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6화
알레한드로 주재로 긴급 회의가 열렸고 우린 각자 책을 들고 한 테이블에 앉았다.
루카가 모두를 둘러보더니 웃으며 농담했다.
{니체를 막 접한 철학과 학생들 같네.}
철학과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했다. 우리가 가진 책은 니체의 철학을 쉽게 풀어 주는 해설서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그냥 교양 수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교양 수업치고는 분위기가 가볍진 않았다. 알레한드로가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다들 같은 책을 받긴 했지만 난 이걸로 우리가 알아서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심지어 바로 내일 2차 리허설이 잡혀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세연을 비롯한 4명의 표정은 정말 진지했다.
적어도 오늘 밤엔 이 책을 읽고 약간이나마 이해를 해야 내일 리허설에 진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알레한드로의 순서는 모레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연장자로서 책임감이나 스포츠맨십 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어?}
일단 서로 알고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 보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먼저 앤서니가 가장 유명한 것을 언급했다.
{신을 죽인 남자?}
{아, 맞아. 그거 나도 알아.}
{멋있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은 니체의 말 중 너무나 유명한 것이라서 모두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철학에서 어떤 맥락으로 나온 건지는 모르지만 단지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장만 가지고 수많은 패러디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건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당시 서양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교리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현대 실존주의와 실용주의의 문을 여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잘 아는 건 아니라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론 레이가 이야기했다.
{그 사람 책 가지고 슈트라우스가 교향시 만들었잖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
{그것도 알지.}
{아, 이거 말이지?}
앤서니가 장난스럽게 그 서주를 입으로 불렀다. 대충 부르는데도 음정이 정확했다.
난 그 곡을 떠올렸다. 해가 뜨는 것을 표현하는 듯한 웅장한 관악기와 이어지는 투티 그리고 팀파니의 발소리. 이 또한 너무나 유명한 곡이었다.
피아노가 들어가지 않는 교향시라서 우리들과는 거리가 있는 음악인데도 영화의 ost로 들어서 아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린 일단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서로 신나게 이야기했다.
특히 남자들은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뭔가 심금을 울리는 명언이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라 재미있었다.
그때 가만히 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모두 잊고 있던 핵심을 다시 끌어냈다.
{그리고? 영겁 어쩌고 낙타니 뭐니 하는 거 아는 사람 있어?}
다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영겁 회귀 그리고 낙타, 사자, 어린이. 니체의 중심 사상이라기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너무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약간은 알지만…….’
난 니체의 책도 몇 권 읽어 보았다.
한창 신학이나 철학 등을 공부하며 내 존재에 대해 사유하려고 했을 때 자연스레 니체의 책도 손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니체 철학은 신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웠다.
오죽하면 니체의 별명이 망치를 든 철학자이겠는가? 그는 기존의 모든 개념을 부수고 새로 정립하려 했다.
내가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난 유신론자에 가까운 생각을 지니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겪은 것과 내 존재 자체가 니체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영겁 회귀 개념은 조금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이 있긴 했다. 그것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기억 너머로 밀어 두긴 했지만…….
때문에 유신론자인 나는 신을 죽인 니체의 정보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잘 알지 못하기도 했고.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였다.
{저기…….}
평소 말이 그리 많지 않은 이연주가 살짝 손을 들었다.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갑자기 관심을 받게 된 이연주는 멈칫했지만 그래도 말을 끊진 않았다.
{내가 교양 수업 때 니체를 조금…… 공부하긴 했었어.}
{와우, 진짜?}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들 신을 죽인다는 자극적인 말만 알고 있다는 상황 속에서 진짜로 공부를 했던 사람이 나온 것이다.
알레한드로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역시 이렇게 많이 모이면 똑똑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가.}
{그 정도는 아니야. 제발.}
{하하하, 적어도 대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철학을 선택할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 거잖아? 안 그래?}
어쨌든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알레한드로가 웃었지만, 이연주는 그리 자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 교양 수업은 철학이 아니라 소설 수업이었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니체의 영겁 회귀 개념이 나왔었고.}
{……어, 그래?}
알레한드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읽은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니체를 공부한 것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철학적인 부분과는 조금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루카가 이연주에게 물었다.
{학점은 뭐 받았어?}
{B 마이너스.}
{음.}
갑자기 현실적인 학점이 나오자 루카가 침음을 삼켰다. 그의 눈빛에서 신뢰도가 급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적극적인 성격이 아닌 이연주는 그만 입을 다물려는 듯했다. 괜히 더 나설 필요 없다고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 옆에서 세연이 책을 마구 뒤적이더니 울상을 지으며 매달렸다.
{내가 지금 슬쩍 봤는데 진짜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언니만이 희망이야! 제발 도와줘!}
그 솔직한 모습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비단 세연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지금 더운물 찬물 가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연주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볼게.}
시선을 받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그녀도 숙련된 피아노 연주자다. 무대에 서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안다.
테이블 위로 이연주가 손을 들었다.
{아까 작곡가님이 이렇게 말했잖아? 빙글빙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고.}
{그거 무슨 요즘 유행하는 소설 이야기에 가깝긴 하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야. 영겁 회귀란 건 실재하는 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 보는 것에 가까우니까.}
벌써부터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연주는 다시 한번 설명했다.
영겁 회귀는 우리가 진짜로 겪는 현실이 아니라 그저 사고 실험의 일종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씩 가리켰다.
{인간을 볼까? 팔이 두 개지. 다리도 두 개고. 눈도 두 개. 키는 140cm정도일 수도 있고 2m가 넘을 수도 있지만 아마 높은 곳에서 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일 거야.}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먼지나 다름없었다. 다 똑같다고 봐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인간의 조건은 크게 보면 큰 틀에서 비슷해. 그리고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세계 역시 한정되어 있을 테고. 이 조건하에서 세계가 계속해서 시간을 되풀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연주의 이야기를 잘 따라간 알레한드로가 그 질문에 대답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뭐,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겠어?}
{그럼 그 안의 우리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지?}
{어…….}
하지만 이어진 질문은 너무 차갑고 허무했다. 모든 것이 전부 필연적인 가치들이라면 우린 무의미하게 살고 있을 뿐일 테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파이널 의무곡치고는 너무 어두운 주제가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우린 모두 에르네스트의 곡을 한 번씩 각자 해석해 본 적이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이 주제가 그저 비극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모두 체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 느낌에 기반하여 이연주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녀 역시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만약 영겁 회귀란 것이 있다고 치고 우리 삶을 봤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린 운명의 노예가 될 뿐이지. 하지만 거기서 허무주의를 이겨 내고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하며 삶을 쾌활하게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야.}
{다음 단계가 뭔데?}
그 질문엔 나도 모르게 내가 답했다.
{어린이겠죠.}
그러자 이번엔 다시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괜히 말했나 싶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이연주의 설명 덕분에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파편화되어 있던 니체의 철학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돈된 생각들은 에르네스트의 음악과 의도를 읽어 내는 방향으로 작동했고.
렌스키가 왜 이제야 말하냐는 듯 물었다.
{베르체노바. 너도 방금 이야기 알고 있었던 거야?}
{아뇨, 몰랐는데…… 이연주 씨의 설명을 듣고 나니 어렴풋이 느껴져서요.}
이연주는 마치 간신히 동료를 얻은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고, 세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믿음이 듬뿍 담긴 눈빛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 역시 무겁게 이쪽으로 쏠렸다.
난 니체도 잘 모르고 에르네스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 나온 말들을 음악에 간신히 결부시킨 건 나뿐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