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5화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미발표 의무 협주곡엔 제목이 없었다.
모두 작곡가의 이름을 딴 피아노 협주곡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무곡은 이 콩쿠르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특색이 되었고,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쉬운 제목을 가지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 되었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턴 제목이 붙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예로 1995년의 의무 협주곡의 제목은 안식requiescat.
1999년은 루도비코의 눈물tears of ludovico.
2003년 꿈dreams.
2007년 달과 죽음la luna y la muerte.
2013년 Ea로부터 비롯되다in the wake of Ea.
2016년 나비의 꿈a butterfly's dream.
이렇게 다채로운 제목을 가진 협주곡들이 파이널 프로그램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흐름을 이번에 에르네스트가 한 번 깨 버렸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이다.
반드시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법은 없기도 하고, 사실 연주자들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클래식 작곡가들의 협주곡은 제목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데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없던 제목을 갑자기 붙이는 건 특이한 상황이었다.
파이널리스트 모두가 동일한 의문을 지녔을 때, 알레한드로가 대표하여 질문했다.
{갑자기 제목을 정하신 계기라도?}
에르네스트도 이 상황이 작곡가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듯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갑자기 정한 건 아닙니다. 콩쿠르 측에서도 무제로 두지 말고 제목을 지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저 역시 염두에 둔 제목 후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있진 않았고 또 여러분의 해석을 망칠까 싶어 조금 보류해 두고 있었는데…… 이번 각각의 연주를 듣고 수렴한 결과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맺은 에르네스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곡의 완성에 기여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지한 그 감사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박수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이전에도 에르네스트는 제목을 유보한 채 곡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곡을 쓰는 데엔 거침이 없으면서 거기에 제목을 붙이는 건 상당히 깊게 고민하는 면모가 있었다.
어쨌든 그건 우리에게도 그리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곡의 해석에 조금이라도 힌트 될 것이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제목을 발표해 준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수 속에서 직원들은 바퀴가 달린 화이트보드를 하나 밀고 왔다.
레스토랑에 갑자기 화이트보드가 세워지자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도 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었는데, 직원이 그에게 말했다.
{이곳에 발표해 주시죠.}
{굳이 그래야 합니까?}
{말로만 하면 잘못 전달될 수 있으니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크게 적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레스토랑 입구 쪽에선 이미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곡 제목 발표 현장 자체도 다큐멘터리의 일부로 써먹을 모양이었다.
카메라 렌즈와 모두의 시선을 의식한 에르네스트는 자세를 바로 하더니 마커를 잡고 화이트보드에 큰 필기체로 ewige wiederkunft라고 적었다.
{……?}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독일어 같은데…… 난 독일어를 모르지만 저 단어를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밑에 영문으로 다시 썼다.
영겁 회귀eternal recurrence.
그 단어를 보자마자 난 어디에서 본 것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사상의 근간인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니체 철학을 깊게 파고들거나 하진 않아서 영겁 회귀란 개념을 잘 몰랐고, 심지어 영문 제목을 보고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리커런스가 뭐야?}
레베카가 순진하게 물었다.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기 있는 파이널리스트 중에서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은 미국인인 앤서니뿐이었으니.
에르네스트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거나 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생소한 단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귀란 한 번 벌어졌던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는 손을 들어 허공에 작은 원을 그렸다. 무언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겁 회귀란 이 반복이 영원히 계속됨을 의미합니다.}
{…….}
{하지만 저도 니체의 철학을 명료하게 설명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으니…… 이 대담이 끝난 후 책을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 합니다.}
제목이라는 엄청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의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에르네스트가 내민 제목은 전혀 직관적이지 않았다.
거기에 갑자기 철학이니 니체니 하는 말까지 나오니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쫓기는 예민한 음악가들에게서 좋은 반응이 나올 리 만무한 것이다.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있어 고전 문학이나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사회 문화적 알레고리 위에 성립하는 음악들은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사견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니체의 철학을 인용하여 이해를 도왔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상당한 도움이었다.
