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8화 (1,258/1,277)

##  1258화

일반적인 협주곡의 구조는 주제를 제시하고 흥미를 끄는 1악장, 느릿한 템포로 중간 다리가 되어 주는 2악장 그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3악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은 그 전통적인 구조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첫 악장이 가장 느리고 쉬우면서 서서히 빨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작곡 기법으로 만들어졌음에도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현대와 인상주의 어딘가 중간 즈음에 위치한 느낌을 주는 이 곡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연주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세연은 일주일 내내 곡을 연구하면서도 이런 계단식으로 곡의 구조를 만든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단순하게 단계별로 피아니스트의 기량을 측정하기 위한 바로미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하니 에르네스트가 음악성을 내려놓고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분명 음악적인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파헤쳐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피아니스트의 일이었다.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세연은 연주에 임했다.

『휴.』

3악장까지 마치고 손을 내려놓자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도 사라졌다.

그간 오케스트라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안절부절못하며 연습했었던 나날들의 괴로움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완성도는 차치하고 일단 끝까지 완주해 낸 것이다.

‘테크닉적으론 거의 틀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곡은 높은 테크닉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연은 3악장에 이르러서야 살짝 미스 터치를 몇 번 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미스 터치들은 현대 음악 특유의 불협화음에 섞여 들어가서 세연이 말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터였다.

연주엔 문제가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다듬으면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 곡의 진가를 제대로 그리진 못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가…….’

천재인 에르네스트의 곡이기도 하고, 심사와 경쟁을 거친 곡이니 분명 이렇게 쉬울 리 없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자꾸만 해석이 비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첫 단추는 그럭저럭 잘 꿰었다. 데릭이 지휘봉을 내려놓더니 웃었다.

{기분 좋은 협연이었습니다.}

{잘 받아 주신 덕분이죠. 첫 리허설이라 긴장했었는데…… 잘되어서 다행이네요.}

{저희야말로 세연 양이 첫 번째라 다행입니다.}

슬쩍 다른 단원들의 반응도 살펴보니 대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모두 그럭저럭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하는지 들리진 않지만 그것이 호의적인 평가들이란 건 대충 느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연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지만 이런 반응만으론 아직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작곡가님은 어떠세요?}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페이지 터너를 하고 있던 에르네스트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세연은 은근히 떠보듯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세연을 보더니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만족스러움이나 실망감 등 어떤 걸 보여도 영향이 갈 테니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이해한다. 조언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훌륭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세연은 에르네스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협주곡을 피아노로 가공하여 실현시킨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아무 반응이 없으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연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파이널리스트답게 어른스러운 태도로 대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에르네스트를 도발해서 어떻게든 다른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괜히 장난 같은 걸 치면 세연의 명예에 흠이 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감수하고서라도 에르네스트의 옆구리를 찔러 보고 싶었다.

{치다 보니까 생각난 건데, 3악장 중간에 이 부분 있잖아요.}

악보를 뒤로 넘기며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세연은 멈추지 않고 피아노 건반을 짚었다.

{이렇게 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세연은 3악장의 한 프레이즈를 즉흥적으로 바꿔 연주했다.

작곡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에 그저 본능적인 느낌에 의존한 엉망진창인 편곡이었다.

작곡가에게 할 수 있는 이보다 강한 도발은 없었다. 10초 남짓한 즉흥 연주였지만 등 뒤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겁하는 반응이 느껴졌다.

세연은 지금 그들의 반응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에르네스트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살짝 김이 새긴 했지만 이대로 멈췄다간 세연만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지휘자를 돌아보았다.

{어떤가요?}

데릭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건 악보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느낌은 더 살지 않아요? 지휘자님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어요.}

{세연 양.}

{작곡가님 눈치 볼 것 없어요. 어차피 한마디도 안 하잖아요?}

다시 한번 싸움을 걸듯 세연은 에르네스트를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가 이런 일을 겪느니 세연은 자신이 나서서 저 침묵을 깨고 무엇이라도 좋으니 반응을 끌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에르네스트를 바보 취급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데릭은 난처해했다. 여기서 세연의 편곡에 평을 내는 건 어떻게 하더라도 에르네스트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쨌건 에르네스트는 파이널 의무곡을 작곡한 작곡가였다. 우습게 보거나 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좋은 리허설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단원들도 모두 조용해졌다.

진득한 침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사이 세연과 에르네스트는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평정을 잃는 순간 정말 큰 싸움이 터질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데릭이 중재에 나섰다.

{연구를 많이 하신 것 같군요. 이 짧은 시간에 세연 양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여력을 많이 투자할 정도로 이 곡이 마음에 드신 것 같군요.}

데릭은 세연의 편곡에 대해 평하지 않고 모호하게 말을 돌렸다. 세연은 그 점이 조금 짜증 났지만 그것도 어른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며 별수 없이 받아들였다.

{의무곡이잖아요?}

{그럼 콩쿠르 우승이라는 목표를 두고 단 2주 연습한 이 곡을 비장의 곡으로 준비하고 있는 겁니까?}

{그건…….}

{당연히 아니겠죠. 훨씬 오랜 시간 갈고 닦아 온 곡으로 인정받길 바랄 테니까.}

대화의 흐름이 약간 기묘해졌다. 가시 돋친 대응을 준비하고 있던 세연은 속으로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편곡으로 도발을 했던 세연이 할 말은 아니지만, 굳이 의무곡은 별 비중이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파이널리스트들이 실제로 그렇게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작곡가는 염원과 의지를 담아서 쓴 곡일 것이기 때문이다.

싸우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수위를 높여 나가던 세연도 깜짝 놀라 제동을 걸 정도로 데릭의 급발진은 날카로웠다.

에르네스트도 세연도 데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릭은 두 사람의 시선을 끈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듯 씩 웃더니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연 양은 이 곡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동기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성을 되찾은 세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음…… 콩쿠르 상금이나 명예 같은 외적인 동기 말고 내적 동기를 짚어 보자면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긍정적 동기죠.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있는 것 같아요.}

세연에게 있어선 박 교수나 타티아나가 바로 그런 긍정적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세연은 부모님보다 두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더 크게 느꼈다.

조금만 잘하더라도 칭찬해 주실 부모님과 달리 음악가로서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인정은 받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데릭은 이어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얕보거나 무시하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집중하게 되는 부정적 동기죠.}

그 말을 듣자마자 세연은 데릭이 왜 이 이야기를 길게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연은 조금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 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건 완성해서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기도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라는 걸 안 뒤로 그의 진의를 캐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이다.

데릭은 대충 알겠다는 듯 웃었다.

{청중을 두고 공연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그런 동기는 무척 중요하죠. 그러나 부정적 동기는 조금 비뚤어지면 금방 악화되는 일이 잦습니다.}

{……그렇겠죠?}

{그러니 가급적 부정적 동기를 앞세우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노장의 조언입니다.}

더 반항하지 않고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의 말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얌전히 수긍한 세연을 두고도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세연이 시작한 상황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데릭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르네스트에게도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작곡가께서도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에르네스트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슨 협조 말이죠?}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정적 동기 말입니다.}

{그걸 제가 왜…….}

쓸데없이 엮지 말란 투가 역력하게 느껴졌지만 데릭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냉정한 어투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멋지게 곡을 펼쳐 낸 연주자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 부정적 동기를 유발하는 원인을 일부러 제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비단 세연 양뿐만이 아니라 모든 파이널리스트에게 말입니다.}

국립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한마디는 묵직했다. 아무리 인정받은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열일곱 살짜리가 거기에 대응하긴 어려웠다.

세연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혼내 주세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세연을 힐긋 바라본 에르네스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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