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5화 (1,255/1,277)

##  1255화

일단 맛이 어떤지 알아야 하기에 조금 먹어 봤다. 그리고 혀가 불타는 줄 알았다.

{괜찮아?}

{잠깐…….}

아찔할 정도로 매운맛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어지간해선 다 된 요리에 따로 손을 대고 싶진 않았지만, 이건 먹는 사람은 물론이고 해 준 사람도 트라우마가 남을 만한 요리였다.

{제가 조금만 손을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렇게 해!}

{제발 해 줘.}

양해를 구한 다음 지옥의 닭 날개를 들고 주방에 섰다. 하지만 조금 난처했다. 이미 조리된 요리를 되살리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걸 버리고 새로 요리를 할 순 없었다. 알고 있는 대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난 임기응변에 꽤 강한 편이었다.

‘보자…….’

일단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감미료를 써 보는 것이었다.

너무 과하면 맛이 아예 이상해져 버리니 적당히 중화시킬 정도만. 거기다 닭 날개를 따로 더 구워서 추가하는 것으로 양도 늘리고 물을 살짝 붓고 거기에 감자와 채소, 버터도 섞었다.

감자는 원래 버팔로 윙에 자주 곁들이는 재료이면서 전분이 매운맛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난 모든 지식과 노하우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요리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반드시 살려 내야 한다는 묘한 의무감이 날 고양시켰다.

잠시 후 나온 결과물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이게 아까 그거라고?}

{어떻게 한 거야, 대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알레한드로는 내가 손본 요리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하나를 해치우고 두 개째를 집었다.

알레한드로의 반응이 일종의 신호였다. 모두들 앞다투어 닭 날개를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

난 살짝 떨어진 곳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반응들을 살폈다. 다행히 먹기 불편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요리를 살리고 우리도 살렸어.}

{진짜 맛있는데?}

{맥주 마시면 안 되나?}

알레한드로나 루이, 타츠야는 물론이고 거의 지옥 끝자락에서 돌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세연과 루카, 렌스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기 시작했다.

세연은 내 옆자리로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타티아나.}

{아뇨……. 이미 완성된 요리에 손을 대서 미안해요.}

{무슨 소리야! 네가 도와줘서 간신히 살았는데.}

요리라는 건 실패했을 때 잃는 것이 너무나 많다.

재료와 시간을 날리는 건 물론이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실망감까지 안겨 주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도 연주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인원이 7명이나 되니까 그 부담감은 정말 컸다. 이번엔 수습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닭 날개 요리가 모두의 마음에 들었는지 한층 분위기가 좋아졌다. 특히 렌스키와 알레한드로는 거의 오늘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처럼 닭 날개를 먹어 치웠다.

{맥주가 없다니, 말도 안 돼.}

{……이런 곳에서 맥주를 찾으시는 게 더 말이 안 되죠.}

콩쿠르 참가자들은 혈기왕성한 20대가 많다. 술 같은 걸 허용했다간 정말 통제 불가능하게 될 것이 뻔하기에 뮤직 샤펠에서 음주는 금지였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거의 한이 맺힌 것 같았다.

{벨기에는 맥주 종류만 3,000여 가지가 넘는 나라야. 그런데 이렇게 맥주로 유명한 나라에서 멋진 안주까지 앞에 두고 맥주를 못 마시다니…… 이게 대체 무슨 고문이야?}

{메뉴를 잘못 정했나 봐요.}

{아니! 전혀. 맥주 대신 이 콜라로 취해 봐야지.}

알레한드로는 껄껄 웃으며 콜라를 들이켰다. 우스운 농담이긴 했지만 사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여기에 있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세연이 킥킥 웃으며 내 어깨를 찔렀다.

한참 동안 우린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테이블 위로 오가는 이야기 주제는 음악보다는 요리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아무래도 모두들 조금이나마 요리의 신비에 눈을 뜬 모양이다.

나쁘지 않은 취미라고 생각한다. 어디서나 한몫할 수 있는 취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엔 나도 요리해 볼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꼭 타티아나는 불러 둬라. 소방수처럼.}

{그럼 타티아나는 무슨 죄냐?}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간간이 내 이름도 들렸다.

다들 약간 미안함에 머쓱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렇게 날 필요로 해 준다는 것이 순수하게 무척 기뻤다.

