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2화
우리의 입장은 극명하게 차이 났다.
나는 12명이나 되는 연주자 중 1명으로서 심사에 도전하는 입장, 에르네스트는 심사에 쓰일 기준을 제공하는 작곡가의 입장이었다.
우리 사이는 콩쿠르의 시스템 자체가 그야말로 거대한 벽으로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난 지금껏 에르네스트와 대화다운 대화 한 번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만든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난 무척 혼란스러웠다. 에르네스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다가도 그 진의를 모른 채 무턱대고 연주자로서 따라갈 순 없었다.
그나마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건 그가 내어 준 음악뿐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읽어 낸 것인지 불분명했다.
모든 것에 확신이 없고 불안했다.
콩쿠르 결승이라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이런 마음으로 임해서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리 만무했다.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낚아챘다. 상황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
일단 저질렀다.
내 왼팔에 목을 감긴 에르네스트는 벗어나려는 듯 들썩이다가 내가 힘을 조금 더 주자 조용해졌다.
내 힘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지금 날 뿌리치고 소란이 생기면 뒤에 있는 직원들과 오케스트라가 우릴 지금보다 더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는 걸 안 모양이다.
물론 지금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다.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우리가 이 상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몇 초 정도일 것이다.
중요한 건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의 진의를 듣는 것이었다.
그도 아니면…… 그냥 믿고 따라와 달라는 말만 해 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난 빠르게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먼저 앞서 계획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면서 심심하진 않았니?”
“타티아나…… 이거 놓…….”
“아닌가? 기쁘니? 내가 잘 올라와 줘서 기쁜 거구나.”
지금 내가 그의 계획을 모두 망쳐 버릴지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데도 그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화를 내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이성적이라면 일단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봐도 될 것 같았다.
난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도 기뻐. 네가 작곡가로서 성과를 거둔 것이니 축하해야 할 일이지.”
“…….”
“그런데 수많은 작곡 콩쿠르를 두고 여기서 우리가 마주한 것에 대해 난 많은 의문이 들어.”
난 조금 더 에르네스트 쪽으로 무게를 옮기며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응?”
에르네스트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게 내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난 그의 최고의 라이벌이자 연주자로서 움직일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
곡을 발표하고 싶다면 이런 공개된 곳에서 심사를 거칠 필요 없이 내게 개인적으로 맡겼더라도 무엇이든 다 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나에게 맡기는 대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시스템을 택했다.
확실한 길을 두고 일부러 불확실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건 내게 큰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난 앞선 에르네스트의 뒷덜미를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번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하다.
지금 난 앞선 에르네스트의 뒷덜미를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시스템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번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하다.
‘지금 몇 초 흘렀지?’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이러다가 지쳐 물러나길 기다리는 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약간 조급해졌다.
“왜 가만히 있니? 모처럼 이렇게 가까운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
난 뱀처럼 고개를 더 내리면서 그를 밑에서부터 올려다봤다.
그런데 간신히 확인한 에르네스트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건 당혹도 분노도 아니었다.
“놔…….”
빨갛게 물든 그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 너머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짧게 마주친 눈빛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는 내가 강제로 그에게서 끌어낸 감정의 편린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옆으로 튕겨 나가듯 팔을 놓고 물러섰다.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손을 들어 목을 문질렀고, 난 그가 그리 치밀한 계획 같은 것 없이 어쩌면 무작정 이곳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예상했던 냉철하고 독선적인 작곡가 에르네스트는 없었던 것이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베르체노바 양.}
갑자기 붙었다가 떨어진 우리가 이상해 보였는지 데릭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시간이 워낙 짧으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 아뇨? 전혀.}
문제는 없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작곡가 지원을 했든 간에 일단 심사를 통해 곡이 선정된 건 달라지지 않고, 또 그의 곡은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으니 난 그 가치를 제대로 세상에 선보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신 상태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잠깐만…….’
멋대로 군 건 나지만 잘해야 하는 것도 나였다. 지금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잠깐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깊게 심호흡하면서 곡에 집중하려고 해도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의 숨소리가 신경 쓰였다. 좀처럼 내 호흡에 집중이 안 된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시죠.}
{저기…….}
{말씀하시죠.}
{물 한 잔만 마시고 해도 될까요…….}
오케스트라가 활을 쥐고 언제라도 음악을 시작할 준비가 된 이 상황에서 갑자기 물을 마시겠다고 하는 건 약간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데릭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역시 리허설은 긴장되죠?}
{아하하하하…… 긴장되네요…….}
난 떨떠름하게 따라 웃었다.
