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3화
루이는 자전거를 타고 떠나 버렸고, 나와 아나스타샤만 남았다.
여기서 더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우리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촬영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산책이나 하며 가자면서 느긋한 걸음으로 신관 방향으로 향했다.
난 살짝 갈등했지만 어차피 한 바퀴 돌고 돌아가도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아니라서 그녀에게 응했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네.’
뮤직 샤펠에 온 지 시간이 꽤 되었다.
그사이 난 다른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친해졌지만 막상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와는 진득하게 놀거나 하지 못했다.
서로 바쁘기도 했고…… 같은 곳에서 온 우리 두 사람이 항상 뭉쳐 다니거나 하면 안 좋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심결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날씨 좋은 오후에 아나스타샤와 산책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음악이라는 요소를 빼놓고 보면 뮤직 샤펠은 잘 관리된 교외의 박물관 같은 풍취를 가지고 있었다. 그냥 주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실없는 이야기를 하던 아나스타샤가 이건 짚고 가야겠다는 듯 휙 돌아보며 말했다.
“넌 진짜 사람이 너무 착해서 문제야.”
“제가요?”
“그래. 힌트를 줘도 너무 많이 준 것 아니니? 덕분에 옆에서 들은 나도 느낀 바가 있긴 했지만.”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루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이번에도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난 주저앉아 있던 루이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싶었고,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책과 음악을 읽고 제가 이해한 바를 설명했을 뿐이에요…….”
“루이는 그걸 이해 못 하고 있었잖아.”
“그렇다고 쓴소리를 한 지휘자님을 같이 욕하면서 겉으로만 다독여 줄 순 없잖아요. 그게 제일 나쁜 거예요.”
“그건 그래.”
만약 그 자리에서 그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고 안타깝게만 여겼다면 그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냉정하게 보면 나와 아나스타샤의 커리어엔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런 결과론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도 거기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는 듯 싱긋 웃었다.
“어쨌든 루이는 너한테 두 번이나 구해진 거네?”
프랑스에서 한 번, 벨기에에서 한 번.
그렇게 말하니 무슨 유럽에서 만날 때마다 도움을 주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관심 있어 하는 것 같고.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는 호의 수준 그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는 몇 번 내 눈에 띄었을 뿐이다.
아나스타샤의 말을 들으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말씀하시진 마세요.”
“아하하, 그래. 넌 그냥 별생각 없이 곤란한 연주자를 구한 것뿐일 테니까.”
“그건 그것대로 바보같이 들려요…….”
사실 프랑스에서도 내가 무작정 끼어들었던 것이고, 이번에도 내 멋대로 떠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뭐라도 된 것처럼 구했다고 하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을 본다면 난 참지 못하고 끼어들겠지. 내 성격은 내가 잘 안다.
결국 더 반론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자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더니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도 곤란해지면 구해 줄 거야?”
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내 성격 같은 것에 따라 움직일 일이 아니었다. 난 거기에 대해 언제든 똑같은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해 드릴게요.”
내가 멈추자 아나스타샤도 슬쩍 멈추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어.”
“할 건데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말을 못 할 텐데?”
“엇…….”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과도하게 행동할 거란 걸 말로 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 때문에 말하지 못한 일도 꽤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잘 서지 않았지만 너무 무겁게 끌고 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일부러 미소를 보이며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가벼운 일일 땐 말씀하시기 전에 가볍게 생각해 달라고 미리 언질을 주세요.”
내가 걷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나스타샤는 다시 내게 멀어지듯 앞서갔다.
“그건 좀 웃기네.”
“웃겼으면 됐어요. 요즘 제 취미가 사람들을 웃기는 거거든요.”
“뭐야, 그게? 아하하하.”
듣던 중 가장 신선한 대답이었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뮤직 샤펠을 반 바퀴 돌아 중간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본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파이널리스트들을 확인한 후 근처에 있던 마리우스를 찾았다.
{아, 오셨습니까. 베르체노바 님, 이즈마일로바 님.}
이번엔 긴급 상황이었던 만큼 마리우스도 날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도 내가 뭘 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난 일단 루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서 호응할 생각으로 말을 삼갔다.