{언제든 괜찮으니 불러 주세요.}

{솔직히 그건 너무 미안하고…… 다른 베니핏이라도 줘야 할 것 같은데.}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요?}

{그러게…….}

지금은 모두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공정성이 중요한 콩쿠르에 임하고 있는 피아노 연주자들이다.

누군가 모두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특별한 무언가가 주어질 순 없었다.

난 살짝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으로 내일 일정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세연과 루이.}

{응?}

{내일 오케스트라와 협주곡 리허설이 있죠?}

그 말이 나오자마자 느긋하던 분위기가 변했다.

우리가 뮤직 샤펠에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간다. 일찍 이곳에 온 사람들에겐 해야 할 일이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세연은 잘해 보겠다고 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루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시선이 세연과 루이에게 향했다. 그러자 루이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로 기울어졌다.

{난 망했어…….}

{괜찮으세요?}

{아니, 전혀. 이렇게 어려운 건 처음이야.}

역시 의무곡을 연습하다가 멘털이 흔들린 모양이다.

아무리 프랑스에서 날아다니던 피아노 연주자라고 하더라도 일주일이 조금 넘은 짧은 시간 사이 협주곡을 하나 새로 연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보여지는 난이도보다 심층적인 어려움이 훨씬 더 심하다면 더더욱.

루이는 오랜 시간 연구했지만 곡을 겉핥기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며 한탄했다.

{지금 여기에 온 것도…… 나랑 비슷한 사람 있을까 싶어서…….}

약간 미숙한 영어로 그가 중얼거렸다.

내일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있는 사람은 세연과 루이 그리고 이연주, 레이였다.

하루에 4명씩 로테이션을 돌며 총 두 번의 리허설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연주와 레이는 자리에 없었다. 각자 방에서 쉰다고 하긴 했지만 지금 정말로 쉬고 있진 않을 것이다.

엄청난 고충을 겪으며 곡과 씨름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나도 약간 긴장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로 세연이 휙 끼어들었다.

{모두 똑같아요, 루이 씨.}

루이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세연은 아예 더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했다.

{연습은 안되고 불안하기만 하죠. 내일 오케스트라 앞에서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고요.}

{…….}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가장 큰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요.}

눈을 빛내는 세연에겐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불안함에 떨던 루이도 어느새 안정을 찾고 세연에게 집중했다.

{그게 무슨 말…….}

{적어도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리고 작곡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볼 수 있잖아요?}

내일 리허설 자리에서 연주자가 할 수 있는 건 음악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돌려받을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피드백하여 다음 연주를 더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연주자들이 항상 하는 일이었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실전을 눈앞에 두고 떠올리긴 정말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장 어린 세연이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루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네요…….}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고 뭐든지 얻어 내서 기어이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자고요.}

그렇게 세연은 루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같은 곡을 가지고 내일 리허설을 준비하는 연주자에게 약간의 동료 의식을 느끼는 듯했다.

크게 보면 굳이 경쟁자를 도와준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세연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 듯했다.

콩쿠르에서 성적을 거두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를 딛고 올라서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수 또한 실력이며 그것을 상호 인정하는 것도 스포츠맨십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최고의 상태인 상대들과 겨루길 바라는 것 또한 건전한 자세였다.

그런 부분에서 세연은 나와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다. 약간 고지식하기도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이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세연을 보며 웃었다.

{세연 양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네요.}

{에헤헤, 고마워요.}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며 난 약간 안심했다. 괜히 리허설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가 안 좋아질 뻔했는데 세연 덕분에 다시 괜찮아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알레한드로가 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물었다.

{저 애도 네가 키운 거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만약 그런 거라면 잘 키웠다고 칭찬해 주려고 했지.}

이 남자가 예민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와 세연은 같은 나이인 친구이지만, 사실 우리 관계는 그것보다 살짝 더 복잡했다.

실제로 세연과 막 친해지기 시작했을 때 내가 약간 선배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연은 날 박 교수님과 비슷한 위치에 놓기도 했지만, 그것도 세연이 날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고, 결코 어느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칭찬은 제가 아니라 세연에게 직접 해 주세요. 기뻐할 테니까.}

{저 애는 날 살짝 피하던데…….}

{그러니까 칭찬을 하면서 다가가면 되잖아요?}

{그게 잘 안되더라고.}

알레한드로는 능청스럽게 웃긴 했지만 그래도 세연에게 조금 더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