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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1276화 (1,276/1,277)

##  1276화

앤서니와 레베카가 왈츠를 추고 있는 걸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건 비단 세연뿐만이 아니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를 연주 중이니 남은 건 3명. 이연주와 세연 그리고 아나스타샤였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이연주에게 레이가 다가와 춤을 신청했다.

세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으나 이연주는 소심한 성격 탓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나가서 춤을 추는 건 극히 부담스러워했다.

그래도 권해 준 레이에게 미안한지 이연주는 몇 번이나 사과했고 레이도 크게 마음에 두진 않는 듯했다.

아나스타샤에겐 렌스키가 다가갔다. 세연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러시아어로 대화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잘되어서 춤을 추게 된다면 상당히 볼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나스타샤도 거절했다.

렌스키도 시무룩해하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걸 보니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본데…… 세연으로선 약간 실망스러운 결과이긴 했다.

그런데 세연이 간과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만 춤 신청이 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세연 양.}

{헉.}

알레한드로가 세연을 불렀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세연이 불릴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왈츠가 흐르고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 상황에 어울리는 건 지금까진 남의 일이었지만 갑자기 자기 일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알레한드로는 열 살이나 연상이었다.

서구권에선 이 정도 나이 차이도 그냥 친구로 지내는 일이 흔하다지만 세연에겐 까마득한 어른으로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세연은 어지러워졌다. 알레한드로가 갑자기 관심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거절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멘트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세연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말았다.

{그…… 죄송해요. 전 교양 없는 애라서 왈츠 출 줄 몰라요…….}

{누가 뭐랬어?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런데 세연의 말에 알레한드로는 놀라면서 누가 괴롭혔냐는 듯 옆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제야 세연은 지금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되자 알레한드로는 착각을 알아차리고는 폭소하기 직전에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설마 내가 춤 신청하는 줄 안 거야?}

세연은 차마 대답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창피해서 이대로 불타 죽어 버릴 수 있다면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못 참은 알레한드로가 껄껄 웃었다.

{푸하하하, 열일곱 살짜리한테 그랬다간 우리 와이프한테 총 맞아 죽어.}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기혼자이기까지 한 알레한드로에게 뭔가 엄청난 실례를 한 것 같아서 세연은 그를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알레한드로는 상황이 웃긴지 한참을 더 웃더니 세연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는 없었다는 듯 본론을 바로 꺼냈다.

{어쨌든 내일 무대에 서야 하는데 긴장도 별로 안 하고 잘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 붙여 봤어.}

{긴장하게 해 주려고요?}

{왜 내 말을 자꾸 곡해할까?}

{긴장하고 있나 봐요…….}

정말이었다.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땐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그리 긴장하거나 할 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과 똑같은 무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현실감이 든 것이다.

그런 세연의 부담감을 알아봤는지 알레한드로는 조금 더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피아니스트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뭐라고 생각해? 실력?}

역시 실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알레한드로가 이미 말했으니 다른 대답을 해야만 했다.

뭔가 그럴싸한, 특이한 대답을 궁리하던 세연은 지금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타티아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 외모?}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 후줄근한 연주자는 아무리 좋은 연주를 해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니까.}

세연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막 뱉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의외로 알레한드로는 세연을 바보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 주었다.

비로소 세연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알레한드로가 웃었다.

{아무튼 그런 걸 통틀어서 피아니스트가 추구해야 할 건 설득력이야.}

{아.}

{딱히 평가받거나 싸울 생각은 없다고 전하는 설득력, 긴장 풀고 이 순간을 즐기자는 설득력, 이 장소에서 춤을 추어도 좋다는 설득력.}

알레한드로가 말하는 예시는 다름 아닌 타티아나였다. 세연이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그녀를 떠올렸듯 알레한드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로 사람을 설득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녀가 사랑의 음악을 연주하면 가슴이 설레고, 슬픔의 음악을 연주하면 눈물이 흐른다.

심지어 겨울의 음악을 연주하면 손발이 시리고 소름이 돋는 경험을 느낄 정도였다.

지금 역시 타티아나는 가벼운 왈츠 선율로 사람들을 춤을 추게 만들었다.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타티아나의 표현력은 대단하죠……. 뭘 해도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 버려요.}

{그건 너도 똑같아.}

{예?}

놀란 세연이 펄쩍 뛰자 알레한드로는 왜 그렇게 반응하냐며 킥킥거렸다.

{아까 네가 보여 줬던 진지한 연주에서 난 네가 정말 즐기고 있다고 느꼈거든. 남들이 무어라 하든 네가 연습한 대로 하겠다는 고집도 느껴졌고, 바로 지금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앞에 있으니 똑바로 보라는 설득력이 느껴졌지. 그런 게 바로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라고 생각해.}

세연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고평가를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음,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나? 뭐 상관없어.}

애초에 이 자리는 루이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때문에 세연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알레한드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넌 내일 잘할 것 같으니까.}

그는 세상에 추악한 경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경쟁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음악가로서의 그런 가치관은 은근히 타티아나와 비슷하기도 했다.

세연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리고 지금, 세연은 생각난 말을 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타티아나는 늘 제 목표였어요.}

무심결에 내뱉은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알레한드로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스스로에게 약속하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거든요. 제가 원하는 것을 꿰뚫어 보고 완성된 것을 앞서 보여 주는…… 10년을 더 연습해도 보일까 말까 한…….}

애초에 생각해 두었던 말이 아니다 보니 두루뭉술하게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똑바로 말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그 배려 깊은 침묵에 기대어 세연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에요.}

여전히 타티아나는 땅이 아니라 저 멀리 하늘 어딘가에 있는 사람처럼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세연의 말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세연은 멈추지 않았다.

{제 무대는 여기 있는 누구도 보지 못하겠죠? 그러니까 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세상 사람들과 마주하고 제 연주를 할 생각이에요.}

언제나 무대에 서거나 연주를 할 때면 타티아나가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타티아나의 관점과 평가야말로 세연이 좋은 음악을 판가름하는 절대적 바로미터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타티아나는 평가를 내려놓았고, 세연은 거기에 불안감보다는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내일 있을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보지 못할 테고 그저 잘할 것이라고 믿어 주고 있으리라.

세연이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믿는 사람들이 나중에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충분하게 믿어 준 음악을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알레한드로는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현실적이고 좋은 마음가짐이네.}

{……이런 자리 만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여러모로 용기를 얻고 있는 것 같아요.}

루이가 제 컨디션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도, 세연이 마지막 자신감을 얻은 것도 그리고 이 멋진 즉흥 왈츠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알레한드로가 적극적으로 모두를 모은 덕분이었다.

세연은 다른 건 잘 몰라도 이번 파이널리스트들 중 만약 알레한드로가 없었더라면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걸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참가자 중에 알레한드로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감사를 전하며 바라보자 알레한드로는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는 정말로 응원만 해 주고 가려고 온 것이었다.

{하하, 뭐 더 길게 시간 빼앗지는 않을게. 조금만 더 어린애처럼 마음 놓고 놀다가 가.}

{어린애처럼 춤추지 않으실래요? 제가 잘 못 하긴 하는데…….}

{총 맞는다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더니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 보이기까지 했다. 세연은 까르르 웃으며 그의 농담을 받아 주었다.

{아하하,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제가 적극 변호해 드릴게요.}

{아니, 그런 걸로는 총을 못 막아.}

{……예?}

{총 본 적 없어?}

세연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 알레한드로가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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