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63화 (1,263/1,277)

##  1263화

내가 하려고 했던 건 그저 에르네스트를 이 자리에서 음악으로 붙잡는 일이었다.

음악으로 사람을 휘둘러 사로잡는 일은 그전부터 자주 해 왔던 일이다.

물론 이번엔 그렇게까지 자신 있는 곡은 아니지만…… 그를 납득시키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를 보이는 것으로 충분히 내가 원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 연주에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에르네스트가 아니라 지휘자 데릭이었다.

난데없이 역사가 어쩌니 하는 말도 안 되는 극찬을 받은 난 황망해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에르네스트는 자기 일 아니라는 듯 웃고만 있고…… 너무 당혹스러웠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보고만 있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데릭이 우뚝 멈춰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악수 부탁드립니다.}

{아, 예…….}

난 그제야 간신히 일어나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전에도 지휘자들과 서로 경의를 표하며 악수한 일은 많았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달랐다.

악수한 손을 두어 번 흔든 데릭은 내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옆으로 돌렸다.

{작곡가님도.}

{앞서 열한 번이나 그냥 했었는데 이제 와서요?}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자기 눈앞에 손이 내밀어지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번이 첫 악수 요청인 모양이다.

하지만 데릭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열두 번 만에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하는 건 흔한 일이죠. 이제 확신이 섰습니다. 분명하게 파이널 라운드에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무거운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데릭은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을 인정하지 않고 그 잠재력이 어디에 미치고 있는지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두 번의 리허설 끝에 데릭은 이 곡을 인정했다.

심사 위원이 아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곡을 연주해야 할 오케스트라의 대표가 에르네스트르를 인정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손에서 이루어진 연주라는 사실이 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축하드려요.}

난 진심을 담아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그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한 번 만에 인정받은 베르체노바 씨야말로.}

깍듯한 경어에서 반항기가 느껴졌다. 오늘 내가 에르네스트를 많이 당혹스럽게 만들긴 했지만, 그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삐딱한 그의 태도를 보며 난 방긋 웃기만 했다. 이 정도로 그만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그걸로 끝은 아니겠죠?}

{무슨?}

{다른 연주자들에겐 진득하게 피드백을 해 주셨다고 들었는데요.}

이미 11명에게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 나도 정당하게 그의 평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아차 싶었는지 옆에 있는 데릭을 힐끔 쳐다보더니 변명조로 말했다.

{그런 건 필요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해요.}

아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딱 잘라 말했더니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가 작정을 하고 이곳에 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듯했다.

그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귀찮게 굴려면 얼마든지 더 귀찮게 굴 수도 있다. 지금 난 딱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만큼만 원하고 있었다.

더 압박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서 가만히 기다리니 이윽고 에르네스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번지르르한 찬사 같은 걸 했다간 화를 내실 것 같고…… 그러니 아예 솔직하게 물어보도록 하죠.}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반격의 실마리라도 잡았는지 날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제 곡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의도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질문은 참 교묘했다.

질문 자체는 색다를 것 없었다. 리허설을 끝마친 후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그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해석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 일단 연주자의 의견을 들어 보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이건 연주자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무런 관계 없이 순수하게 음악적으로만 만났을 때 성립할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건 아까 내가 그의 목을 감으며 뭘 원하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던 것에 대한 반격이었다.

진의를 듣고 싶다면 먼저 내 뜻부터 밝히고 보라는 듯한 거만한 태도다.

‘그러면 내가 긴장이라도 할 것 같았어?’

아마 다른 작곡가에게 이런 질문을 들었다면 당황했을 것 같다.

아무리 탄탄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옳다고 무조건 주장할 순 없을 테니 상당한 신중을 기해서 말해야만 했겠지.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작곡가는 에르네스트다. 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쌓여 있어서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말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베르체노바 씨?}

에르네스트는 마치 이겼다는 듯 독촉했다. 난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생각한 대로 내 템포에 맞추어 말했다.

