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64화 (1,264/1,277)

##  1264화

리허설 일정은 상당히 바쁘게 흘러간다.

3일 동안 하루 4명씩 진행하여 1차 리허설이 끝나고, 쉬는 날 없이 곧바로 다시 2차 리허설이 시작되는 식이다.

내가 오늘 마지막 순서이니 내일부턴 다시 세연부터 리허설이 시작된다.

2차 리허설까지 마치고 나면 바로 이튿날 본무대에 올라야 하고. 그러니 작곡가가 파이널리스트들을 모두 모아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오늘 저녁뿐이긴 했다.

‘그래도 뭔가 갑자기 결정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런 중요한 것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다니. 오전에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난 오늘 리허설 말고 다른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약간의 의문과 기대감을 안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힘이 쭉 빠져…….’

아무리 편안하게 리허설을 한다고 해도 수십 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다 보면 당연히 긴장하고 피곤해진다.

난 복도로 나오자마자 온몸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도저히 지금은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옆에 보이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축 늘어진 채로 나는 조금 전 있었던 모든 리허설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리허설 자체는 만족스러웠어.’

시간이 없는 만큼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잡는 데에 집중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세세한 디테일은 아무래도 즉흥적인 기량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일단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출중하니 내가 마음껏 날뛸 수 있기도 했고,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보란 듯이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살짝 오버한 감이 없잖아 있단 느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차차 잘 정돈하면 될 일이라 생각한다. 일단 이 정도면 첫 리허설 결과치고는 훌륭했다.

거기다 사람들 반응도 괜찮았다.

‘오케스트라도 만족한 것 같고…….’

데릭의 반응은 과할 정도였고,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어느 정도 납득하고 만족한 듯했다. 그러니 내게 거꾸로 질문을 했겠지…….

“음…….”

마지막에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쏟아 낸 말들을 그는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했고, 난 할 말을 잃었다.

반사 공격이 유치해서가 아니라 너무 예리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도 힘들었을 것이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나니 끓던 마음의 방향성이 흔들렸다.

왜 우리는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일어날까.”

잠시 앉아 있었더니 차츰 몸에 힘이 돌아왔다.

머릿속에 머물고 있던 생각들이 깔끔하게 후련해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난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본관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멍하니 복도를 걷던 나는 얼마 가지 않아 3명의 파이널리스트와 만났다. 앤서니와 레베카, 아나스타샤였다.

세 사람은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순식간에 난 둘러싸이고 말았다.

{베르체노바!}

{리허설 끝났어? 어땠어?}

모두 나보다 먼저 리허설을 마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마지막 순서인 내게 관심이 있을 만했다.

난 옅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요. 속은 조금 편하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게……. 연습한 만큼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중간 결과도 나쁘지 않았거든요.}

일단 이번에 여러 사람의 인정을 받아 냈다는 건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내 해석이 꽤 적절하다는 걸 믿고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확실하다고 막 이야기할 순 없어서 적당히 말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레베카는 탄식을 내뱉더니 하소연했다.

{진짜 너 정도 되니까 그런 말이 가능하지……. 난 진짜 이딴 걸 협연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엄살은. 어제 치는 거 들어 봤는데 충분히 잘하더만.}

{그걸 네가 어떻게 들었어?}

{누가 휴게실에서 치래?}

갑자기 앤서니와 레베카가 맞붙더니 서로 엄살 부리지 말라고 유치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같았다면 당황했겠지만 이젠 꽤 익숙한 광경이라서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는 걸 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남은 건 나와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가만히 날 지켜보는가 싶더니 슬쩍 물었다.

“우리 위대하신 작곡가님과 음악 이야기만 나눴니?”

같은 중앙음악학교 친구로서 아나스타샤도 어지간히 쌓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은근히 비꼬는 그 어투에선 내가 뭔가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난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혹시 때렸어?”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요.”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긴 했지만 실제로 때릴 순 없었다. 말로 때린 것도 때린 건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서 올려다보니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조금 더 내게 가까이 했다.

“난 때렸었는데.”

“예?!”

“그 정도는 그 애도 각오했던 것 같던데?”

기겁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피해 반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귀를 의심하면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너무 오해하진 말라는 듯 웃었다.

