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74화 (1,274/1,277)

##  1274화

매스컴을 동반한 촬영은 무난하게 시작되었다.

작은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한 연주자가 그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건전한 사건은 기사거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콩쿠르 측에서 입단속을 시키기도 전에 기자진은 그 일은 어차피 기사로 쓸 생각 없으니 빨리 촬영이나 하자며 재촉했다.

‘별일은 없겠네.’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인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의 단체 사진을 찍고, 그 후엔 몇몇 지시에 따라 적당한 신을 연출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거나 토론을 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 것이었다. 다들 연기자가 아니었기에 조금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이런 일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토론을 하라는데…… 대체 무슨 토론?}

{니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되는 걸까요?}

{그럼 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겠는데요?}

나와 루카 아르젠토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심각하게 토론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루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몇 살이라고 했었죠? 열일곱?}

{맞아요.}

{요즘 열일곱 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놀죠? 동물 키워요, 혹시?}

{어, 예?}

{동물 키우냐고요.}

{개를 한 마리 키우긴 하는데…….}

반려견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나도 환영이었다.

벨카의 귀여움에 대한 토론은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으니까. 다만 스마트폰이 없어서 사진을 못 보여 주는 게 한이지만…… 그건 나중에라도 보여 주면 된다.

그렇게 막 반려견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루카가 이야기의 맥을 탁 끊어 버렸다.

{부럽네요. 전 못 키우는데.}

{……그, 그러세요?}

{사실 안 키우는 거긴 하죠. 날마다 산책시키자니 엄두가 안 나서.}

{그건 그렇긴 해요……. 그런데 저희 집은 알아서 뛰어놀게 두면 되어서…….}

{집이 얼마나 큰 거야?}

사실 말도 키우고 있긴 한데…… 그런 이야기까지 하면 대화가 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쨌든 이야기 내용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심각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으니까.

다행히 루카는 연기력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고양이 사료를 먹어 봤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기괴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난 거기에 맞춰 표정 관리를 하느라 상당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 촬영이 언제쯤 끝나려나 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슬쩍 보니 알레한드로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이럴 때 연주자들의 취미는 하나로 통합된다. 바로 현재 연주 중인 곡을 알아맞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듣던 루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건 무슨 곡이죠……?}

{퓨전 터키 행진곡 같은데요?}

{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 흔히 터키 행진곡이라고 불리는 이 곡은 여러 음악가의 손에 의해 재탄생된 명곡이었다.

알레한드로도 거기에 한 손 거들어서 편곡을 한 것 같은데…… 조성도 바뀌고 박자도 자유분방해서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터키 행진곡인지 모를 정도였다. 실제로 루카는 한참 듣고도 헷갈려 했고.

루카는 분하다는 듯 신음을 내더니 내게 말했다.

{좋아……. 1 대 0이에요.}

{지금 저희 무슨 대결하는 건가요?}

능청스럽게 묻자 루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기 있는 모두의 대결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된 것 아니었나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일주일 가까이 모여 살면서도 서로 그리 부딪치거나 할 일이 없었을 뿐이지, 사실 외부에서 보면 우린 치열하게 다투어야 할 경쟁자들이었으니까.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루카와 전 이미 경쟁자였네요.}

{그런 의미에서 베르체노바 양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니체에 대한 해석을 알려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 정보를 공유하긴 했지만 솔직히 당신만큼 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매일 탁구만 치는 줄 알았던 루카는 생각보다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다른 연주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워했고, 또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어서 말을 삼가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모여서 교류해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루카가 말했듯 우린 기본적으로 경쟁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 조금 이기적으로 군다고 해서 무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되레 그게 현명한 처세겠지.

그러나 내가 니체에 대해 공부한 것들을 알려 주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는 건…… 여기에 있는 이 순간이 기적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12명 모두 각 세계에서 손꼽히는 연주자들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지금 한자리에서 서로를 라이벌로 보고 있어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라는 역사 깊은 시스템이 존재하는 덕분에 이루어진 상황이다. 오래전 선배들과 지금의 어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라이벌들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귀하죠.}

{…….}

{그러니 소중하게 여겨야죠.}

흔치 않은 건 아껴야 한다.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뿐인데도 루카는 내 이야기를 깊이 경청하고 있었다.

우리를 찍고 있을 기자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셔터 찬스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좋았다.

난 루카가 내 솔직한 이야기를 바보같이 보고 있지 않다는 게 기뻤다. 적어도 우리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세우며 말했다.

{베르체노바 양이랑 이야기하면 배우는 게 많네요.}

{아뇨, 저야말로…….}

{전 말로 그렇게 뭔가 할 자신이 없으니까…… 피아노나 들려줄까 싶네요. 저 잡동사니 같은 연주 좀 치우고 말이죠.}

그는 훌쩍 일어나더니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잡동사니라는 거친 말을 쓰긴 했지만 그것도 그의 친밀감의 표현이라는 걸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

깔끔하게 모든 촬영을 마친 후, 그대로 우린 레스토랑으로 옮겨 가 저녁 식사를 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내일부터는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약간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간 정말 즐거웠었고, 내가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아서 모두 먼저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화려한 요리로 우리를 기쁘게 해 준 셰프에게 감사를 전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막 7시가 지나 있었다.

분위기는 살짝 어수선해졌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중심을 잡지 않으면 다들 어영부영 흩어지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나서야 하나 싶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항상 이럴 때면 먼저 나서 주는 알레한드로가 이번에도 모두를 끌어모았다.

