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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71화 (1,271/1,277)

##  1271화

마리우스에게 설명을 들은 나는 다른 파이널리스트들에게 이 상황을 공유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은 후 돌아와서 이야기해 주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루이가?}

프랑스 출신의 루이 디아라는 세련되고 잘생긴 외모에 실력도 좋아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연주자였다.

프로 경력도 상당해서 정신력이 약하거나 하지도 않았고, 사적으로 이야기를 해 봤을 때도 차분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난 한 번도 그가 짜증을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모두와 잘 지내고 규칙에 불만을 표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던 그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에 모두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린 조금 더 가까이 뭉치며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마 도망친 건…….}

{그런 건 아닐 거야. 피아니스트 인생 끝장날 일 있어?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야.}

{아무리 멘털이 나갔어도 그렇겐 안 하지.}

{그래, 그건 말이 안 돼.}

일단 직원들이 한참을 찾았는데도 못 찾았다는 걸 보면 작정을 한 것 같긴 하지만, 뮤직 샤펠을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모두 부정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루이쯤 되는 연주자라면 그런 행동으로 벌어질 뒷일이 감당 못 할 정도로 무겁다는 걸 충분히 안다.

영원한 낙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가 그렇게 책임감 없는 연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일례로 파리에서 봤을 때도 피아노가 엉망이었는데도 그는 연주를 멈추지 않고 일단 끝까지 한 다음 인터미션 시간에 항의했다. 그는 연주자로서 명예가 뭔지 안다.

만약 내가 그를 돕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썼을 사람이었다. 절대로 내팽개치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다만 지금 압박감이 심한 상황일 것 같긴 했다.

{리허설에서 문제가 있었던 건 맞는 것 같네…….}

{아까 점심에도 살짝 불안해 보이긴 했는데.}

{리허설 끝난 다음에 본 사람 있어?}

모두 걱정된다는 듯 서로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루이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고개를 저었다. 대신 예상이 가는 부분들을 서로 짚어 볼 뿐이었다.

{무대에 설 자신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많아. 여기서 무책임하게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을 거야.}

{분명 어디 조용한 곳에 박혀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직원들은 왜 못 찾는 거야?}

{창고 같은 곳에 있나?}

두서 없는 의견들이 오갔지만 그리 의미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알레한드로가 조금 더 상상력의 폭을 좁혀 주었다.

{콩쿠르 직원들은 헤매고 있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같은 피아니스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고. 만약 리허설을 작살내고 내일 무대에 서야 할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지.}

조금 더 몰입해서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말 끔찍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데……?}

{나 내일 리허설인데. 속이 안 좋아…….}

{일단 웃으면서 촬영 같은 걸 할 기분은 아닐 것 같네.}

몇몇 사람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멘털에 충격이 간 듯했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 루이가 겪고 있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서로 더 깊게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암묵적인 공감대 같은 것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난 주위를 돌아보았다. 세팅된 카메라들과 현 상황에 난처해하는 기자들 그리고 정신없이 바쁜 직원들이 보였다.

이런 상황인데 그대로 촬영을 진행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본 나는 파이널리스트들에게 제안했다.

{직접 돌아다녀 볼까요?}

{응?}

{저희 인원도 많잖아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루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직접 찾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수색할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들 딱히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루이를 찾아와야 한다는 데엔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알레한드로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직원을 힐긋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직원들은 제발 우리라도 가만히 있길 바랄 것 같은데?}

{한번 물어봐 주세요. 도와드리겠다고.}

혹시라도 우릴 수색에 참가시켰다가 추가적으로 더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정말 곤란해진다.

그런 직원들의 입장도 이해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싶은 건 여기 있는 모두의 바람이었다.

일단 물어보겠다며 걸음을 옮기던 알레한드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우리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일단…… 이런 상황인데도 난 약간 기분이 좋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어떻게 봐도 기분이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알레한드로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경쟁자 하나 떨어졌다고 좋아하는 사람 없이 모두들 루이를 동료로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아 보여서 말이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기적으로 생각하자면 루이 디아라 같은 강한 피아니스트가 문제를 일으키면 상대적으로 남은 사람들의 평가가 올라가게 된다.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책임 소재는 전부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있으니까.

