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8화
따뜻한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토요일 오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일을 만끽할 때였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를 이틀 앞둔 관계자들에게 휴일 같은 것은 사치였다.
에르네스트도 호출을 받아 바쁘게 하루를 시작했다.
‘다들 궁금한 게 많네.’
일반적으로는 의무곡 작곡가가 곡을 제출한 다음에도 이렇게 불릴 일은 없었다.
그냥 콩쿠르가 끝날 때까지 외부에 허튼소리 하지 않고 얌전히 감금당해 있는 것이 그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파이널리스트들의 리허설에 참관하기도 했고, 심지어 무제이던 곡에 뒤늦게 제목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 갑작스러운 변경 때문에 콩쿠르 운영 측에선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워낙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결국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그에 따른 근거가 필요했기에 에르네스트는 아침부터 심사 위원들을 마주하고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에 대해 설명해야만 했다.
사실 말이 설명이지, 청문회에 가까운 자리였다.
“죽을 뻔했네.”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며 캔 콜라를 홀짝였다. 심사 위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시뮬레이션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어떤 질문이 날아들지는 뻔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답을 구상하는 식이었는데, 대답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해서 무척 까다로웠다.
제목에 따라 니체와 철학에 대한 설명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그건 맹목으로 보여질 우려가 컸고, 반대로 깊이 있는 이유 없이 피상만 제시하면 겉멋이 든 치기로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신중과 확신을 근거로 제목을 선정했다는 걸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려면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여지는 태도까지 신경 써야만 했다.
‘반반 정도였나…….’
흥미로워하는 사람이 절반 그리고 짜증스러워하는 사람이 절반.
클래식 음악가들이라고 해서 모두 고지식하거나 꽉 막힌 건 아니었지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처럼 유서 깊은 콩쿠르의 심사를 맡다 보면 당연히 보수적인 태도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젊은 작곡가가 쓸데없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대해 좋게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나마 반절이나마 동의를 얻어 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돌아섰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담당자, 가브리엘이 웃으며 다가왔다.
“한숨 돌리셨습니까?”
“네, 뭐…….”
“큰일 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어지간한 큰일에 익숙한 에르네스트도 꽤 긴장했을 정도였으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어깨의 힘을 빼며 고개를 들었다.
“별 소리 다 듣긴 했지만 제 의사는 관철되었으니…… 이제 정말로 할 일은 다 한 것 같네요.”
“무슨 말을 들었길래?”
“작곡가가 살아 있다는 건 참 어렵다고 하던데요.”
“예? 하하.”
심사 위원 로버트 터너는 아예 대놓고 귀찮아했다.
죽은 작곡가라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산 작곡가가 자꾸 이것저것 붙이니 쉽지 않다는 투였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 공감은 하지만 그 산 작곡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에서 에르네스트는 약간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빨리 곡을 쓰고 죽어야 연주자들이 편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일찍 죽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작곡가들은 단명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에르네스트도 큰 사고를 겪긴 했으나 결국 어떤 시련이든 그를 죽이진 못했다.
니체가 말한 대로 에르네스트는 시련에 맞서며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 또한 에르네스트가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제가 부린 고집이니까요. 감수해야죠.”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독선과 고집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기만 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오게 된 원인이자 원동력인 타티아나에 대해 깊게 이야기할 수도 없어서 에르네스트는 그냥 웃으며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브리엘이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정말 감수하실 수 있는 겁니까?”
“무슨 말이죠?”
그간 담당 직원으로 붙어 있으면서 가브리엘은 한 번도 친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같이 그는 진지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은 괜히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정면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래 제목을 짓지 않으셨다가 갑자기 결정하신 이유가 뭡니까? 스스로 고집이라고까지 하시면서.”
“……글쎄요. 리허설을 보다 보니 확신이 들어서?”
“급히 제목이라도 안 달면 불공평한 경연이 되리라 예감하신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르네스트는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브리엘은 이미 많은 것을 직간접적으로 파악한 후 에르네스트에게 묻고 있는 중이었다.
마지막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고 난 후, 에르네스트는 비로소 여러 제목 후보 중에서 확실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목을 붙여야만 다른 연주자들이 조금이나마 곡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으리라 판단하기도 했다.
