 있다.

그것을 마다하고 굳이 공동 주방에 모인 건 파이널리스트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럭저럭 먹을 만한 음식이 있어야 웃으며 대화할 분위기가 조성되는 법이다.

미숙한 세 사람이 새카맣게 탄 무언가를 내놓으면 냉랭한 책임 추궁이 한참 이어지리란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루이나 타츠야는 그런 상황을 감수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냥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자리를 떠 버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 네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건 좋은데…… 그랬다간 여기 아무도 안 남겠는데.}

모임이 와해될 위기인데도 알레한드로는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고 웃었다. 그 눈빛에선 은근히 내게 보내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네요.}

모른 척하고 지켜보기만 했다간 루이와 타츠야가 떠나 버리고 그럼 자연스레 요리를 하려고 준비하던 세 사람도 그만둬 버리게 된다.

요리에 대한 첫 도전을 그런 트라우마로 남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난 슬그머니 일어나선 패닉에 빠져 있는 세연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타티아나…….}

세연은 거의 구원자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매달렸다.

{도와줘…….}

{전 가급적 개입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비상사태야.}

{시작부터 비상이면 어떡해요?}

솔직히 걱정 반 웃김 반 정도의 기분이라서 웃음이 나왔지만 세연은 진지하게 지금 큰일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그녀 옆으로 가선 냉장고를 살폈다.

{잠깐 볼게요.}

어제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봐 두었기 때문에 대충 파악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직원들이 보충해 놓았는지 몇 가지 재료가 더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을 경우 말해 놓으면 사다 주기도 한다고는 하는데……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재료들을 확인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세연을 위시로 한 루카와 렌스키가 희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상은 무척 실례겠지만, 새끼 새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요리 테마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이탈리안? 러시안? 코리안?}

{우린 그런 거 몰라.}

{그런 사치스러운 여유가 있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사래를 쳤다. 난 웃으며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그럼 제일 간단해 보이는 것으로 하죠.}

잠깐 고민해 봤으나 지금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일단 내가 일선에 나선다는 건 논외다. 난 되도록 지금 앞치마를 두른 세 사람이 요리를 완성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렇게 첫 기억을 좋게 만들어 놓아야 다음에도 하고 싶어질 테니까.

때문에 초보자들이 하기 쉬운 것을 택해야 했고, 칼을 많이 쓰거나 조리 과정이 복잡한 것들은 제외되었다.

고민 끝에 내가 꺼낸 건 닭 날개였다.

{이 닭 날개를 구워서 매운 양념을 곁들이는 건 어떨까요? 버팔로 윙의 베리에이션처럼 될 것 같네요.}

깔끔하게 손질된 닭 날개들이면 따로 손댈 것도 없다. 그리고 튀기는 건 어려우나 그냥 굽기만 하는 건 매우 쉽다.

이 정도로 쉬우면 어지간해선 망치기도 어렵고, 닭 요리는 어느 나라에서나 잘 먹히는 메뉴 중 하나이니 호불호가 갈리는 일도 적을 것 같았다.

간단한 선택과 코칭이었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오, 괜찮을 것 같은데.}

{왜 같은 재료를 보고도 그 생각을 못 했지?}

냉장고에 재료가 너무 많이 차 있던 것이 문제였다.

요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재료들만 보니 혼란스러워져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딱 정해 주고 나니 저절로 추진력이 붙었다. 세연보다 먼저 의욕에 찬 태도로 렌스키가 나섰다.

{굽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양념은?}

{이쪽 찬장에 향신료들이 있어요. 매운 거라면 제가 해 볼게요.}

{너무 매우면 안 돼.}

{괜찮아요. 저도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루카와 세연도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곧 세 사람은 모여서 포장지를 뜯고 프라이팬을 꺼내는 등 알아서 요리 준비를 시작했다.

중간에 냄비를 떨어뜨리거나 기름을 찾느라 헤매는 등 사소한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즐겁게 공동 요리를 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순도순 요리하는 세 사람을 난 테이블에서 흐뭇하게 관찰했다.

혹시나 싶어 날 찾으면 가서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젠 맡겨도 되겠죠?}

{넌 역시 대단한 것 같아.}

{예?}

{다들 헤매고 있는데 바로 답을 찾아내잖아. 직접 요리를 하게 만들기도 했고.}

내가 개입해서 요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사실이지만, 내가 한 건 그저 무슨 요리가 좋을지 골라 준 것뿐이다.

진짜로 대단한 건 용기 있게 행동하고 있는 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웃으며 대답했다.

{전부 세연이 하겠다고 한 덕분이죠.}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안전하게 칼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물론 세연이 배우고 싶어 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그녀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배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세 사람은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신 있게 요리를 해 나갔다. 난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맛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에서 비롯된 방치의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잔인했다.

{이거…….}

{먹으면 죽는 거 아니야?}

새빨갛게 절여진 닭 날개는 척 보기만 해도 매운맛이 입안에 감돌 정도로 무서웠다.

테이블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올려다보자 세연이 쩔쩔매며 설명했다.

{양념을 만들다 보니까…… 단맛이 필요할 것 같아 설탕을 넣었는데 너무 달아져서 간장도 넣고…… 그러다 보니 결정적으로 맵지가 않아서 고춧가루를…….}

전형적인 초보자들의 실패라고 할 수 있었다.

향신료 조합 비율에서 난항을 겪다가 적당히 망한 시점에서 마무리를 지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세연은 어떻게든 매운 양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춧가루를 과다하게 넣은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고춧가루들은 각 나라의 취향에 맞도록 여러 종류가 있었고, 그중엔 멕시코 등지에서 온 엄청 매운 것도 있었다.

타츠야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나도 매운 거 잘 못 먹거든?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이제 와서 그렇게 이야기해 봐야 신뢰도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이미 닭 날개 구이 요리는 완성되었고, 이걸 한 입도 안 먹어 볼 순 없었다.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알레한드로였다.

{뭐, 못 먹기야 하겠어? 남미식 매운맛에 비하면 이 정도야.}

그렇게 여유롭게 닭 날개를 집어 한 입 베어 문 알레한드로는 두어 번 우물거리자마자 옆에 있던 물컵을 들었다.

{제발 경쟁은 신사적으로 하자…….}

{무슨 소리예요?}

{이런 좋은 자리에서 음식으로 암살하려 드는 건 너무하잖아.}

짧지만 강렬한 감상이었다. 세연은 침묵했고 렌스키는 그 정도는 아닐 거라며 자신도 한 입 물었다가 기겁했다.

루카만이 간신히 제정신인 상태로 날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

그 목소리는 흡사 아까 나를 찾던 세연과 닮아 있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이 요리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