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0화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뮤직 샤펠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지만 우리가 서야 할 무대의 크기는 서서히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받으러 레스토랑에 나온 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살짝 엿들었다.
{오늘은 리허설 누구지?}
{렌스키 비소츠키, 루카 아르젠토, 레베카 뒤세, 알레한드로 페테르손. 이렇게 네 사람.}
지금 뮤직 샤펠에서 가장 관심 있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당연히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를 대동하여 하루 4명씩 진행되는 리허설이었다.
어제 리허설했었던 네 사람 덕분에 대부분의 정보는 이미 풀려 있는 상황이었다.
{어젠 리허설 괜찮았다던데.}
{오케스트라가 역시 좋았다고 했었지?}
{그것도 그건데 작곡가가 직접 와서 페이지 터너를 해 주고 살짝 조언도 해 줬대.}
{진짜?}
{나도 레이한테 들은 건데 친절하게 잘 말해 줬다고 하더라고. 꽉 막힌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가 오갔다.
우리가 기억하는 에르네스트는 분명 작곡가와의 대담 자리에서 우릴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가까운 곳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 주었다는 것에 대해 모두들 신선한 충격을 느낀 듯했다.
원래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가까이에서 악보만 넘겨 주었을 것이고,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겠지.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에서 딱딱하고 오만한 에르네스트의 태도는 더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해 준 것 때문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심지어 친절하다는 평까지 듣는 것을 보며 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나스타샤.”
“응?”
“어떻게 생각해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어떻게 생각해?”
“에르네스트 말이에요.”
“자기 곡에 대해 입 다물고 있던 그 애가 갑자기 입을 열기 시작한 거?”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이 없으니 심심하다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주변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지금 오가는 평가에 대해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처음 이 콩쿠르에 참가를 결정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상당히 반대했다고도 들었고…….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르네스트에 대해선 나보다 할 말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지금 생각해 봐야 별수 없지 않겠냐는 듯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진 거 아니겠니?”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음…… 타티아나. 네가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그 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애였어. 이번엔 엄격하게 구는 걸 하고 싶었던 것뿐이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에르네스트는 파이널 의무곡 작곡가라는 위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때문에 규칙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이고, 그 선택에 앞서 예상할 수 있는 부분들을 미리 생각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에르네스트는 모든 걸 다 예상하고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떠나기 직전까지 거리를 두며 모든 것을 숨긴 거고.
그게 그의 선택과 책임이라면 내가 안절부절못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냥 그와 승부한다고 생각하고 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조차 아나스타샤는 꿰뚫어 보았다.
“그런데 자기도 하다 보니 힘들었겠지. 그렇지 않겠어?”
무의식중에 가라앉아 있던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과연 에르네스트가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정말 자기애와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렇다기에 그는 저번 대담에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논조로 이후 일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난 그런 에르네스트의 고뇌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자각을 하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달라질 건 별로 없을 거야. 모든 파이널리스트에게 비슷한 이야기나 할 테고, 너나 나나 그 애한테 친한 척할 수도 없을 테니까 똑같지.”
“……그건 그렇네요.”
“그러니 일단은 음악에만 신경 쓰자. 우리가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결국 음악밖에 없지 않겠니?”
음악가들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말 중 가장 명료한 건 음악뿐이라는 주장은 내가 평소에 매일같이 하던 것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내가 할 말을 대신 가져가서 해 버렸다. 난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냥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편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세연이 정면에서 에르네스트의 고집을 꺾어 놓는 바람에 그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파이널리스트로서만 취급하며 대해 줄 것이다. 어쩐지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이해심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나…….’
사실 이해심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내가 그에게 무언가 더 바란다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는 결코 날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날 경어로 대한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항상 그를 거리감 있는 경어로 대했으니까.
기껏 조금 차분해졌었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잠시 혼자서 생각하는 사이 웨이터가 우리가 주문한 요리들을 가지고 와 세팅해 주었다. 아나스타샤는 별 생각이 없는지 포크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파스타에 집중해야 할 때고.”
일단 먹는 게 우선시되어야 그다음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컨디션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내 평소 주장에 부응하듯 아나스타샤는 앞에 놓인 파스타를 크게 말았다.
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렀다.
“있잖아요, 아나스타샤.”
그녀는 입에 가득 파스타를 문 채로 눈만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선 왜 부르냐는 의문만이 보였다.
난 지금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아무렇지 않지는 않을 것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에르네스트가 아무 고민 없이 이곳에 작곡가로 지원하지 않았을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그의 일을 알고도 콩쿠르 참가를 결정한 데엔 분명 깊은 고민과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우야.”
불만스러운 투로 아나스타샤가 웅얼거렸다. 미안하게 되었지만 아직 정리도 안 된 질문들을 마구잡이로 꺼낼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파이널리스트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가 어떠한 결실을 얻는 데에 난 최소한 방해가 되지 않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앞에 있는 파스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하루가 더 지나 금요일이 되었다.
물론 한 주의 마무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서 파이널리스트들의 생활이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되레 더 바빠질 뿐이다.
특히 난 오늘 정말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었다.
아침 연습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 마리우스가 방으로 찾아와선 일정을 브리핑해 주었다.
{오늘은 오후 4시에 오케스트라 협연 리허설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오케스트라 리허설의 마지막 그룹은 타츠야, 앤서니, 아나스타샤 그리고 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뒤 내일부터는 다시 세연을 필두로 시작되는 첫 그룹부터 두 번째 리허설이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면 파이널 라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연부터 두 명씩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일정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난 뮤직 샤펠에 마지막까지 남게 되겠지만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 있을 리허설은 정말 중요했다.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서만 연습했었던 의무곡을 드디어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작곡가님도 오시는 것 맞나요?}
{음…… 맞습니다. 모든 리허설에 참관하신다고 나와 있군요. 그리고 저희 쪽 가이드라인에 맞추어 적당한 조언도 해 주신다고…….}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일부러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늘 그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전혀 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무적으로 날 대할 그에게 맞춰서 똑같이 표면적인 음악 이야기나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낼 생각을 하니 그건 그것대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이런저런 망상을 하고 있는데 마리우스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다시 자세히 확인하더니 웃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인 것 같군요.}
관심? 어디에?
나도 모르게 바로 되물을 뻔한 질문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지금 마리우스에게 더 말해 봐야 소용없었다.
일정을 확인시켜 준 마리우스가 물었다.
{이외에 다른 문의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딱히 없을 것 같네요. 4시 전까진 연습하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점심 즈음엔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마리우스에게 있어서 난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닐 터다.
어지간한 건 혼자 알아서 하고, 컨디션 관리도 잘하고, 불만도 별로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연습으로 보내니까.
하지만 난 작곡가에게 있어 얼마든지 까다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연주자였다.
마리우스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서서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피아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