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1화
하루 종일 연습에만 집중하면서 난 한 번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점심도 마리우스에게 부탁해서 샌드위치를 받아먹었다.
마리우스는 일정을 알려 주거나 편의를 돕곤 했지만 난 그래도 그를 내 비서처럼 취급하진 않으려 했다.
그의 본직은 콩쿠르 직원으로서 날 감시하는 것이니 되도록 서로 귀찮은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연습만 하고 싶었기에 그에게 부탁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 수양일까…….’
예전부터 난 머리 아픈 일이 있으면 버릇처럼 피아노 연습에 매달리곤 했다. 바흐를 치다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아노 건반으로 모든 걸 찍어 누르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의 난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가능했다.
덕분에 피아노 연습은 문제를 해결하는 망치가 아니라 심란한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진정제에 가까워졌다.
매일같이 하던 걸 하면 일단 생각을 조금은 덜하게 되니까.
물론 본격적인 곡 연습에 들어가게 되면 악보를 읽고 그것을 해석하며 피아노로 연주하고, 들려오는 소리를 다시 분석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정밀하게 조정하는 등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가게 되지만 일단 심적으로는 무언가 하고 있을 때가 편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그리고 오후에 이르기까지 피아노를 붙잡고 밀었다 당겼다 하고 있자니 마리우스가 다시 찾아왔다.
{리허설 시간이 되었습니다, 베르체노바 님.}
난 피아노를 놓고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준비는 다 되신 것 같군요.}
마리우스는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리허설에 갈 준비가 된 상태인지 체크하는 듯했다.
이미 난 1시간 전부터 리허설을 염두에 두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묶었다.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이고 다른 누굴 만나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리우스는 복도로 날 안내했다. 그를 따라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1층 중앙에 있는 하스-테이헨 스튜디오였다.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마리우스가 멈추어 섰고, 난 멈추지 않고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안엔 이미 수십 개의 의자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위한 형태로 세팅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앞에 있던 중년 남성이 날 보더니 일어나며 몇 걸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보자마자 그가 지휘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나 역시 먼저 그에게 가선 악수를 받았다. 짧게 손을 몇 번 흔들며 그가 인사했다.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데릭 잔트입니다. 베르체노바 양 맞으시죠?}
{맞아요. 정식으로 소개드릴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입니다.}
{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이미 앞서 11명이나 되는 파이널리스트들이 데릭을 거쳐 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익숙하기도 하고 약간은 지겹기도 할 텐데, 일단 겉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에선 전혀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데릭의 눈엔 오로지 호기심과 기대감만이 엿보였다. 어쩐지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미파이널 무대에서의 연주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베르체노바 양.}
{아…… 감사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그렇게 깔끔하게 완성해 낸 피아니스트는 정말 드물죠. 제가 지금껏 살면서 본 사람을 떠올려 본다 하더라도 손에 꼽습니다. 정말 좋은 연주였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초면인 음악가에게 칭찬을 받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그게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면 조금 무게감이 다르다.
갑자기 극찬에 가까운 칭찬 세례를 받으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겸손하게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답하는 것뿐이었다.
그 후로도 데릭은 한참 말이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건 바로 시간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내게 양해를 구했다.
{그나저나 15분 전인데 휴식하러 가서 안 온 단원들이 조금 있군요. 조금 기다려 주시면…….}
{기다릴게요.}
{브리짓! 부탁 좀 함세.}
빠르게 뒤편을 향해 말하자 한 여성 단원이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을 얼른 불러오려는 모양이다.
잠시 단원들을 기다리는 사이 난 에르네스트를 찾아냈다. 그는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왜 작곡가가 그런 곳에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결국 눈이 마주친 그는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무슨 의미인데?’
갑자기 불쑥 짜증이 났다. 이미 다 알지 않냐는 듯 사인을 주는 것 같아서 심히 신경에 거슬렸다.
난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란 태도만 굳건하니까.
이 상황에서 대체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렇게 마치 무언가 통한다는 듯 눈짓을 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내가 잔뜩 노려보고 있자 지휘자 데릭이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에르네스트 쪽을 향해 말했다.
