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70화 (1,270/1,277)

##  1270화

한참 이야기하던 파이널리스트들은 이내 각자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음악과 철학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레스토랑은 아침 식사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이쪽을 보는 웨이터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렇게 흩어지고 나서도 테이블에 남아 있는 건 처음부터 있었던 세연과 나 그리고 루이였다.

‘약간 긴장해 있는 것 같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은 일요일인 내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6일간 저녁 8시에 2명씩 무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 첫날을 장식할 두 사람이 바로 세연과 루이였다. 오늘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내일 무대에 서야 하는 상황에서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세연은 루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일단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일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머뭇거리던 세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루이. 오늘 리허설 준비는 어때?}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하면 보통 엄청 잘하던데. 역시 나만 망했구나.}

{그렇지 않아.}

루이는 약간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연이 말을 걸자 잘 대해 주었다. 그 역시 세연과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연습하면서 많은 걸 고쳤어. 이전과 완전히 다를 정도로.}

{다 갈아 엎었다고?}

{니체를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있었거든.}

내일이면 본무대인데 연주를 수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2주밖에 안 된 새 곡이라서 쉽게 고칠 수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그건 상당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세연은 일단 루이가 음악성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확신하고 바꿨다고 생각하는지 반색하며 박수를 짝 쳤다.

{그럼 역시 잘하겠네!}

{모르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해 봐야 알 테니까. 그나마 곧바로 리허설이 있어서 다행이네.}

루이는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물론 오케스트라가 피드백 같은 걸 강하게 해 주진 않는다. 왜냐하면 연주자가 음악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결국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내일 무대에 서 봐야 알 일이겠지만…… 그래도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춰 보다 보면 혼자선 알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긴 했다.

세연은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듯 밝게 웃었다.

{분명 괜찮을 거야!}

{고마워. 너는 어때?}

{난 망했고…….}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

세연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루이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세연은 루이가 니체를 해석하고 음악에 융합한 것을 상당히 부럽게 느끼는 듯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슬쩍 한마디 얹었다.

{전 두 분의 실력을 알아요.}

내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날 돌아보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벌써 몇 년 동안이나 세연의 실력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었다.

그리고 20대인 루이는 한참 전부터 프랑스에서 이름을 날리던 연주자였다. 난 그가 파리에서 어떤 연주를 하는지 본 적이 있다.

둘 다 위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강한 멘털리티로 끝까지 무대를 살려 내는 연주자였다.

파이널 라운드의 첫 무대에 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믿음을 두 사람에게 전했다.

{제가 본 대로라면 분명 문제 없을 거예요. 오늘 리허설과 내일 무대 모두 잘 해내실 수 있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셔요.}

중요한 선택들을 연달아 하고 그것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신, 공부를 열심히 한 자신, 음악을 정말로 사랑하는 자신, 그간 많은 무대에 서 봤던 자신.

그런 여러 경험이 축적된 자신은 상황에 던져졌을 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할 때가 있다.

그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나는 안다.

{잘될 거예요.}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응원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날 보는 세연과 루이의 시선은 약간 달라져 있었다.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해서 마음에 안 든 건가.

무어라 덧붙이기라도 해야 할까 싶어서 잠깐 멘트들을 골라 보는데, 세연이 루이 쪽으로 살짝 다가가더니 속닥거렸다.

{타티아나가 말하면 어쩐지 그대로 될 것 같지 않아?}

{난 이미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 파리에서의 일이 생각나는군.}

{엥? 파리? 무슨 말이야?}

{아. 그럴 일이 있었어.}

{그럴 일이라니? 뭐야? 어라? 타티아나가 전에 프랑스에 간 적이 있다고 했었던가? 혹시 두 사람 그전에 만났었던 거야?}

세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속사포처럼 캐묻기 시작했다.

난 다른 누구에게도 루이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건 파리에 같이 갔었던 아나스타샤뿐이었다.

사실 어떤 관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분이 있다고 하긴 어렵고, 내가 도움을 줬다고 하자니 그때 피아노 현을 끊어 놓은 일을 마치 자랑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렇다고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루이가 섭섭해하진 않을까 싶어서 살짝 눈짓하니 그는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떠들고 다니진 않고 싶네. 그렇지? 타티아나.}

{후후, 그렇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알려 줘!}

사정을 모르는 세연은 왜 자신만 따돌리느냐며 날 붙잡고 늘어졌다. 난 그저 웃으면서 루이의 공연을 관람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2차 리허설은 1시간 50분 동안 진행된다. 50분 진행하고 10분 휴식하고 다시 50분 진행하는 식이었다.

