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67화 (1,267/1,277)

##  1267화

유럽 클래식 음악의 발달은 종교 미사에서 시작되었다.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정신적 고양과 도취를 위한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정신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음악은 이후 다양한 예술 장르와 교류하며 그 덩치를 키워 나갔다.

때문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다 보면 자연스레 문학, 신학, 철학 등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피아노 연주자들은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엔 이미 충분히 익숙한 상태였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읽고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니체를 모티프로 한 음악을 이해하려면 본격적으로 철학에 파고들어야 했다.

나는 삶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니체까지 손이 닿았을 뿐, 여기 있는 평균 20대의 피아노 연주자들은 그 정도로 철학에 심취할 이유가 없었다.

{난 설명 들어도 잘 모르겠어…….}

{괜찮아. 나도 그렇거든.}

파이널리스트들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자포자기하여 전의를 상실한 건 아니었다.

서로 망했다며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엔 단단한 의지가 머물러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벌써 몇 번의 난관을 뚫고 올라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 정도 문제에 쉽게 무릎을 꿇을 나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앤서니가 책을 들고 흔들며 제안했다.

{일단 조금 읽어 볼까?}

{그게 낫겠어.}

책을 펼치는 것 자체가 두려운지 모두들 나와 이연주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제대로 된 힌트를 얻으려면 에르네스트가 허락한 이 책에서 무언가 얻어 내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엔 니체의 철학에 대한 간단한 해석과 오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그 뒷장부터는 그의 생애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역시 음악을 공부할 때도 시대와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것처럼 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든 건 사람이 짓고 만드는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년 독일 출생으로 니체는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라틴어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서 10세 때 종교 음악인 모테트motette를 작곡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음악과 가까이했다.

대학교 시절 쇼펜하우어의 책을 접한 이후 철학에 몰두하였으며 쇼펜하우어의 추종자였던 바그너와 연이 닿아 친해지기도 했다.

‘참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니체는 전쟁의 포화에 휘말리길 바라지 않아 독일 국적을 포기하여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았고, 짝사랑했던 루 살로메라는 여자가 있었지만 결국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기존 사회적 틀 같은 것을 모조리 깨부수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정작 사적으로는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뇌연화증으로 인한 심각한 광증에 시달리다 55세로 사망했지만, 니체의 정말 대단한 점은 미쳐 가면서도 끝까지 삶에 대한 찬가를 놓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다시 똑같이 살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운명을 긍정하겠다는 그 정신력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음?”

몇 페이지에 걸쳐 니체의 생애를 읽고 나서 고개를 드니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모두가 나처럼 빠르게 읽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단어야 대체……?」

세연은 머리를 싸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니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바로 검색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주어진 책은 영문 버전과 프랑스어 버전이 있었는데 그 두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상당히 애를 먹는 상황이었다.

서로 대화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이런 어려운 책을 읽는 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책 읽는 것 자체도 힘드네.}

{그러게…….}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진 건 세연과 렌스키, 레베카, 타츠야인 것 같았다. 심지어 세연은 바로 내일이 2차 리허설이었다.

조금 더 영어 실력이 낫고 니체에 대해서도 약간 이해하고 있는 이연주는 그런 세연이 급하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붙어 앉았다.

아마 가까이에서 할 수 있는 한 가르쳐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설명은 되겠지만…… 과연 세연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까지 불안해졌다.

내일 리허설이 있는 연주자들이 어떻게 해야 이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밤을 새더라도 이 책을 다 읽어 보는 게……. 일단 설명 자체는 꽤 쉽게 되어 있으니까.}

{차라리 개략적인 것만 메모한 다음 연습에 집중하는 건?}

{시간만 조금 더 있었어도…….}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지켜보고 있던 알레한드로가 입을 열었다.

{일단 부제목에 집중하는 게 낫겠어.}

그는 이곳에서 그나마 가장 오랜 경력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찾아낼 줄 아는 연주자였다.

모두들 알레한드로의 강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내가 지금 잠깐 읽어 봤는데 이 영겁 회귀라는 제목은 일단 이해하기도 어려워서 헷갈리기만 해. 말로 설명도 못 하는 걸 음악으론 할 수 있겠어?}

{안 되지.}

{하지만 부제목들은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아?}

에르네스트가 지정한 낙타, 사자, 어린이의 악장들은 니체의 초인 사상에 결합되는 내용들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책의 중간 즈음을 펼쳐서 보여 주었다.