살면서 리허설은 물론이고 무대에서도 긴장다운 긴장을 별로 해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이 자리를 떠나서 진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창피함과 자책, 의무감 등을 안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에르네스트는 내 쪽을 보지 않고 먼 창만 보고 있었다.
***
물을 마시고 세수까지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서 참았다.
‘미쳤지.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연주자들은 주어진 타이밍에 손을 뻗는 것에 익숙하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손을 뻗은 것 역시 기회를 잡고자 하는 본능적인 충동에 가까웠다.
난 평소 충동을 잘 컨트롤하는 편이지만, 반대로 컨트롤을 잠시라도 놓으면 금방 충동에 휩쓸리는 성격이었다.
이번엔 나름대로의 이유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움직였던 것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후회가 들었다.
확실히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건 결과가 엉망진창이다.
“하…….”
복도에 잠시 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그를 붙잡았다가 놓아 버린 데다가 도망까지 나와 버렸다.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 내겐 기회가 남아 있었다. 물리적으로 더 잡을 수 없다면 다음은 음악으로 붙잡으면 된다.
다시 한번 길게 심호흡한 나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연주를 앞두고 긴장하는 건 역시 베르체노바 양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군요. 약간 인간적인 일면을 본 것 같아 좋았습니다.}
인간인 내가 인간답지 않으면 뭐란 말인가 싶긴 했지만 일단 깊게 생각할 여유 같은 것도 없어서 난 바로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 에르네스트도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살짝 인상을 쓰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를 바라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난 어깨와 목을 살짝 푼 다음 곧바로 악보를 눈에 담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곡을 짜임새 있는 구조로 만드는 데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젠 평가의 자리에 내놓을 순간이었다.
‘난…….’
솔직히 말하자면 다음 주에 있을 결승에서 우승하고 열일곱 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제패한 천재로 불리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건 당장 명성이 필요한 알레한드로 같은 사람이 해 주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곡에 대한 평가만큼은 내가 1등이 되고 싶었다.
앞서 연주한 11명의 사람들이 어떤 연주를 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듣자마자 알겠지. 내가 그 사이에서 몇 등 정도일지.
‘자신이 있진 않아…….’
여전히 난 에르네스트를 잘 모르겠고, 지금껏 봐 온 그의 곡들과 달리 이번 곡은 협주곡인 데다가 현대곡이라서 해석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그와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다 안다고 자신할 순 없는 것이다.
내가 연주하는 곡이 에르네스트가 의도하는 소리를 얼마나 재현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날 묵묵하게 바라보는 에르네스트의 눈빛에선 약간의 신뢰가 느껴졌다.
난 그가 어떤 작곡가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어떤 연주자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건 약간 기쁘면서도 괘씸한 일이었다. 난 입을 여는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
1악장은 마음처럼 안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2악장, 3악장에 이를수록 내 연주는 점점 더 정밀해졌고 끝부분에 다다라선 거의 원했던 그대로의 연주를 해낼 수 있었다.
‘좀 더 손을 풀고 할걸.’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했더라면 처음부터 잘 해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에선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연주를 마치고 나니 이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뭐지?’
뒤를 돌아보니 데릭이 턱을 짚고 고민하며 날 바라보았다.
{음…….}
그렇게 연주가 엉망이었나? 적당히 피드백할 말을 골라야 할 정도로?
일단 내가 연구한 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자 조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슬쩍 눈치를 보면서 평을 기다리고 있자 데릭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전 종종 역사가 멈추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예?}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설명을 이었다.
{천재들은 모두 과거에 있고 우린 그림자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그 시점에 박제되어 버렸으니 박물관에나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그 가치가 보존이 되긴 할 테니까요.}
데릭은 말하면서도 웃긴지 피식거렸지만,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무거웠다.
하지만 데릭이 이렇게 길게 암울한 이야기를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가끔, 역사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천재들이 등장하곤 하니까.}
난 계속 다가오는 데릭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때 옆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었다.
이번엔 목을 감는 게 아니라 머리를 한 대 때려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