솔직히 연주자들은 자기 음악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내일부터 오케스트라는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각각 다른 연주자들을 데리고 리허설을 한 다음에 저녁엔 다시 두 번의 무대에 서야 하는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하루에 연주해야 하는 기성 협주곡만 네 종류고, 의무 협주곡도 네 가지 스타일로 연주해야만 한다.

내가 지휘자라면 머리가 아파서 쓰러져 버릴지도 모를 일정이었다.

‘이것도 평범한 수준이라는 게 항상 신기하지…….’

일반적으로 국제 콩쿠르에서 협주곡 두세 개를 요구하는 경우는 흔하다.

심지어 심한 경우 협주곡만 일곱 곡을 준비해야 하는 콩쿠르도 있으니까……. 대체 그런 콩쿠르에선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협주곡들을 전부 소화해 내는지 모르겠다.

유명한 레퍼토리만 계속 로테이션을 돌리더라도 헷갈릴 텐데.

아무튼 다행히 오전에 있었던 세연의 2차 리허설은 꽤 괜찮았던 것 같았다. 점심에 다시 만난 세연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물론 내일 있을 본무대에 긴장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는 건 연주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세연은 프로 연주자로서 압박감조차 어떻게 적절하게 이용해야 할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리 큰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 뒤 오후엔 루이가 리허설에 참가했다. 난 그가 잘하길 바라며 혼자서 조용히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4시쯤 되었을 때였다. 마리우스가 날 찾아와서 불렀다. 아침에 이야기했던 촬영 일정 때문이었다.

{연습에 집중하셔야 할 때인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르체노바 님.}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는.}

{카메라들이 많을 겁니다. 옷은 그렇게 입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상한가요?}

{아뇨, 정말 멋지십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 싶어서 여쭈어 본 겁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건 집에서 가져온 평범한 사복이었다.

특별히 피아노 연주자답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지만 뮤직 샤펠에 기거하는 파이널리스트들의 일상적인 연습 장면을 담는 오늘 촬영의 테마를 생각하면 이런 흔한 모습이 되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흐트러진 부분이 없는지 살핀 나는 이 정도면 카메라에 찍혀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밖으로 나섰다.

피아노가 있는 휴게실로 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삼각대에 설치된 카메라와 목에 신분증을 건 사람들이었다.

뮤직 샤펠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볼 수 있는 기자들이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실상 모두를 찍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긴 하지…….’

내일 세연과 루이가 파이널 무대에 서고 나면 다시 뮤직 샤펠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렇게 하루에 2명씩 줄어 나가는 것이다.

때문에 12명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오늘을 기자들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몇몇 기자가 커다란 카메라를 내 쪽으로 향했다. 난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싱긋 웃으며 휴게실 중앙으로 향했다.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날 반겼다.

{역시 타티아나도 왔네.}

{오늘 촬영은 자유라고 했지만…… 이건 사실상 무조건 와야 하는 자리 아닌가?}

{거의 다 오기로 한 것 같던데.}

파이널리스트들 역시 내일부터는 이런 자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알레한드로와 레이는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오늘 참가하지 않으면 몰려가서 끌고 오기라도 할 기세였다.

{저번에 모여서 요리해 먹었던 거 기억나네.}

{그 타티아나의 요리 교실을 찍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우린 그간 있었던 즐거운 추억들을 다시금 공유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했다.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그사이 이어진 동지애는 상당히 끈끈했다.

무엇을 촬영하든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밖이 약간 분주해졌다. 빠른 목소리들이 오가고 관계자들이 우리 쪽을 심각한 눈빛으로 살피기도 했다.

{뭐야?}

{무슨 문제 있나?}

덩달아 우리도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서로를 돌아보았으나 무슨 상황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조금 궁금해진 나는 복도 쪽에 있던 마리우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저, 그게…….}

마리우스는 내게 이야기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루이 디아라 님이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

{직원들이 찾아 다니고 있긴 한데…… 일반적인 공용 공간은 거의 다 찾아봤는데도 없어서 지금 조금 곤란한 상황입니다.}

{조금 곤란한 게 아니지 않나요?}

루이가 그냥 자고 있거나 해서 못 찾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난 순간적으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조금 전 리허설을 마친 참이기 때문이었다.

리허설 결과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리허설을 끝내자마자 사라져 버린 이 인과 관계 속에선 아무래도 좋은 상상을 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어디 틀어박혀 있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에 하나 뮤직 샤펠을 나가기라도 했다면 그 뒤는 무척 복잡해진다.

운 좋으면 경고고 심하면 자격 박탈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내가 무언가 할 순 없었을까.

이유 없는 후회를 느끼던 나는 그런 후회는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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