{글쎄요……. 선형적인 난이도는 성실하고 침착함을 담아 낸 것 같았지만, 막상 분석을 해 보니 난해한 탐미주의가 드러났죠.}

{……음? 그래서요?}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을 택하고, 쉬운 길을 구태여 복잡하게 가려는 경향이 있는 걸로 보아 상당히 배배 꼬인 성격인 게 아닌지…….}

{……예?}

{아마 원하는 것은 연주자들의 고통과 고뇌를 맛보려는 가학성의…….}

{잠깐, 잠깐만.}

난 곡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가 작곡가에게 말하는 듯 왔다 갔다 하며 말의 중심을 움직였다.

어차피 카페인에 취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실컷 했던 말들이고, 좀 전에 에르네스트를 붙잡고 잔뜩 도발하기도 했으니 이제 와 못 할 것은 없었다.

대놓고 신랄하게 말하자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옆의 데릭과 뒤의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모두 얼어붙었다.

내가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살짝 기분이 고양되기도 했다. 이상한 재미를 느껴 버릴 것 같다.

{진정하시고…….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베르체노바 씨.}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에르네스트는 웃음을 흘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나섰다. 난 고개를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다.

{이런 걸 재미있어하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친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진담입니까?}

{그럼요.}

{전부?}

{사실 아직 덜 말했어요. 도중에 멈추게 하셔서. 더 할까요?}

{……됐습니다.}

더 이상 내게 말의 주도권을 주었다간 수습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내 말을 자르더니 자세를 다시 바꾸어 섰다.

그러고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당황하긴 했어도 수세에 몰린 것같이 보이진 않았다. 그 눈빛에 약간 의아함을 느끼며 마주 보자 그가 말했다.

{그럼 저도 대답을 돌려드리죠. 베르체노바 씨도 똑같습니다.}

이상한 영어 표현이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해 못 했어요.}

{방금 하셨던 말들 그대로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에게 돌려놓아도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유치찬란한…….}

내가 쏟아낸 말들을 그저 반사 한 마디로 끝내려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날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 따지려던 순간, 그가 한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적확한 단어들을 사용해 설명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가 말한 대로 방금 한 말을 내게 돌려 본다면?

성실하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음악의 아름다움에만 모든 신경이 쏠려 있고, 쉬운 길을 가는 법도 없고, 고뇌에 턱 끝까지 잠겨 있었던 적도 있었다.

‘어라……?’

왜 똑같은 것 같지? 바넘 효과 같은 건가?

에르네스트는 말을 잘하는 편이니 절대 그에게 말려들거나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생각을 더듬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웃으며 물었다.

{어려운 상황에 어려운 곡을 드린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만 더 물어보죠. 재미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건 방금 제가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뇨, 곡만 두고 묻는 겁니다. 어땠습니까? 이 정도로 익히기까지.}

난 음악을 놓고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른다.

곡을 받고 연습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하면서 느낀 것들도.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즐거웠어요. 훌륭한 곡을 만나서.}

{그럼 됐습니다. 전 베르체노바 씨가 진지하게 제 곡을 봐 주셔서 기쁩니다.}

에르네스트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듯 이야기를 맺으려 했다. 하지만 난 그의 목소리 끝을 덥석 붙잡았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내려다본다. 난 다시 한번 물었다.

{연주자로서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정말로?}

난 음악으로 그를 휘두르려고도 하고, 신랄하게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경하게 굴려고 해도 내 마음속엔 여전히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단지 콩쿠르 참가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대답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공정함이 중요한 이곳에서 에르네스트가 특별히 몇 명에게 특혜 같은 걸 주는 건 불가능하다.

자꾸만 그에게서 음악 외의 다른 것을 찾으려 하는 내가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눈앞이 조금 더 명료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후 두 번째 리허설 연주가 전체적으로 진행되었고, 다음으로 데릭의 요청에 따라 복잡한 프레이즈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에르네스트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내가 살짝 눈치를 줘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지금은 나도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상황이라서 화를 내거나 할 순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니 덩달아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오늘 에르네스트와 이야기할 기회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직원이 리허설 종료를 선언했다.

데릭이 단원들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사이, 난 멍하니 앉아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에르네스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베르체노바 씨.}

{예.}

{이제 1차 리허설이 모두 끝났으니 저번에 했던 것처럼 파이널리스트분들과 대담을 할 예정입니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르네스트가 다시 만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니 아쉬움이 조금 가셨다. 난 반색하며 물었다.

{언제인가요?}

{오늘 저녁.}

장난하는 건가? 난 다시 정색하고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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