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7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지원하기 전, 세연은 예전 정보들을 많이 찾아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점적으로 본 것이 바로 의무곡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다른 콩쿠르와 차별화되는 점이면서 동시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콩쿠르로 만들어 주는 부분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의무곡을 연주해야 하는 파이널리스트에게 주어지는 건 항상 세 가지였다. 피아노 솔로 악보, 총보, 피아노가 빠진 오케스트라 CD.
이 중 앞의 두 개는 받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CD는 없었다.
오케스트라 소리 없이 협주곡을 혼자 연습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문의를 해 보기도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저 단순했다.
‘이 정도로 어렵게 할 필요가 있었냐고…….’
작곡가인 에르네스트는 오케스트라 CD를 녹음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미리 듣고 피아니스트들이 곡 연습에 임하면 이미 영향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는 가지만 그 때문에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릴 정도였다.
에르네스트는 본래 피아니스트였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들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되레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파고들어선 철저하게 배제하고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스타일이었다.
심사 위원들이야 박수를 치며 환영할 타입이지만…… 그런 그의 곡을 소화해야 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입장에선 정말 이렇게 악랄한 작곡가가 없었다.
‘그래도 재미있어.’
세연은 짙게 웃으며 보면대 위의 악보를 다시 살폈다.
에르네스트는 열일곱 살이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었지만, 역시 어려서 가능한 온갖 도전들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었다.
그건 곡 외적으로도 그렇고 내적으로도 그랬다.
읽어 보면 겉으론 쉬워 보이고 파고들면 까다로운 곡이었지만 그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에르네스트만의 특이한 방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도대체 오케스트라와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갈피조차 잘 잡히지 않는 프레이즈들. 결국 직접 연주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앞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마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휘자 데릭은 오케스트라를 준비시키면서도 힐끔거리며 세연 쪽을 바라보았다.
세연이 오케스트라와 작곡가를 통해 정보들을 더 뽑아내려는 것처럼 오케스트라 역시 세연을 통해 다음 11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계산 중이리라.
이곳의 음악가들은 그 미묘한 관계성 위에 서 있었다.
{자, 임세연 양.}
세연이 차분히 어깨를 늘어뜨리자 데릭이 그녀를 불렀다.
{네, 지휘자님.}
{미리 상의할 것이 있다면 짚고 넘어가죠.}
{음…… 글쎄요. 딱히 특별한 건 없어요. 악보에 적혀 있는 대로 연습했거든요. 인 템포 가능하고요.}
{악보는 직접 넘기실 수 있습니까?}
지금 데릭이 묻는 건 악보에 얼마나 숙달되었냐는 의미였다.
암보를 하지 못했더라도 숙달된 정도에 따라선 반쯤 외우고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엔 집중해서 연주해야 하는 빠른 구간은 그냥 악보에 손대지 않고 연주한 다음 잠시 여유가 생기면 빠르게 악보를 넘기는 식으로 페이지 터너 없이도 피아니스트가 혼자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연은 그 정도 자신감은 없었다. 악보를 빨리 외우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다면 한 분이 도와주실…….}
{제가 하죠.}
그때였다. 구석에 앉아 있던 에르네스트가 일어나더니 자원해서 세연을 돕겠다고 말했다.
인사도 안 받아 주는 것 같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싶었지만,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느니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어 할 뿐인 것 같았다.
애초에 작곡가는 리허설 현장에 올 필요가 별로 없었다. 와 봤자 조언 같은 걸 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언은커녕 화를 낼 수도 없다.
자신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피아니스트들은 그것조차 바로 반영해 오답을 정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곡가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그냥 앉아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세연은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려 했다.
{제가 잘할 것 같나요?}
원래 세연은 에르네스트에게 평대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서 경어를 써서 속삭였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힐끔 세연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정말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반응이었다. 세연은 자신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에겐 제발 이러지 않길 바랐다.
{준비를 잘해 오신 것 같군요. 그럼 이대로 갑시다.}
세부 의논이 끝나고 우선 1악장만 리허설에 들어가기로 했다.
악보를 바라보고 있던 세연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옥타브를 짚었다.
‘솔직히 이 시작 음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
불안하다. 언뜻 느껴지기로는 걸음걸이에 가까운 사운드인데 그것이 두 발 동물인지 네발 동물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 나가면서 세연은 옆에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신경을 쏟았다.