{거기서 그러고 계시지 말고 이리 와 인사하시죠.}
{……예.}
의외로 순순히 에르네스트는 데릭의 말에 따랐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대충 앉은 그는 여전히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젠 대화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렇게 보니 얼굴색이 나쁘진 않았다. 팔이 더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럭저럭 잘 지낸 모양이다.
답답했던 마음속에서 치솟는 말들이 몇 있었지만 모두 꾹 눌러 참았다. 간신히 이렇게 가까워졌다.
괜한 말을 꺼내서 그를 다시 떨어뜨려 놓는 바보짓만은 피해야 했다.
난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내 인사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는지 에르네스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난 멈추지 않고 물어보았다.
{작곡가님은 리허설에 쭉 참관 중이신 거라고 들었어요.}
{예.}
{곡에 애정이 많으신가 봐요? 아니면 그걸 연주할 연주자들에게 흥미가?}
기본적으로 콩쿠르 측에선 작곡가에게 리허설 참가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이유가 없고서야 지금까지 12회나 되는 리허설에 모두 참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에르네스트의 이유는 어느 쪽에 있을지 궁금했다.
곡에 대한 애정도 분명 있겠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완성해서 내려놓은 곡은 무대에서 진가를 드러내길 믿고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툭 내뱉었다.
{그건 보면 알겠죠.}
{……예?}
에르네스트는 대답해 주지도 않고 그냥 다음 이어질 말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조금 가라앉으려 했던 짜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사이 밖으로 나갔던 단원이 다른 단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직 시간은 5분 정도 남았지만 모든 사람이 갖춰진 걸 확인한 데릭은 일찍 리허설을 시작하려 했다.
어차피 시작부터 정확히 1시간을 직원들이 잴 테니 언제 하든 상관없긴 했다.
{다 모였군요. 시간도 다 되었고…… 그럼 베르체노바 양,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준비되었어요.}
{그럼 기초적인 협의부터 진행하죠.}
협의 사항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내가 곡을 얼마나 완성했는지에 따라 연습 강도를 정하는 것 정도였으니까.
난 곡 전체를 인 템포로 연주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왔으므로 사실 오케스트라와 조율할 사항도 별로 없었다.
이후는 음악으로 서로 봐 가면서 해야 할 일이었다.
데릭은 흡족한 듯 웃으며 물었다.
{악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은 악보도 필요 없었다. 악보를 외우는 내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젠 처음 보는 곡들도 며칠이면 외워 버리고, 몇 달이나 안 친 곡들도 연주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기억력이 좋아졌다기보다 음악을 이해하고 내재화하는 루틴이 보다 견고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난 거짓말을 했다.
{죄송해요. 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아직 암보를 다 못 했거든요.}
{죄송하실 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다 외우겠습니까? 보고 하시죠. 직접 넘기시겠습니까?}
데릭은 역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껄껄 웃으며 이어 물었다. 난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게 조금 힘들어서……. 제가 듣기로 작곡가님이 도와주시기도 했다고 들었는데요.}
지금까지 악보를 외우지 못한 연주자들은 에르네스트가 페이지 터너를 자처하여 도와주었다고 한다.
무척 편안한 도움이었다면서 레베카가 신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었다.
난 싱긋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청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저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전 협의가 완료되고 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에르네스트도 피아노 옆에 와서 접이식 의자를 펼쳤다.
그가 앉자 이젠 정말 숨소리가 옆에서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난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정말 몇 달 만이었다. 그사이 그는 조금 더 자란 것 같았다.
나란히 앉은 채 잠시 그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에르네스트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난 그에게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좋네요, 에르네스트.”
{영어로 말씀하시죠.}
{손 닿는 거리인데 계속 그렇게 말할 거예요?}
난 순식간에 팔을 뻗어 그의 뒷목을 감아 당겼다.
내 힘으로 에르네스트를 끌어당기는 건 어림도 없었겠지만 방심한 에르네스트는 꼼짝도 못 하고 내 코앞까지 끌려왔다.
그를 앞에 둔 채 나는 작게 속삭였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거야? 나도 그래.”
물리력으로 그를 잡아 두는 건 잠시뿐이겠지만, 난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