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6화 (1,256/1,277)

##  1256화

아침 일찍 눈을 뜬 세연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오전부터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완주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곡을 다 암보해야 하는 건 아니라서 그럭저럭 보고 치는 거라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했듯 세연은 오늘 리허설로 모든 걸 결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단 간을 봐야 하는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얼마나 먹힐지, 그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제 타티아나는 대단했었지.’

세연과 렌스키, 루카가 망쳐 버린 닭 날개 요리를 타티아나는 다시 살려 냈다. 그렇게 살려 낸 요리는 정말 입맛에 딱 맞게 맛있었다.

매워서 입에 대지도 못할 정도였던 요리도 그렇게 되살아난다. 음악이라고 해서 못 할 건 없었다. 이쪽은 세연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고.

최대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고 반영해서 더더욱 좋은 연주를 만들어 내면 되는 일이다.

물론 남은 시간이 많진 않지만…… 세연은 그걸 해내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그 애가 도와주거나 수습해 주진 못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면서 세연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 저녁의 기억들은 다시 떠올려 봐도 기분 좋았다. 덕분에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 연습을 마친 세연은 벌떡 일어나선 식사를 하러 갔다.

레스토랑엔 이미 몇몇 사람이 삼삼오오 앉아 식사 중이었다. 세연은 홀로 앉아 있는 이연주에게 다가갔다.

「언니.」

「아, 세연아.」

이연주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서 무시당하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도 이연주는 여유 있는 태도였다. 세연은 그녀의 맞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어제는 연습 잘했어요?」

「그럭저럭?」

「와, 그래도 꽤 자신 있나 봐요? 그렇게 말할 정도인거 보니까.」

「자신 없으면 안 되잖니. 우리 일은.」

쓸데없는 과한 자신감을 가지는 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대체로 피아니스트들의 정신적 문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이 의무 협주곡처럼 기술적 난이도는 낮은 곡들을 연주할 땐 더더욱 그렇다.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 판단이 안 서서 갈팡질팡하면 그것이 그대로 음악에 묻어나 버린다. 그러니까 그냥 직관대로 질러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었다.

물론 에르네스트의 곡은 직관적으로 간단히 파악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심도가 깊은 곡이었지만…… 일단 지금 세연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였다.

세연은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너 리허설 몇 시지?」

「11시요.」

「난 1시야. 왜 시간을 이렇게 해 놨는지 모르겠네.」

점심시간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리허설 대비에 집중하기가 조금 애매한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나름의 사정과 합의가 있어서 결정된 시간이리라.

「조금이라도 앞으로 당기려는 것 아닐까요? 오늘 4명이나 리허설을 하니까…….」

「세미파이널 때도 그랬지만, 오케스트라도 힘들겠어.」

「그렇죠?」

하루 몇 명이나 되는 연주자들과 협연하고, 심지어 모두 똑같은 패턴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연주자들의 특색과 해석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일이다.

상상만 해도 아득해질 정도로 어려운 프로들의 일이었다.

세연은 피아니스트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식사를 주문했다. 이연주가 먹고 있는 것과 똑같은 조식 메뉴였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젠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요.」

「나도 가 볼 걸 그랬나…….」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어제 저녁에 타티아나가 했었던 마술과도 같은 일을 듣고 이연주는 프로 요리사도 아닌데 그런 게 가능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타티아나의 요리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이야기하던 세연의 앞에 식사가 나왔다.

세연이 포크를 집어 들자 이연주는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가 리허설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작곡가도 온다고 했었지?」

「네, 맞아요.」

「오늘 반응 어떨지 궁금하네. 조금 냉정한 사람 같던데.」

「음…….」

이연주는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일단 같은 학교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았다.

흥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보라면 세연이 아는 것도 꽤 많았다.

에르네스트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근처에서 몇 번 보긴 했었으니까.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아마 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딱 잘라 관계없음을 밝혔고, 타티아나 역시 담백하다 못해 비판적인 태도마저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엔 칭찬도 섞긴 했지만…… 일단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에 세연이 알던 그 관계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이번엔 확실히 무리하긴 했어.’

곡을 보면서 느끼는 바는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곡으로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다가올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다.

세연은 그것이 타티아나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곳에 모인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그것을 그냥 손 놓고 보고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세연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고.

그 점에 대해선 이미 타티아나와 충분히 이야기했었고, 그녀도 납득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중요한 건 직접 곡을 가지고 작곡가와 부딪쳐 보는 것뿐이었다.

「그거야 오늘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건 그렇네. 아무튼 잘해, 세연아.」

「언니도요.」

세연은 살짝 긴장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

리허설 시간이 되자 콩쿠르 직원이 세연을 찾아왔다. 스마트폰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매번 정확하게 찾아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일단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계속 추적당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어딜 가든 직원들이 따라붙는다.

혹시나 외부와 접촉할까 봐 감시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 과잉 대응인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세연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따라붙고 가끔은 카메라가 그녀를 촬영하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세연은 그렇게까지 자만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냥 기분을 즐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뮤직 샤펠에 있는 내내 늘 당당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약간 힘들었다.

‘어우…….’

신관인 드 로누아 윙의 중앙에 있는 스튜디오1. 하스-테이헨 스튜디오haas-teichen studio.

문을 열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의 시선이 세연에게 쏟아졌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때와는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기성곡을 연주하는 게 아니니까…….’

클래식 음악가들 사이엔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규칙 같은 것이 있다.

오랜 시간 전수되어 온 그 규칙을 나도 알고 상대도 알 것이란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서로를 믿고 음악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간 공유하는 규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건 바로 저 멀리,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시작될지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 불안정함이 분위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세연은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도망치지 않고 앞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건 연주자로서 훈련한 나날이 헛되지 않은 덕분이리라.

{반갑습니다.}

중년의 지휘자가 세연 쪽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했다가 그가 악수를 청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곤 얼른 다가가 악수를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휘자님. 한국에서 온 임세연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게 되어 기쁘군요. 전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belgian national orchestra의 지휘자 데릭 잔트입니다.}

이미 그 위상에 대해선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는 1931년에 창단된 엄청난 역사를 지닌 오케스트라였고, 현재는 브뤼셀 미술 센터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야말로 벨기에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였고 그 실력도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났다.

파이널리스트들은 마지막 협주곡들을 연주할 때 이 오케스트라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스케줄은 아시겠지만 오늘은 1시간 동안 에르네스트 작곡가님의 협주곡만 리허설합니다. 그리고 사흘 뒤의 두 번째 리허설 때 두 곡 모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최종 리허설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듣던 대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기성 협주곡 같은 경우엔 정말 리허설 한 번만 하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거다.

세연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차분하게 심장 박동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해내야만 한다. 다른 연주자들도 모두 똑같은 조건이고 분명 각자의 방식대로 해낼 것이다. 그러니 세연도 못 할 건 없다.

그런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시 눈을 뜬 세연의 앞엔 이전처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보는 연주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살짝 긴장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결코 누군가가 위거나 아래이지 않다. 음악이라는 예술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모두가 협력자인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세연은 다시 에르네스트 쪽을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하고도 에르네스트는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보고 있기만 했다.

‘인사를 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나?’

아니면 그 정도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거나…….

아무튼 에르네스트가 왜 저렇게 복잡하고 힘든 길을 가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세연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세연도 이런데 타티아나는 얼마나 섭섭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세연은 여기서 일단 어떻게든 에르네스트의 입을 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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