그러나 우린 그렇게 망가진 시합장에서 겨루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에서 세상의 공정한 평가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강했다. 그건 일종의 명예욕이기도 하고, 스포츠맨십이기도 했다.

알레한드로는 우리가 모두 비슷한 가치를 상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첫 마디에 오해했던 사람들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었다.

{휴…….}

{난 또 기분이 좋다길래 그 정도로 인성이 파탄 난 사람인가 해서 깜짝 놀랐네.}

킬킬거리는 웃음과 농담이 오갔다.

우리에겐 적어도 믿음이 있었다.

루이가 아예 뮤직 샤펠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찾아내어 다시 잘 이야기해 본다면 그가 어떻게든 내일 무대를 피하진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무튼 물어보고 올게.}

그렇게 모두의 동의를 구한 알레한드로는 직원에게 가서 이야기했다.

직원은 상황이 더 복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지 조금 곤란해하는 것 같았지만 알레한드로의 끈질긴 설득과 주장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허락을 구한 알레한드로는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수색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작전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하진 않았다.

{체계적으로 찾아다니는 건 직원들이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까 우린 우리 나름대로 피아니스트로서 숨어들 만한 곳을 각자 창의적으로 떠올려서 찾아보자고.}

{그게 낫겠지, 아무래도.}

{지붕 같은 곳에 올라가 있진 않을까?}

사실 뮤직 샤펠에 가장 오래 있었던 세연도 2주도 안 있었다. 당연히 세부적인 구조 같은 건 잘 모르니 생각나는 대로 다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딱히 미리 정한 건 아니었지만 우린 삼삼오오 뭉쳤다. 혼자서 돌아다니기보다는 같이 돌아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루이와 같은 입장인 세연에겐 많은 사람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어디에 있을 것 같니?}

슬쩍 다가온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글쎄요……. 단순히 촬영을 피하고 싶었다면 방에서 적당한 핑계를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이렇게 사라졌다는 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둘 중 하나?}

{누군가 자신을 찾아 주길 바라거나, 아니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길 바라거나.}

굉장히 상반되어 있는 예상이지만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루이의 성격으로 미루어 본다면 전자일 확률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혼자 사라진 것이 아닐까. 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방해받지 않고 뭘 하려고 하는 걸까.

내 추리를 어느 정도 따라온 아나스타샤는 똑같은 고민에 빠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할 게 그렇게 많진 않은데. 연습하거나 당구 치거나…….}

체육 시설 쪽에 가면 이것저것 놀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런 곳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 외에 뮤직 샤펠에 무엇이 있었지? 각 스튜디오나 도서관, 공동 주방, 로터리 오피스, 기념품 숍?

밖으로 나가면 배드민턴을 치거나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기도 했지만 그건 파이널리스트들에겐 금지되어 있는…….

{아.}

{뭐야?}

{혹시 싶어서……. 잠깐 확인해 볼게요.}

{나도 같이 가.}

그렇게 난 아나스타샤와 같이 본관 밖으로 나왔다.

신관 쪽으로 이어진 언덕으로 내려가 보면 으슥한 공간이 있다. 창고 비슷한 곳 옆에 자전거들이 잔뜩 놓여 있는 곳이었다.

멀리서 볼 땐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아무래도 시선이 잘 안 간다.

난 그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자전거들 사이를 하나하나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난 숨 죽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이런.}

루이는 자전거 자물쇠를 손에 쥔 채로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몰라도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려고 한 것이었다.

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그에게 물었다.

{루이. 자전거를 타고 여길 떠날 생각인가요?}

{아니?}

루이는 약간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냥 이 주변을 한 바퀴 돌기만 할 생각이었어.}

{걸어서 산책해도 되잖아요?}

{그런 걸로는 속이 안 풀려.}

일단 그가 답답한 심정에 이곳에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내가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춤거리며 상체를 세웠지만, 난 반대로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잠깐 이야기나 할까요.}

그는 내 뒤쪽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긴장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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