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5화
루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첫 순서로 나가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네.}
{네가 기대치를 너무 올려놓는 거 아니야?}
폭풍처럼 몰아치는 칭찬들이 그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물론 루이도 바보가 아닌지라 지금 우리가 일부러 조금 더 텐션을 올려서 평소엔 잘 하지 않을 말들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실질적인 효과는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그…… 고마워, 모두들.}
루이는 어색하게 감사를 표했다. 평소 점잖은 편인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상당히 희귀했다.
진심으로 모두들 그를 위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진 듯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다음 차례는 세연이었다.
{어, 나도 하라고?}
{당연하지.}
내일 무대에 설 연주자들을 피아노에 앉히고 무조건 칭찬한다. 이건 그런 행사였다.
약간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력 평가 같은 것보다는 멘털 케어에 중점을 둔 일이었으니 절대 폄하할 일이 아니었다.
경험 많은 알레한드로가 지금 우리에게 딱 필요한 것을 제안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되자 세연은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던 이연주가 잘 이야기해 주었다.
「얼른 가 봐, 세연아.」
「그치만…….」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진짜로.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해 봐.」
그냥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싫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사람에게 검증받을 절호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는 연주자로서의 판단이 상충하여 갈등 중이란 것이 세연에게서 느껴졌다.
잠시 후, 세연은 마음을 다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지한 조언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일어선 세연이 루이와 교대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 곡은 루이와 똑같이 에르네스트의 협주곡, 영겁 회귀의 3악장이었다.
‘확인해 달라는 음색이 들리네.’
어떻게 보면 루이와 정면 대결을 위해 같은 악장을 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연에게서 그런 호전적인 퍼포먼스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녀 역시 자신이 준비한 것을 고스란히 선보일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훨씬 경험 많은 성인 연주자가 앞서 쳤던 음악을 똑같이 치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성을 지킨다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음악에 영향을 받기 쉬운 연주자는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도 모르게 잘 흔들린다는 점에서 세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앞서 루이가 도전적으로 임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세연 역시 쉽게 저 자리에 선 것이 아니었다.
난 세연을 믿으며 두 손을 모아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자신의 실력을 믿을 만한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만 확실하게 붙잡는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처음에 살짝 불안정했던 음색은 점점 차분해지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연주가 자랑스러워하겠는데?’
오전에 만나서 이야기할 때만 하더라도 세연은 어제 이연주에게 니체에 대해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며 칭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들어 보니 이미 세연은 이 음악을 상당히 근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철학적으로 합리성을 따지거나 할 정도로 언어로 된 이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연주자들은 음악으로 이해하기 마련이었다.
세연 나름의 연구, 리허설 때의 오케스트라, 이연주의 설명 등이 모두 합쳐져서 세연의 직관적 사고력을 이루었고 그건 그대로 높은 음악 지능에 결부되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마음에 들어.’
세연은 내게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이번 콩쿠르에서 그녀는 확실하게 자신만의 방향성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여러 경험을 착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덕분이었다.
지금 세연의 연주는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녀만의 것이었다. 난 그것이 무척 기뻐서 축하해 주고 싶었다.
{둘 다 대단한데!}
{잘하네, 정말.}
{내일 무대가 정말 볼만하겠는데? 우리가 그걸 못 본다는 게 아쉽네.}
아까 루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연에게도 잔뜩 칭찬이 전해졌다.
연주를 못 했는데 위로의 의도로 칭찬하면 그건 놀리는 것밖에 되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정말로 세연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보여 준 연주는 확실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할래.’
난 만에 하나 세연이 약간 흔들림을 보인다면 루이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적절한 조언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연주를 듣고 난 뒤 확신했다. 내가 나서는 건 그야말로 주제 넘는 일이 될 것이란 것을.
세연은 일정에 맞추어 내일 연주가 가능하도록 충분히 잘했다. 거기에 내가 무언가 더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안 좋은 영향이 될지도 모른다.
가만히 지켜보니 세연도 곧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내 평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꼭 내게 평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낼 수 있는 건 미소뿐이었다.
***
세연은 타티아나가 평소엔 상냥하지만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깐깐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루이와 세연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칭찬 일색으로 마구 추켜세워 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문제가 보인다면 타티아나는 분명히 조용히 다가와서 한마디 할 사람이었다.
