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59화 (1,259/1,277)

##  1259화

사실 세연은 에르네스트에게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나가기 힘들었다.

팔에 부상을 입고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사람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르네스트는 숨을 고르지도 않고 작곡가로서 다시 일어서서 세계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 섰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연은 에르네스트를 존경했다. 주관적으로 보든 객관적으로 보든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나보다는 너한테 훨씬 더 똑똑한 계획이 있겠지…….’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 섰을 때 세연은 그에게 반항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어떠한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의무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상상 이상으로 엄격한 사람이었고, 그 태도에 타티아나는 크게 상심한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날을 바짝 세우던 모습에 세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만 있을 때 타티아나를 살살 달래기도 했다.

세연은 에르네스트가 미움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편곡으로 도발하는 자존심 싸움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결론적으로 잘된 건가……?’

에르네스트의 고집이 너무 세서 그걸 꺾는 건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데릭이 세연의 편을 들고 서자 구도가 확 기울어졌다.

데릭은 벨기에 최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고 세연과 에르네스트의 나이를 합한 것보다 더 나이가 많다.

수십 명의 프로 연주자를 다뤄 온 이 노련한 베테랑에게 열일곱 살짜리 꼬맹이들을 다루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임세연 양은 음악을 훌륭하게 연주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높은 향상심으로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다시 한번 데릭은 세연을 칭찬하며 슬쩍 압력을 주었다.

{작곡가님은 하실 말씀이 정말 없으십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니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옆에서 쫑알거리면서 한껏 거들고 싶었지만 세연은 에르네스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되레 정반대였다. 정말 안타깝고 동시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에르네스트도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열어 주길 바라며 보고 있자,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전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어야죠.}

{그러게요…….}

데릭의 냉정한 한마디에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로 하나도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제 나름대로의 타협이었는데 이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에르네스트가 작곡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마치 완성된 작곡가처럼 굴고 있었지만 사실 미련도, 불안정한 부분도 남아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반성의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슬그머니 세연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부정적 동기도 동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강요해선 안 되는 거겠죠.}

그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세연이 왜 무리해서 도발을 감행했는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이어 에르네스트는 문 쪽에 서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후 방침은 제가 나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직원들은 고개만 까닥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가만 보아하니 에르네스트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규칙은 딱히 없는 듯했다.

콩쿠르의 목적은 공정한 경쟁에도 있지만 12명이 선보이는 화려한 퍼포먼스 역시 중요하니 작곡가가 적당한 영향력을 끼쳐서 전체의 퀄리티를 상승시킨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말해도 좋은 것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을 텐데…… 에르네스트는 그냥 스스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물론 첫 리허설 만에 세연을 만나 깨어지고 말았지만.

{저도 입장이란 게 있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죠, 당연히.}

{……그래도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임세연 양.}

{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깍듯한 경어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곡가와 파이널리스트라는 관계는 무조건 지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세연에겐 지금 이 상황도 감지덕지였다.

일단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고 이야기하기로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세연은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냈어, 타티아나!’

아마 이후 다른 파이널리스트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을 테고, 타티아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사람이 불필요한 알력을 겪지 않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에르네스트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세연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으나 그도 프로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담백하게 연주를 평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한다.

{연주는 좋았습니다. 템포도 잘 지켜 주셨고, 오케스트라에 기대지 않고 앞장서서 연주하셨죠. 첫 리허설부터 이런 대단한 걸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집중해서 많이 준비하신 것이 느껴지더군요.}

{그…… 어, 감사합니다.}

{지휘자님에 이어 저 역시 찬사를 보냅니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한 칭찬이어서 세연이 되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완전히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분명 칭찬이긴 했지만 디테일이 약간 모자랐기 때문이다.

세연이 이 곡의 연구에 쏟아부은 시간과 신경을 생각하면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 손해가 아니었다.

{저기, 전  3악장의 해석에 꽤 공들였는데요. 이게 맞는지…….}

{제가 듣기로 임세연 양의 해석은 올바릅니다. 방향성과 이미지가 맞다면 구체적일 필요는 없겠죠. 읽어 내신 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더 깊게 이야기하지 않고 딱 잘랐다. 세연은 콩쿠르 측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의 턱에 걸쳐 있음을 직감했다.

작곡가가 약간 힌트 같은 걸 줄 순 있지만 그 이상으로 레슨에 가까운 지시를 할 순 없는 것이다.

세연은 어느 정도 납득하면서 잠시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3악장에서 세연이 느낀 건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동물과 동시에 초월적인 신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건 굉장히 상반되는 이미지들이라서 뭔가 하나로 조합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빠진 퍼즐 조각을 찾으면 이미지를 표현하기 훨씬 쉬울 것 같은데, 세연으로선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편곡은 진심이었습니까?}

{네?}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것 말입니다.}

삐딱한 에르네스트의 물음에 세연은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라도 좋으니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세연이 도발했던 것을 에르네스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칭찬했던 것이 무색하게 에르네스트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별로였습니다. 다신 그런 연주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울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연은 그의 말에 약간 농담조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랬어요? 아무 말 없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용케 참고 있었네요?}

{너무 엉망이라 무어라 하고 싶은 말도 없더군요.}

적당히 받아치자 에르네스트는 다시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상으로 무어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일단 편곡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세연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 그 정도로 엉망이었나……?’

살짝 충격이기도 하고, 작곡과 즉흥 연주도 따로 공부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에르네스트가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아무튼…… 이제 만족했습니까?}

{네. 기분 좋은데요?}

{……저만 손해 본 것 같군요.}

에르네스트는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살짝 썼다. 그 목소리엔 세연을 탓하는 투가 역력했다.

{덕분에 앞으로 볼 11명에게도 똑같이 피드백을 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아무 조언도 하지 않는 방침으로 세연의 순서를 넘겼다면 그다음부턴 형평성을 이유로 더더욱 그 방침이 굳건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연에게 이미 이만큼 이야기를 해 버렸다면 그다음도 똑같이 해야 한다.

세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게 제가 바라던 건데요?}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연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

오늘은 뮤직 샤펠이 내내 조금 어수선했다.

4명의 파이널리스트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리허설을 하는 날이라 하스-테이헨 스튜디오에서 계속 리허설이 진행 중이었고, 자연스레 주변을 지나다니다 보면 거기에 신경이 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첫 순서로 리허설에 들어간 세연이 걱정되어서 혼자 연습도 똑바로 하지 못하고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즈음엔 세연을 찾아 카페 근처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다행히 리허설을 끝낸 세연은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달려와선 1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 정말요?}

세연은 내가 놀랄 것이라 이미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아니, 분명 피드백 없이 심사 같은 걸로 보라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라면 분명 모든 연주자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버벅거리고 있자 세연이 이어 말했다.

{정말 한마디도 안 하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휘자님이랑 같이 혼내 줬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난 세연을 붙잡아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었다.

에르네스트의 태도는 내 예상대로였다. 단지 세연의 행동 수위가 내 예상 이상이었을 뿐이다. 아마 에르네스트도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으리라.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니 상황이 이해가 갔다.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군요.}

{그렇지? 그런데…… 타티아나?}

{예?}

{왜 그런 얼굴이야……? 화났어?}

혼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세연이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세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히 건드렸던 거야?}

{아,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세연이 한 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정말?}

{당연하죠! 저도 그에겐 하고 싶은 말이 많은걸요.}

진심이었다. 지금도 난 이틀 후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해서 생각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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