{다들 저녁에 일 없지?}

공식 일정이 없는 한 우리는 일단 자유로웠다. 다만 내일 무대가 있는 세연과 루이는 별개였다. 세연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저랑 루이 오빠는 바쁜데요…….}

{그래, 바쁘겠지. 그래도 1시간도 못 내는 건 아니잖아?}

어지간해선 그 두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텐데. 알레한드로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일단 따라 달라고 말했다.

만약 혼자서 집중하기 위해 조용히 있고 싶다며 거절한다면 달리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가 괜히 시간을 빼앗아 내일 무대에 악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세연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아까 거기로 다시 모이자. 아까 몇몇 사람만 피아노 앞에 앉았었잖아? 기자들도 많아서 제대로 뭔가 하지도 못했으니 이번엔 우리끼리 놀아 보자고.}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정말 놀자는 것이었다…….

난 조금 당황해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도 자기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알레한드로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기자들과 카메라가 없어졌을 뿐인데 아까보다 훨씬 더 넓게 느껴졌다.

그 가운데, 알레한드로가 흩어져 있던 의자들을 한 번에 두 개씩 가져와선 피아노 주변으로 모았다.

{자, 그럼 누가 먼저 앉을래?}

모두가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밤이니 놀자는 건 좋지만, 이렇게 보고 있는데 피아노를 치는 것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잠시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알레한드로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 한 사람을 호출했다.

{루이, 너부터 나와.}

{나? 왜?}

{왜긴 왜야. 내일 무대에 서야 하는 거 아니야? 리허설은 한 번이라도 더 해야지.}

아무리 노련한 연주자라도 무대 위에선 긴장하기 마련. 때문에 그 전에 리허설도 자주 하고, 특히 다른 사람들이 봐 주는 리허설을 하면 긴장을 푸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곤 했다.

루이는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다부진 태도로 앞으로 나섰다.

{내일 프로그램 쳐 보라고?}

{아니, 뭐든 좋아. 에튀드 속주도 좋고 즉흥 연주도 좋고.}

루이가 어떤 곡들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무대에서 연주할 만한 대곡들은 뻔한 편이다.

다양한 레퍼런스를 접할 수 있어야 하며 심사 위원들로부터 점수도 잘 받고 관객들로부터 호응도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 만한 레퍼토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준비한 것을 다른 경쟁자 앞에서 보여 줄지 안 보여 줄지는 철저히 연주자 본인 마음이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꼭 들으란 법은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연주를 듣고 어떠한 정보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이득만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되레 내 음악이 흐트러지거나 실력 차이를 일찍이 느껴 버리고 멘털 관리에 실패하는 일도 많다.

때문에 무대에 서기 전까지 다른 연주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타입의 연주자들도 많다.

그래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처럼 파이널리스트들을 한데 모아 놓고 시너지 반응을 기대하는 건 연주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가해지는 방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린 이미 숱한 압력을 이겨 낸 역전의 용사들이다.

{협주곡 피아노 파트만 쳐 볼까? 지금 생각난 게 있어서.}

{마음대로 해.}

잠시 고민하던 루이는 아예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을 연주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그는 오늘 리허설을 망치고 멘털이 한 번 망가졌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제 컨디션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 없고 의문이 있는 건 분명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에르네스트의 협주곡을 꺼내 든 건 다분히 도전적인 선택이었다.

어차피 지금 우리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무대에서도 힘들 것이란 걸 예감했는지 루이는 다시 한번 음악을 확인하고자 했다.

난 기대 반 긴장 반으로 그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바로 연주할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해.’

그렇게 조금은 관용적인 태도로 감상하려 했던 나는 단 몇 초 만에 연구자의 태도로 바뀌어야만 했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루이가 앞선 리허설을 망쳤다는 게 사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금 오케스트라가 동반되지 않아서 빈 구석이 곳곳에 들렸지만, 그래도 이 음악이라면 충분히 제 기능을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그의 연주를 들으며 긴장이 서서히 옅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루이가 3악장의 한 파트를 짧게 연주했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처럼 알레한드로가 박수를 쳤다.

덩달아 우리도 모두 박수를 보냈다. 루이가 잘하기도 했지만 놀라서 따라 한 것도 있었다.

루이가 돌아보자 알레한드로가 물었다.

{오늘 리허설에서도 이렇게 쳤던 거야?}

{아니, 오늘은 전혀 다르게 했고 이건 첫 번째 리허설에서 했던 것에다가 조금 변화를…….}

{너 천재냐?}

대뜸 그렇게 말하니 루이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지금 여기엔 천재들이 즐비하다. 거기에서 당연하게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할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멈추지 않고 루이를 잔뜩 추켜세웠다.

{진짜 자전거 타더니 진리를 깨달아 버린 것 같은데? 오케스트라가 없어서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네가 이렇게 치면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따라올지 알겠어.}

{그…… 고마워.}

{오늘 데릭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은 아마 반쯤 기절하겠는데?}

그제야 난 알레한드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내일 무대를 앞두고 오늘 큰일을 겪은 루이를 일단 앞에 내놓고 크게 칭찬해서 자존감을 잔뜩 채워 줄 생각인 것이다.

그 의도를 눈치챈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거의 동시에 알아채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루이에게 칭찬 세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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