제목을 붙인 건 타티아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연주자들을 위해서였다.
그 부분을 가브리엘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제가 무슨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자신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본 콩쿠르를 철저히 이용하려는 계획을 짜고 시행에 옮긴 것 아니었습니까?”
“……예?”
하지만 모른 척하는 것도 한계였다. 지금 웃으면서 열일곱 살짜리가 콩쿠르를 어떻게 이용해 먹냐고 해 봤자 가브리엘에겐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말문이 막힌 에르네스트가 멍하니 서 있자 가브리엘은 오해하진 않아도 된다는 듯 덧붙였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누구나 사사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게 결과적으로 파이널 무대의 퀄리티를 높이고 음악계 전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 더더욱. 말 그대로 결과만 좋다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선을 넘으면 시스템이 철저히 걸러 낼 테니까.”
대체 가브리엘이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건 어제 타티아나가 한 돌발 행동이 근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당당했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유리하도록 곡을 쓰거나 한 적이 없었고, 이후로도 철저하게 중립을 유지했다.
콩쿠르의 시스템은 에르네스트에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전 허튼짓한 적 없습니다.”
“하하하,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작곡가님이 정말 긍지 높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지요.”
가브리엘도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돌연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세상엔 단물만 빼 먹으려는 나쁜 어른들이 많습니다.”
“……뭐라고요?”
“에르네스트의 훌륭한 음악 그리고 연주자의 탁월한 연주. 그 모든 걸 콩쿠르의 자원으로만 활용하고 대가는 하나도 내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현실적인 경고였다. 에르네스트는 그 경고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심사 위원들이…….”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심사 위원 중 한두 명만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겠죠.”
심사 위원은 12명이나 된다. 파이널에서 입상하려면 그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에게 사사로운 계획이 있다는 걸 가브리엘도 알아차렸는데, 다른 심사 위원 중엔 알아차린 사람이 없을까?
미리 문제 제기를 하거나 수정하려 할 필요도 없다. 전부 콩쿠르의 성공을 위해 써먹고 자신이 든 펜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니까.
애초에 에르네스트를 의무곡 작곡가로 선정하는 데에 모두가 찬성한 건 아니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절반은 에르네스트를 마뜩잖게 여겼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별 근거 없이도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를 일단 우승 후보에서 무조건 배제하고 심사하겠다는 입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손쉽게 우승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연주자는 불필요한 피해를 보게 될 테고요. 그걸 감수하실 수 있겠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가브리엘의 말은 에르네스트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타티아나는 세상 그 어떤 무대에 올려놓아도 최고의 평가를 받을 만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그녀가 삶에서 중요한 도전을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도움이 아니라 되레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심사 위원들이 에르네스트를 의식하여 작정하고 타티아나를 외면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억울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콩쿠르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련한 어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가브리엘의 경고처럼 완전히 놀아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건 에르네스트가 감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니스트의 목숨에 이어 여기에 작곡가의 목숨까지 걸어야만 했다. 그 정도의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네스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타티아나가 세계에 통용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난 거꾸로 묻고 싶군요. 과연 심사 위원들이야말로 음악에 의거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면 감당할 수 있을지.”
무대를 보는 건 12명의 심사 위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모든 건 음악으로 승부가 날 겁니다.”
심사 위원들도 결국 음악가라면 절대로 타티아나의 음악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안함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모든 상황을 압도적으로 해결하고 보다 많은 것을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행동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의 일방적인 이기심의 발로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천천히 커리어를 쌓아 나가더라도 타티아나는 금방 빛을 볼 피아니스트였으니까.
정말로 타티아나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어 환멸이 난 그녀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 기능할 수 없어서 아나스타샤처럼 옆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난 가브리엘은 피식 웃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정도로 확실한 결과로 심사 위원들과 세상이 납득하여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겠는데요.”
“…….”
“아마 연주자는 현시대의 신이 될 겁니다. 신을 부정한 니체를 모티프로 한 곡으로 신이 된다면 조금 아이러니하겠군요.”
가브리엘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웃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