나도 솔직히 그녀에게 너무 무어라 할 자격은 없었다. 억지로 목을 끌어당기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은…….

“그……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 아나스타샤…….”

“괜찮아, 괜찮아. 그 애도 웃더라니까?”

“그건 가해자의 변명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요.”

“아무도 못 보게 옆구리를 이렇게 했지.”

“흡.”

갑자기 아나스타샤는 암살자처럼 다가오더니 엄지를 세워서 내 옆구리를 눌렀다. 단순히 누른 것뿐이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뻔했다.

내가 후다닥 물러나자 앤서니와 레베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 하니, 너희들?}

{아뇨, 아무것도.}

빠르게 변명하면서 난 힐난하는 눈초리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도 장난을 친 것뿐이긴 했다. 이 정도면 때린 게 아니라 쿡 찌른 것에 가까울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펄쩍 뛰게 만드는 건 상당히 곤란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양손은 뒷짐 진 채 미소를 지었다. 난 작게 항의했다.

“놀랐잖아요!”

“아하하, 그 애도 놀라더라.”

“정말이지…….”

“어쨌든 그랬더니 속은 좀 편해지더라고.”

그 말에 더 화내려던 마음이 가라앉아 버렸다.

에르네스트와 나는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로 나와 아나스타샤 역시 많이 닮아 있었다.

난 그녀가 장난을 친 것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납득한 내가 차분해지자 아나스타샤는 더 길게 변명하거나 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는지 어깨에서 힘을 풀며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걸어왔었던 신관의 스튜디오 방향이었다.

“다음에 보는 건 2차 리허설 때려나? 그땐 조금 더 센 걸 준비해야겠어. 한 방으론 부족해.”

“아나스타샤, 제발 그만…….”

어떻게든 일단 아나스타샤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득하려던 나는 뭔가 정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라, 그런데 말씀 못 들으셨나요?”

“뭔데?”

“오늘 작곡가 대담 있어요.”

“응?”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비 쪽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여러분에게 저녁 일정에 대해 공지를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일정이요?}

{딱히 없지 않나.}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원은 고개를 살짝 젓더니 이어 말했다.

{방금 전 나온 일정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레스토랑에서 작곡가와의 대담이 한 번 더 있을 예정이오니 부디 모두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일정에서 빠져서 불이익을 보시는 것에 대해선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빠르게 용건만 전한 직원은 이어 가 봐야 할 곳이 있다며 떠났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는 서로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옆으로 밀어 놓고 다들 뭉쳐 머리를 모았다.

{뭐지 갑자기?}

{1차 리허설 끝났으니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건가?}

{그럼 중요한 일이라는 건데……. 아니면 몇몇 연주자를 대놓고 공개 석상에 끌어내어 조리돌리려는……?}

{잔인하네…….}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마구 오갔다. 난 어이가 없어서 웃었지만 에르네스트가 왜 파이널리스트들을 불러 모으는지 이유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

저녁 7시. 레스토랑에 모인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뭐지?}

{나도 몰라. 아까 예상한 바로는 이 자리에서 몇몇 사람을 탈락시킬 거라는…….}

{뭐라고? 그게 말이 돼?}

큰 무대를 앞두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불안한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에서 근거 없는 정보는 마구 증폭되어서 점점 괴상해지고 있었다.

일단 에르네스트에겐 절대 탈락시키거나 할 권한이 없을 뿐더러, 만에 하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폭군처럼 굴 사람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빨리 에르네스트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

에르네스트는 몇 시간 전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레스토랑엔 피아노가 한 대 비치되어 있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바로 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까지의 리허설로 우선 여러분이 어떻게 곡을 이해하고 계신지는 확인했습니다. 기대보다 훨씬 더 잘해 주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절대 그런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짤막한 인사로 찬사를 보낸 에르네스트에게 우린 박수로 답례했다. 우리야말로 좋은 곡을 받아서 에르네스트에게 감탄하는 부분이 많았다.

박수를 받으며 에르네스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번 참관하며 가까이에서 음악을 들어 보면서…… 공통적으로 여러분이 공유하고 계시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말씀드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가 모두의 의문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제목과 부제목을 결정했으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은 느슨했던 모든 파이널리스트의 시선이 갑자기 모두 에르네스트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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