{이 초인ubermensch 개념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 피아니스트들의 단계와 비슷하기도 하고…….}

{정말?}

{몇 페이지부터 나와?}

모두들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곧 책장을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잡으려면 지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집중하여 책을 살펴보았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그나마 이해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 초인이 어떠한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초인이 아니라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인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는 있었지만…… 그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몇 분 정도 책을 빠르게 읽어 내린 루이가 먼저 말했다.

{여기선 철학 이야기를 하지만 우린 피아니스트니까 피아니스트의 관점에 맞추어서 보자면…… 무작정 악보와 레슨을 따라가기만 하는 낙타의 단계, 다음은 틀에 맞서 반항하는 사자의 단계, 마지막으로 음악을 놀이처럼 다루며 즐길 수 있는 어린이의 단계……. 내가 맞게 이해한 게 맞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똑같이 이해했어.}

{그렇게 어려운 개념은 아닌데?}

{삶을 즐기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지.}

사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면 약간 더 복잡하긴 했다. 하지만 모티프를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같은 개념을 가지고도 해석을 각자 달리하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음악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 프로인 연주자들은 작은 실마리만 가지고도 여러 해답을 이끌어 낼 줄 안다.

모두들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해한 대로 곡을 해석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어.}

{템포만 보더라도 이미 낙타, 사자, 어린이가 분명하잖아?}

{1악장이 낙타라는 말을 듣고 확실해진 이미지가 있어.}

{사자 악장을 사자처럼 연주하는 건 너무 단순할까? 이 책에 의하면 사자는 기존의 관념에 대항하는 개념이라는데…….}

조심스러운 의견이 오가기도 하고, 한편에선 격렬한 토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 어디에도 끼지 않고 조용히 책을 내려다보며 혼자 생각했다.

왜 부제목은 니체의 초인 사상에서 비롯된 낙타, 사자, 어린이로 지었으면서 막상 제목은 초인이라 짓지 않고 영겁 회귀라고 지었을까.

거기에서 조금 더 깊은 연결성을 약간 느꼈지만 깔끔하게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

에르네스트는 뮤직 샤펠에서의 대담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잠시 사무실에 들러서 일정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서류를 들고 있는 직원이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2차 리허설은 참가하지 않으신다고요.}

{예.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콩쿠르 측에선 에르네스트가 리허설 참관을 한 것에 대해 처음엔 꽤 조심스럽게 여기는 듯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정말 공정하게 모든 파이널리스트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곡의 완성도가 전반적으로 모두 상승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여기서 또다시 얼굴을 비추는 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주어져야 할 정보는 전부 줬다. 작곡가는 이쯤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옳다.

언제부터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구할 때 작곡가에게 의존했단 말인가?

죽은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에서 대답을 이끌어 내는 것이 피아니스트들의 일이었다.

그렇게 담담하게 생각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직원이 웃었다.

{파이널리스트들은 레스토랑에서 아직도 토론 중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큰 숙제를 남겨 주신 것 같네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쉬운 주제로도 얼마든지 곡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무엇을 쓰더라도 그의 뮤즈에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에겐 작곡에 본격적으로 몰두했을 때부터 바라보고 있던 뮤즈가 있었다.

거대한 주제이자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고, 곁에만 있어도 영감이 절로 샘솟는 음악의 화수분과도 같았다.

그 사람은 언제나 에르네스트에게 영향을 주었고, 한시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반대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고 그 결과가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니체를 모티프로 한 음악이었다.

표제를 발표하기 전 음악을 미리 들어 보면서 에르네스트는 그의 곡을 이해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살펴보았다.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12명 중에서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사이에 타티아나가 있다는 것에 에르네스트는 희미하게 들뜨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을 돌리더라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

타티아나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그녀가 신랄하게 말하던 것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타티아나는 그를 이해해 주려 했다. 처음에 화를 낼 때와 달리 나중엔 믿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겠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큰 기획에 뛰어들었는지.

만약 도중에 타티아나가 탈락하기라도 한다면 에르네스트가 하는 모든 일은 바보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 애가 올라오는 건 내게 있어 확실한 일이었으니까…….”

{무어라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혼잣말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놀란 에르네스트는 얼른 수습하면서 괜히 앞에 놓은 서류를 더 보는 척했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그의 어깨를 둘러 끌어당겼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두근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