때문에 세연은 은근히 타티아나의 피드백을 기대하고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가만히 앉은 채로 환하게 웃기만 했다.
‘아.’
기묘한 기분이었다.
바라던 피드백을 못 받으면 이전엔 조금 불안하거나 했었는데, 지금은 기이할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 세연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어렴풋하던 믿음이 확신이 되며 보다 견고해졌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비단 타티아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훌륭한 피아니스트들도 모두 세연을 인정하며 응원 중이었다.
세연은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의자로 다시 돌아오자 다음은 앤서니가 나섰다.
{두 사람이 너무 멋진 걸 보여 줬네. 난 그냥 살살 놀아 볼까.}
세연과 교대한 앤서니는 재즈풍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들어 본 기억이 전무할 걸 보니 즉흥곡 같았는데, 미국 스타일의 재즈는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지금 앤서니가 콩쿠르 프로그램을 더 연주하지 않은 건 불필요하게 루이와 세연을 자극하거나 긴장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선곡에서도 섬세한 배려심이 느껴졌다.
자리로 돌아온 세연은 이연주의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것 봐. 잘했잖아?」
「언니 덕분이에요.」
「내가 어제 늦게까지 니체에 대해 설명해 준 보람이 있는 건가?」
그래서 뭘 이해했냐고 묻는다면 말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어도 음악으로는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연은 지금 꽤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이죠!」
앤서니가 짧은 연주를 마치고 박수를 받고 내려갔다.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이젠 알레한드로가 주도하지 않더라도 방으로 혼자 돌아갈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만한 동시대 실력자들과 함께 평가를 생각하지 않고 아무 곡이나 연주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음은 누가 할래?}
앤서니의 물음에 연주자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알레한드로……는 아까 촬영하면서 했었지. 그 이상한 터키 행진곡은 상상도 하기 싫네.}
{뭐라고, 이 자식아?}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타티아나가 슬며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가 움직이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녀에게 향했고 이 공간의 주인공이 단번에 바뀌었다.
{자.}
{감사합니다.}
피아노에서 물러난 앤서니가 정중한 제스처로 타티아나를 안내했다. 마치 이렇게 하기로 연습이라도 미리 해 둔 사람같이 보일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잠시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약간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직전의 앤서니와 마찬가지로 타티아나 역시 지금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즉흥 왈츠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깔린 음악은 이 휴게실을 프랑스풍의 살롱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표현력은 정말…….’
살롱 음악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던 클래식 음악에서 왈츠와 무도회는 빼놓을 수 없는 카테고리였다.
타티아나는 독주자로서의 기량이 탁월하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이렇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분위기를 아우르는 기능성 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역할도 너무나 충실히 잘 수행했다.
이야기를 해도 좋을 정도로 잔잔한 왈츠가 흐른다. 그건 여기 있는 음악가들에게 향하는 일종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꽤 길게 이어질 것이니 그사이 각자 이야기를 하며 이 시간을 즐기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정말로 몇몇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말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음악과 잘 어우러져서 마치 하나의 노래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레베카.}
{응?}
{춤이라도 출래?}
앤서니의 제안은 조금 느닷없었지만 세연은 무릎을 탁 쳤다. 무언가 빠졌다 싶었는데 바로 왈츠에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한 앤서니는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 딱 맞는 절묘한 제안이라는 걸 알아본 레베카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더니 앤서니에게 물었다.
{왈츠 좀 춰?}
{확인해 봐.}
{입만 산 건 아닌 것 같네. 음, 좋아.}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비어 있는 중앙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서로에게 인사하더니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즉흥적인 음악과 즉흥적인 춤이었지만 너무나 화려하고 멋있었다.
그 자유로움과 자신감이 드러나는 종합 예술의 향연은 세연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는 광경이었다.
세연은 부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평생 피아노만 하고 살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교양으로 춤 같은 걸 배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기지 좀 말아 줄래?}
{그럼 어떻게 하라고? 밀어?}
{으아아, 넘어져!}
물론 앤서니와 레베카는 댄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안 맞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가볍게 장난을 치듯이 춤을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연은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더 열리는 것을 느꼈다.
문득 세연은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린아이처럼 음악을 즐기고 순간을 즐기는 것이란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