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69화 (1,269/1,277)

##  1269화

에르네스트가 나눠 준 니체 해설서는 그 내용이 상당히 알찼다.

모호한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과 도표가 삽입되어 있기도 해서 확실히 초심자를 위한 배려가 많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개념들을 대충 설명하고 넘어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복잡한 니체의 철학을 어렴풋한 실루엣이나마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책이었다.

“잠이 약간 부족하네…….”

난 침대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직 피곤함이 어깨를 살짝 누르고 있었다.

니체 해설서를 전부 읽느라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탓이었다.

두어 시간 정도 더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은 침대가 아니라 피아노 앞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1층으로 내려온 나는 곧장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하우징 스튜디오는 이런 면에서 정말 천국과도 같았다.

‘살살 해 볼까.’

난 느긋하게 건반을 짚었다. 기존의 음악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선율이었다.

혼자 있으면 혼잣말이 늘어나는 것처럼 이곳에서 혼자만의 연습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난 즉흥 연주를 하는 일도 많아졌다.

난 서서히 손의 속도를 올려 나갔다. 머리가 아니라 손에 기억되어 있다시피 한 대위법적 연주 형태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이런 연주에서 난 거꾸로 많은 걸 배우기도 했다.

물론 지금 연습해야 하는 세 곡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겠지. 하지만 이런 연습도 결국 전부 다 무대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대위법 형태를 유지하던 내 즉흥 연습은 이내 조금 더 자유롭게 변화했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그리고 리듬 연습이 한곳에 합쳐져 있는 즉흥 에튀드였다.

조성을 서너 번 바꾸며 여러 방식으로 음악을 움직여 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에르네스트의 협주곡 3악장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3악장의 부제는 어린이. 그 이름에 걸맞게 굉장히 빠르고 역동적인 음형이 중요한 악장이었다.

난 암보하고 있는 머릿속 악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지 떠올리고 있기만 하면 내 손은 거의 자동 기계처럼 그 악보를 건반 위에 옮겨 낼 수 있었다.

볼륨을 올렸다가 내리기도 해 보고, 템포를 늦췄다가 빠르게 해 보기도 하면서 난 이 음악을 가늠해 보았다.

‘에르네스트가 원하는 것…….’

그는 내가 음악을 즐기고 있다면 딱히 더 바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다행히 난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내 기술적인 한계는 이미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높아졌고, 곡을 외우고 간직하는 능력도 심화되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음악과 가깝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살짝 음악을 떠나 생각해 보자면 난 솔직하게 즐기고 있지 못했다. 워낙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진정되어서 연주자로서 딱히 큰 문제는 없다.

무대에서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일단 지금은 그거면 된 것이지 않나 싶긴 했다.

오전 연습을 마치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마리우스가 찾아왔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을 말해 주었다.

{오늘 공식 일정은 없습니다. 오후에 촬영이 하나 있긴 한데 참가하셔도 좋고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촬영이요?}

{예. 파이널리스트들이 모여서 연습하는 장면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뮤직 샤펠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카메라가 이곳저곳에 있는 것이 보인다. 파이널리스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관심거리가 되는 것이다.

굳이 장면이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우리가 합동 연습을 하는 것보다는 말 그대로 매스컴에 내보낼 이미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난 웃으면서 마리우스에게 말했다.

{어지간하면 참가하는 게 낫겠죠?}

{그건 베르체노바 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참가하는 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난 이런 부분에서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음악계에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음악 외적으로도 조금이나마 협조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는 내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레스토랑에 가서 먹을게요. 다른 사람들과 좀 만나고 싶기도 하고요.}

조용히 연구하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은 니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얻을 게 더 많을 것 같았다.

그렇게 레스토랑으로 향하니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미 빵을 메인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멍하니 테이블에 반쯤 엎드려서 햇빛을 쬐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세연은 그중 후자였다. 난 눈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면서 슬그머니 세연 옆으로 다가갔다.

