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72화 (1,272/1,277)

##  1272화

잠겨서 움직일 수 없는 자전거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루이는 초라해 보였다.

한때 무대를 호령했던 피아노 연주자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여러 생각을 해 봤다. 일단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루이를 찾았다고 알리는 게 우선이겠지. 그리고 지금 가자고 하면 루이는 따라와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내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모른 척할 수 없었을 뿐이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마주 보니 루이는 내 시선을 피했다.

{자전거를 좋아하시나요?}

{뭐…… 그럭저럭.}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답답해져서 자전거를 타러 나온 것이라면 그만큼 좋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타고 싶다면 타시면 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네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상황을 따지고 싶지 않았어.}

{무슨 말씀이신가요?}

자기가 원해서 이곳에 있긴 하지만 뭔가에 쫓겨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있는 과정을 이야기하려니 창피한데…… 너희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리허설 망쳤어요?}

{아나스타샤!}

뒤편에 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조심성 없이 묻길래 작게 그녀를 힐난했다.

솔직히 예상이야 모두가 하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루이가 이상 행동을 보일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뻔한 짓은 하지 말라는 듯 구는 건 자존심을 긁는 일이다. 난 루이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는 우리를 만난 순간 이미 어느 정도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는 씁쓸하게 이야기했다.

{망쳤지. 철저하게.}

그는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어 말했다.

{지휘자님이 1차 리허설 때보다 더 엉망이 되었다고 대놓고 말하더라고.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건지 파악하고 고쳐 보라는데…… 나한텐 이제 하루 남았는걸. 대체 뭐 어쩌란 거야?}

보통 무대를 앞두고 있는 연주자는 그 누구도 건들지 않는다. 심지어 레슨을 해 주는 선생님들도 손을 놓고 알아서 하길 종용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지적한다고 해도 하루 만에 모든 걸 고치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었다.

특히 디테일한 부분이 아니라 곡 전반에 대한 것이라면…… 그냥 그전까지 해 왔던 대로 일단 완성해서 어떻게든 무대에 올리는 편이 낫다.

이런 부분에선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데릭은 신랄한 평을 한 모양이다.

지휘자의 말은 무겁다. 연주자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무대에 오를 수 없다. 하루 전날이라면 무시도 수용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루이를 궁지에 몬 데릭을 탓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난 그가 어째서 그래야만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데릭은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다.

콩쿠르에 참가한 연주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루이에게 무리한 이야기를 한 건…….

{지휘자님이 무책임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판단하에 조언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혹시 문제를 알고 있지 않나요?}

아마 데릭에겐 들렸을 것이다. 루이가 어떤 고민으로 음악을 만들어 왔는지.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감 없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어제 곡 제목을 받았잖아……. 그래서 니체를 연상하면서 많은 부분을 고쳤거든. 특히 부제와 관련한 표현을.}

{초인 사상 말인가요.}

{맞아. 1악장은 낙타처럼, 2악장은 사자처럼 그리고 3악장은 어린이처럼……. 꽤 명료한 이미지라고 생각해. 특히 3악장은 천진난만한 초인을 표현해 보려고 했지.}

제목을 받은 직후 연주자들은 모두 어떻게든 그 제목을 해석해서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려고 애썼다.

루이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 중 하나였고,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곡 전체의 분위기가 뒤틀려 버리더라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난 뒤에야 알았어. 내가 뭔가 잘못 이해했다는걸.}

문제는 그 노력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을 때 벌어진다.

레슨을 해 줄 선생님도 없고 적절한 레퍼런스도 없다.

주변의 파이널리스트들은 모두 같은 처지였고, 결국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심지어 주제는 철학이었다.

혼란 속에서 더듬거리다가 잡았던 것이 밧줄이 아니라 뱀 꼬리인 경우는 허다했다.

루이의 능력 부족 같은 것이 아니었다. 되레 그는 유연하고 영리한 편에 속했다. 단지 시간이 너무 없었을 뿐.

그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도 약간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어린이가 되어 보려고 했어요?}

{답답하기도 하고…… 뭔가 알 수 있는 게 생길 것 같기도 해서.}

{발상은 좋네요.}

아나스타샤가 쿡쿡거리며 웃자 루이도 웃었다.

음악을 연구하다가 잘 안 풀리면 피아노 앞에 주구장창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때도 있다.

때론 상상도 못 한 곳에서 얻어 낸 한 컷의 이미지가 해석과 표현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줄 때가 많다.

그게 꼭 기행일 필요는 없지만…… 어린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3악장을 이해하기 위해 어린이처럼 굴어 보려고 했던 건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마음대로 이곳저곳 들이박아 보고 답을 찾아다니는 것에 가깝다.

나는 그가 어디서 단추를 잘못 꿰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약간 고민에 빠졌다.