{제가 니체를 읽으며 이해한 것과 유사한 설명을 잘해 주는 책이니 읽으시면 해석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듣던 난 에르네스트가 여러 부분에서 타협했음을 느꼈다. 그의 사상이나 관점을 여기서 모두에게 설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때문에 그는 겸허하게 다른 공신력 있는 연구를 빌려 왔다. 그건 그도 부담을 덜고 연주자들도 따라갈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연주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머뭇거리는 흐름이 존재했다.
잠자코 있던 앤서니가 물었다.
{두껍습니까?}
{그렇게 두껍진 않습니다. 200페이지 정도.}
만약 소설이라면 하룻밤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긴 했다. 하지만 어려운 철학 개념은 단 한 장이라도 하루 종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을 우려했는지 이번엔 레베카가 질문했다.
{철학에 흥미가 없으면 불리할까요? 저 머리가 좀 나쁜 편이라서 니체라는 말만 들어도 어지러운데요.}
그녀는 아예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여럿 동조했다.
니체에 관한 책을 읽고 다시 곡을 연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시간도 부족하다.
에르네스트는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떤 곡이든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이해에 유리한 면이 있겠죠. 하지만 그게 결정적이진 않을 겁니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마커를 쥐고 화이트보드를 향해 돌아섰다.
{이어서 부제도 발표하겠습니다.}
영겁 회귀라는 제목 밑에 각 악장별로 지어진 부제가 늘어섰다. 1악장은 낙타camel였고 2악장은 사자lion 그리고 3악장은 어린이child였다.
그 부제가 나오자마자 곳곳에서 탄성이 흘렀다. 조금 전만 해도 꽉 막힌 답답함이 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단번에 많은 것이 해소된 것이다.
다행이라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직관적인 표상이 떠오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와 관계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셔도 좋고, 철학적 용어의 하나로 보셔도 됩니다.}
정확하게 잘 알진 못하지만 낙타, 사자, 어린이. 이 세 가지 개념 역시 니체의 철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난 에르네스트가 단순히 철학적인 개념만 가지고 곡을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1악장의 낙타라는 부제는 잠깐만 생각해 봐도 딱 일치할 정도로 정말 적절했다.
전체를 꿰뚫는 큰 그림을 제시하는 건 곡의 제목이고 실질적인 연주에 관하여 지시하는 건 부제였다.
그 부제가 명료하다면 연주자들이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유리했다.
다만 에르네스트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는 듯 덧붙였다.
{제가 제목을 발표한 건 여러분의 생각을 한쪽으로 유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되레 더 넓게 퍼트리려는 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는 안 간다. 하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우릴 휘두르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진지함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러분의 연주는 이미 각각 올바른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전부 들어 본 저는 제목을 발표해도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제목만 발표했다면 아마 엄청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부제가 간신히 지금 분위기를 붙잡아 놓은 것이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화이트보드를 가만 바라보았다. 다른 연주자 중엔 혹시나 잊을까 봐 메모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질문 받겠습니다.}
에르네스트는 파이널리스트들에게 배턴을 넘겼다. 하지만 우린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언가 물어도 에르네스트가 구구절절 이야기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레이와 루카가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리 날카롭거나 하진 않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에르네스트를 들볶아서 답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는지 대담은 그대로 마무리되었다.
파이널리스트들은 이 도전적이고 과감한 작곡가의 성향에 대해 이제 슬슬 알아 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답이 없는 문제를 내진 않는다. 그러니 각자 문제를 해결한다면 분명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에르네스트는 같이 식사하지 않고 그대로 직원들을 이끌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이곳을 대담 장소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살짝 고양되었으나 조심스러운 분위기 아래에서 식사가 마무리되었고, 곧바로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파이널리스트들에게 책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참고하실 자료입니다.}
도서관에 니체 관련 서적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권수가 한정되어 있겠지.
인터넷도 없고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는 우리들에게 이 책은 무척 중요한 근거였다.
그렇게 모든 파이널리스트가 책을 받고 잠시 망연해 있을 때였다.
{비상. 모두 모여.}
알레한드로가 자신의 테이블로 모두를 불러들였다.
지금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정말로 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