{상황이 잘 해결되었나 보네요?}
{예, 그렇습니다……. 디아라 님은 자전거를 타고 연못을 돌다가 잡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게…….}
마리우스는 설명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콩쿠르 파이널리스트가 리허설을 마친 후 갑자기 자전거를 탈취해서 돌아다니다가 검거되었다는 이야기는 듣기에 따라 좀 심각하게 들리기도 했다.
연주자의 정신 상태를 검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난 루이가 정신적 문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중의 기행이었음을 알지만…… 지금 마리우스를 설득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그 위의 사람들일 테니까.
그래서 대신 지금 제일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가 불이익을 받게 될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빌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긴 하지만 그건 안전 규정 때문이라서…….}
이 상황 자체도 잘 이해하지 못한 마리우스는 상당히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매년 여러 나라의 연주자들을 받으며 많은 상황을 겪지만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어차피 그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하더라도 감시를 더 붙이고 자유를 제약하는 등의 규제밖에 할 게 없다.
그래 봤자 그는 내일 여길 나가 무대에 오를 사람이니까 그마저도 별 의미 없었고.
잠시 생각하던 마리우스는 곧 조심스레 대답해 주었다.
{운영 위원회에 보고는 되겠지만 아마 해프닝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싶군요……. 혹시…….}
{예?}
{베르체노바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위원회뿐만 아니라 참가자인 우리의 시선도 신경 쓰고 있었다.
난 먼 곳에서 보이는 루이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힐긋 바라보았다.
모두 할 말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걱정이었다.
적어도 연주자들 사이에서 합의는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이즈마일로바 님은?}
{저도요. 자전거 정도야 마음껏 타라고 하죠, 뭐.}
사실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전거 자물쇠를 풀어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난 입을 꾹 다물었고, 마리우스는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습니다.}
그가 다른 직원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가고,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니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이번 일에 우리가 간섭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한 것을 잘했다는 뜻이었다. 그녀 역시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남은 건 루이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난 파이널리스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니 들리지 않던 말들이 들렸다.
{이 자식아. 혼자 재미있었냐?}
{음악 연구를 하다가 동심을 되찾고 싶었다고? 진짜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아니, 그럼 성공한 건가?}
그곳엔 루이를 향한 한바탕 성토의 장이 열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루이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연신 사과하기만 했다.
대충 보니 어느 정도 화내고 야단치는 일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알레한드로가 굉장히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 자식 잡혔어.}
{다행이네요.}
난 웃으며 대답하고는 루이를 돌아보았다.
한마디 하고 마주 보았을 뿐이지만 루이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바로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 눈빛에선 조금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난 이대로 좋다는 의미로 그에게 물었다.
{원하던 바는 얻어 내셨나요?}
{음…… 약간 갈피는 잡은 것 같기도 해.}
루이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것이 그의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니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자전거를 잠시 탄 것만으로도 이 젊고 유능한 연주자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이상 내가 바랄 건 없었다.
난 말을 아끼기로 하고 뒤로 슬쩍 빠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뭐라고?}
{자전거가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거야?}
{빌어먹을, 잠깐만. 자전거 어디 세워 놨어? 직원들이 가져갔어?}
뭔가 효능을 본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뿐이었는데도 모두가 그것을 원했다.
그만큼 모두 굶주려 있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루이가 나아졌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기도 했다.
모두 열정적이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알레한드로가 나서며 말했다.
{일단 지금은 우리 모두 촬영에 들어가야 해. 그러니 할 일을 우선 한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하자고. 특히 루이에겐 듣고 싶은 게 많으니까 도망칠 생각 말고.}
은근히 압박을 주면서 알레한드로는 팔을 걷었다. 여차하면 루이를 강제로 질질 끌고 다니기라도 할 것 같은 시늉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차피 못 도망간다는 거 잘 알아. 걱정하지 마.}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알레한드로보다는 옆에 있는 내게 향해 있었다.
내가 그를 바로 찾아낸 것 때문에 내 추리 능력을 꽤 높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알레한드로가 강력계 형사라면 난 프로파일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저었더니 루이는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