{세연, 좋은 아침이에요.}

{타티아나…….}

언제나 날 보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던 세연이 오늘따라 영 기운이 없었다. 그 표정만 봐도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고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넌 니체를 제대로 이해했겠지? 그렇지?}

세연은 철학이라면 치가 떨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간밤에 어지간히 고생한 모양이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니체는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어려워한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예……?}

{넌 괴테의 파우스트나 단테의 신곡도 읽었잖아. 나보단 훨씬 더 이런 고전이나 철학을 잘 이해하는 거 아니야? 영어도 잘하고…….}

세연의 말대로 난 상당히 어려운 책도 꽤 많이 읽긴 했다.

내 나이에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는 말도 듣긴 했지만…… 내적 해답을 찾는 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기 어려웠던 내가 그나마 매달릴 수 있었던 건 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할 뿐이다. 이것저것 많이 읽긴 했어도 고전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만할 정도로 건방지진 않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세연에겐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그녀는 날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예 약간 다른 방면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주 씨가 늦은 시간까지 도와드리지 않았나요?}

{……응. 연주 언니가 고생했지. 이 멍청한 임세연을 이해시킨다고……. 하지만 다 헛수고였을 거야……. 난 망했어……. }

우는 소리를 내며 세연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반쯤은 장난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세연의 불안한 마음이 새어 나오고 있기도 했다.

당장 오늘 그녀는 리허설을 마치고 내일 무대에 서야 하는 사람이었다. 긴장되지 않고 불안하지 않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철인이겠지.

세연의 마음을 이해하는 나는 옆자리에 앉으며 다독였다.

{그러지 마세요. 이해 안 가는 부분은 저와 이야기해 봐요.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너도 결국 나한테 실망할걸?}

{그럴 리가요.}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만큼은 어중간한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전 단 한 번도 세연에게 실망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세연의 음악적 성과나 여러 능력이 절대적 기준에 못 미쳤던 경우는 있었지.

하지만 그럴 때에도 항상 세연은 내 생각을 상회하는 놀랍고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곤 했었다.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 돌려 내 쪽을 보던 세연이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내가 단순히 달래려고 좋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전해진 것 같아서 기뻤다.

조금 기운을 차린 세연은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간밤에 읽었던 책과 니체를 이해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결론은 음악으로 표현되어야만 했기에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리가 음악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향해 있었다.

{낙타나 사자는 같은 네발 동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미지가 또렷해서 쉽더라고.}

{그렇긴 하죠. 문제는…….}

{그래. 3악장이 진짜 지옥 같아.}

세연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내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녀와 난 근본적인 부분에서 음악을 보는 눈이 상당히 닮아 있고,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굉장히 비슷하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세연의 말을 들어 보니 뭔가 다른 점이 있기도 한 모양이었다.

{책에서 본 대로면 어린이는 뭔가 자유롭고 인생을 놀이처럼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직접 연주해 보면 그렇게 하기 너무 어렵지 않아?}

{놀이에 가까운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전.}

{이걸 놀이처럼 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둘러봐도 몇 안 될걸?}

아무래도 음악에 익숙한 정도를 따지자면 세연이 날 따라오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난 세연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3악장의 어려움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보를 볼 필요도 없이 거의 즉흥 연주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칠 수 있을 정도이긴 하지만, 그게 정말로 놀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나와 세연이 니체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 옆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이야기에 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 나도 어제 간만에 문자 좀 읽다가 죽을 뻔.}

{분명 쉬운 해설집이라고 했는데 왜 쉽지가 않냐.}

그렇게 푸념도 하고 각자의 해석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연주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쳤다.

서로 경쟁자지만 지금은 협력자로서 보다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건 되도록 다 내놓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엔 에르네스트에 대한 해석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내가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약간 말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 너무 독하게 이야기한 것 때문인 것 같다…….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심히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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