그의 숨소리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묻어 나오면 그것이 힌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에게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규칙적이기만 했다. 그 어떤 변화도 없어서 도무지 참고가 되지 않았다.
‘철저하네…….’
속으로 혀를 차면서 세연은 조금 더 격하게 음악을 밀어붙였다.
피아노 솔로가 곡의 시작을 열고 이어 오케스트라가 따라왔다.
세연의 연주를 듣고는 엇나가지 않게 그대로 따라오는 실력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균형 잡혀 있었다.
지휘자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단원 모두 베테랑이었다.
정말 호화롭게 느껴지는 소리의 부딪힘을 느끼면서 세연은 자신이 맡은 피아노 파트를 연주해 나갔다.
하마터면 오케스트라에 휩쓸릴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앞장설 수 있었다.
‘자신 있게 연주해야 해.’
피아노는 커다란 악기지만 결국 혼자서 연주한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뚫고 나가려면 소리에 그만한 확신이 있어야 했다.
어설픈 각오를 가지고 미지근하게 건반을 누르면 바이올린 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릴 뿐이다.
타티아나에게도 말했고 루이, 이연주에게도 말했다.
세연은 미숙한 음악이라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자신 있게 연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도 피아니스트는 굉장히 강해진다.
조금 더 집중하여 세연은 온몸을 사용해 소리의 부피를 키웠다.
이번엔 망칠 땐 망치더라도 확실하게 피아니스트로서 증거를 남기는 것이 중요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했는데…… 같이 연주하다 보니까 알 것 같아.’
세연이 자신 있게 연주에 임하자 덩달아 오케스트라의 반응도 신속해졌다.
기세를 몰아 세연은 다시 오케스트라의 소리에서 드러나는 정보들을 자신의 연주에 접목시켰고, 그건 다시 오케스트라에게 정보 덩어리로 전해졌다.
마치 탁구 경기처럼 오케스트라와 세연은 서로 음악을 주고받으며 리듬감을 맞춰 나갔고, 점점 정교해졌다.
어느 누구 하나 실수하지 않는 절묘한 랠리였다.
혼자선 절대 할 수 없는 유동적인 연습을 하며 세연은 매초마다 협주곡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선 이전의 선율을 피아노로 퍼부으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와 합쳐진 소리를 결과물로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역시.’
처음 생각했던 대로였다.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음 일단 부딪치면 무엇이든 될 것이라는 확신.
피아니스트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을 떨쳐 버린 세연은 지금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악보를 넘겨 주는 타이밍도 점점 더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악보가 넘어가길 바란 후 몇 초 정도의 어긋남이 있었다면, 지금은 정말 1초도 안 되는 정확한 타이밍에 세연의 바람을 에르네스트가 이루어 주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했었던 만큼 에르네스트는 어떨 때 악보를 넘겨 줘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눈앞에선 자동으로 악보가 넘어가며 새 음표들을 보여 주고, 귀에 들려오는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세연의 머릿속에 투사했다.
그 사이에서 세연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렇게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세연은 단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한 번도 안 틀리지 않았어?’
처음 하는 리허설은 유명한 기성곡을 하더라도 엉망진창인 것이 당연했다.
연주자는 실수하고 오케스트라와 박자는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세연은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음악의 완성도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세연을 고양시킨 것이다.
빠르게 어려워지는 구간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세연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좋았습니다. 아카데믹하면서도 개성이 잘 드러나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연주라 듣기 좋더군요, 임세연 양.}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분에 넘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여서 좋았어요…….}
{하하, 과찬입니다.}
데릭은 사람 좋게 웃으며 세연에게 공을 돌렸다. 그도 이번 리허설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잠시 악보를 앞뒤로 넘겨 가며 무언가 체크한 데릭은 이어 세연에게 말했다.
{1악장에 대해 할 코멘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지금 이 집중력을 그대로 살려서 이어 가 보고 싶군요. 어떻습니까?}
{전 준비됐어요.}
{좋습니다. 그럼 2악장에 들어가 보도록 하죠. 조건은?}
{방금 전이랑 똑같아요.}
서로 공유하는 정보가 없어서 경계하던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는 5분간의 협연으로 인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조금 더 밀착한, 멋진 연주를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세연은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옆에서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말없이 악보를 넘겨 2악장의 첫 장을 펼쳐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