‘설명을 해 줘도 될까.’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하는 건 쉽지만 그게 루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알 수 없다. 내 말이 정답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데다 책임도 질 수 없다.

도움을 주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우린 경쟁자이기도 하다. 그가 날 오해하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내 말을 곡해하여 들을 수도 있었다.

여러 걱정이 들어서 나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와 농담을 주고받는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자니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가장 후회하는 건 다름 아닌 내가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항상 언행을 주의 깊게 하는 건 중요하지만, 가끔은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난 이번엔 스스로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제가 느끼기에…… 루이는 니체의 철학을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자아를 내려놓고 특별한 이미지에 이입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넓은 의미까지 끌어들여 묻자 루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것 같은데.}

{우리 클래식 연주자들이 자신을 과감하게 버리고 곡의 의도와 주제에 이입하는 건 흔한 일이죠.}

클래식 음악의 주제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었다.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에서부터 자연의 웅장함, 형이상학적인 가치들까지. 인간이 알기 어려운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음악으로 표현하려면 시야를 매우 넓게 두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곡은 그렇게 연주하면 그저 껍데기만 둥둥 뜨게 되어 버려요.}

영겁 회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곡을 초인 사상의 일부로 보고 초인이란 것이 뭔가 인간을 넘어선 존재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손을 뻗으면 마치 인간의 관점을 버려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건 에르네스트가 파 놓은 함정이자 이 곡의 대단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환상적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면 끝없이 빙글빙글 돌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니체는 한 번도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고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니체는 자아의 탈각으로부터 시작되는 종교와 신비주의를 비판했어요. 높은 곳으로 갈수록 인간은 환상에 빠지기 쉬우니 철저히 지상에 발을 붙인 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했죠. 궁극적으로 되어야 하는 건 신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일 거예요.}

루이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니체를 신비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명백한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에르네스트가 어제 제목을 발표한 것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주제에 기반하여 모든 것을 다시 쌓으라는 뜻이 아닐 거예요. 그는 그렇게 비합리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는 우리들의 연주를 모두 들어 봤잖아요? 그러니 거기에 통합된 주제를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겠죠.}

에르네스트가 굳이 1차 리허설에 참가한 것과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제목을 발표한 건 변덕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밀어붙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느끼기엔 횡포에 가까웠지만, 일단 그의 관점을 믿고 다시 차분하게 돌아보면 답이 보인다.

{1차 리허설 때의 해석이야말로 루이만의 해석이었을 거예요. 거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갔다면 분명 어린이의 단계에 이르렀겠죠.}

난 손가락을 살짝 들어 자전거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요.}

루이의 이번 의무곡 연주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연주에서 아예 가능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에르네스트도 데릭도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제대로 된 방향만 잡는다면 지금이라도 절대 늦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루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니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짚어 보는 듯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난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잠시 후 그는 내가 말한 ‘이런 방식’이라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어린이가 되어 보겠다며 촬영 스케줄을 무시하고 자전거를 훔쳐서 돌아다니면 뭔가 기적적인 영감이 떠오를 거란 망상을 하는 건 꼴사납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아냐, 네 이야기를 듣고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루이는 자학하듯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훨씬 홀가분해져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겠지? 그래도 아쉽네.}

{아쉽다니요?}

{자물쇠 거의 다 딴 것 같았거든. 진짜 딱 한 바퀴만 돌아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루이는 옆에 있는 자전거의 자물쇠를 가리켰다.

거기엔 얇은 쇠꼬챙이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정말로 자물쇠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물쇠를 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비웃었다.

{이런 방식으론 10년을 해도 못 따요.}

{어…… 그래……?}

{에휴.}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물쇠 앞에 쪼그려 앉고는 머리핀을 하나 빼서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나와 루이는 그냥 멍하니 그녀가 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별로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물쇠를 보지도 않고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러다가 조금 지나면 싫증이 나서 못 하겠다고 포기하겠지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자물쇠가 틱 하고 풀렸다.

{이렇게 해야죠.}

구경하던 나와 루이는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방금 뭘 본 건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 어떻게 한 거예요?}

{……저 애 지금 1분도 안 걸리지 않았어?}

아나스타샤가 못 하는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물쇠를 따는 것도 잘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루이는 아나스타샤의 직업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빛을 했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타라는 거야?}

{소원이라면서요.}

아나스타샤는 자전거를 끌어내선 옆에 세웠다. 엉거주춤 일어난 루이는 멍한 표정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핸들을 만지작거리더니 페달을 밟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건물을 돌아 사라져 버렸다.

{어…….}

모든 것이 내 인식을 다 거치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당황한 나는 앉은 채로 일어서지 못했다.

그런 내 어깨를 아나스타샤가 짚으며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갈까?}

{어…… 루이는요?}

{저렇게 돌아다니다가 알아서 잡혀 오겠지. 자, 가자.}

아나스타샤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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