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1277화 (1,277/1,277)

##  1277화

알레한드로가 주최한 작은 파티는 1시간 정도 이어졌다.

루이와 세연도 긴장을 풀고 잘 놀고 있었으니 파티의 목적은 매우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었던 건 역시 즉흥 연주 대결이었다.

처음엔 앤서니를 필두로 그냥 서로 적당한 즉흥곡이나 편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딱히 대결의 의미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일 무대에 서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왈츠를 연주하며 파티 분위기를 끌어 올리고 나자 거기에 살짝 도취되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즉흥곡으로 연주에 도전했다.

자연스럽게 상황은 조금씩 에스컬레이션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이런 걸 해 볼 일이 별로 없으니 무척 즐거웠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즉흥 연주에 강한 건 나와 앤서니 두 사람 정도였다.

앤서니는 재즈적 감각이 상당히 독특하고 뛰어나서 듣기 좋은 연주를 했고, 난 딱히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거의 무한정하게 곡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나중엔 내가 앤서니의 연주를 한 번에 듣고 편곡하자 그가 기겁했다.

{머릿속에서 푸리에 변환이라도 가능한 거야?}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선율을 각각 분석하는 능력을 말하고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내 음악 분석 능력은 망가지거나 퇴화하는 일 없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전해 왔고, 지금은 가히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예전엔 선율이 세 개가 넘어가면 그다음은 추리의 영역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전부 있는 그대로 들렸다.

화성의 이해도도 깊어져서 처음 듣는 곡이라고 해도 어떻게 하는 게 나은지 곧바로 깨닫고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내가 이렇게 음악가로서 강해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자고. 다들 쉬어야 할 테니까.}

조금 아쉬웠다. 마음 같아선 주방에서 음식이라도 좀 해 와서 같이 먹고 놀며 시간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달리 루이와 세연은 내일 무대가 신경 쓰일 것이다. 혼자서 마지막 연습도 해야 할 테고 컨디션 관리도 중요했다.

모두 모인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시간을 더 쓰는 건 방해가 될 터였다. 지금 딱 적당하게 아쉬운 정도에서 해산하는 것이 좋았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갈까?}

모두 아쉬워하자 알레한드로가 제안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에 가장 좋은 건 역시 사진이었다.

{사진을 어떻게 찍어?}

{우리 스마트폰 다 압수당했잖아.}

모두 그럴 수만 있었다면 이미 백 장은 더 찍었을 거라는 듯 물었다. 알레한드로는 피식 웃더니 문 쪽을 가리켰다.

{직원한테 찍어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우리 주변엔 뭘 하든 항상 지켜보는 직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우리와 달리 전자 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걸로 무언가 찾아봐 달라거나 외부에 연락하고 싶다는 건 들어주지 않겠지만, 지금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콩쿠르가 모두 끝난 후에 메일 같은 것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것 정도는 딱히 규정에 어긋날 일도 아니었다.

이미 촬영이라면 수없이 하기도 했고.

알레한드로가 직원에게 가서 무어라 이야기하자 길게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자, 의자들 치우고…… 여기 피아노 주변으로 서 보자.}

파이널리스트들의 비공식 파티 사진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무렇게나 찍을 순 없어서 우린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바로잡았다.

지금 찍는 이 사진이 앞으로 수 년, 수십 년 후에도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바로 서자 직원이 스마트폰을 이쪽으로 향했다.

{찍겠습니다.}

기자들이 가지고 왔던 DSLR과는 상대도 안 될 스마트폰 카메라였지만 추억 사진을 찍는 데엔 충분했다.

포즈를 바꿔 가며 몇 번 찍고 나자 몇 명이 우르르 달려가선 사진을 확인했다. 반응들을 보니 꽤 잘 나온 모양이었다.

너무 마음에 든다며 좋아하던 레베카가 갑자기 직원에게 은근히 부탁했다.

{저기요…….}

{예? 말씀하시죠.}

{잠깐만 제 SNS에 로그인해서 그 사진 올리면 안 돼요?}

사진까진 흔쾌히 들어주었던 직원도 그 부탁엔 난색을 표했다. 어떻게 봐도 선을 넘은 부탁이었다.

레베카에게 힐난이 쏟아졌다.

{레베카…… 너 그거 중독이야, 중독.}

{스마트폰 보자마자 정신 못 차리는 거 봐.}

{10년 전엔 어떻게 살았냐?}

종류별로 다양한 핀잔에 레베카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너만 그러니까.}

{말만 안 하지 여기 다른 애들도 똑같을 걸? 안 그래, 타티아나?}

그녀는 제발 도와 달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난 그녀에게 가장 도움이 안 될 사람이었다.

{전 SNS를 안 해서…….}

{뭐?!}

믿을 수 없다는 듯 레베카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반응은 이제 자주 봐서 익숙할 정도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클레어도 비슷한 반응이었고…… 그냥 적당히 계정을 하나 만들어 놓아야 할까 보다.

하지만 레베카는 약간 다른 방면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나같이 다른 사람한테 좋아요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겠지…….}

축 처진 레베카에게 그녀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거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허둥거리는 사이, 앤서니가 매몰차게 한마디 더 얹었다.

{이참에 좀 끊어.}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춤까지 같이 췄는데 그렇게 나오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런 빙하 같은 남자가 다 있나 싶다. 너무하다 싶어서 바라보니 그는 그냥 레베카를 놀리는 데에 재미가 들린 것뿐인 것 같았다.

그에게 악의가 없고 레베카도 크게 상처받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지만…… 이번엔 레베카의 편을 살짝 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도 앤서니가 잘못했어요.}

{내가 대체 뭘?}

{레베카가 하는 SNS 앱은 미국에서 만든 거잖아요.}

{……?}

앤서니는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레베카는 말도 안 되는 꼬투리라도 일단 잡았으면 되었다는 듯 달려들었다.

{그래! 미국인들이 내 인생을 망쳤어! 그러니 미국인인 네게도 책임 소지가 있는 거야!}

{진짜 어이가 없네…….}

너무 논리가 없는 막무가내 주장이라 앤서니도 이번엔 냉정하게 말하지 못하고 황당해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가 쥐고 있던 주도권은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은 다시 아옹다옹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그냥 재미있을 뿐이었다.

{이만 들어갈까? 다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자고.}

알레한드로는 먼저 손을 흔들고는 휴게실을 나가 버렸다. 사람들을 모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해산시킬 때도 그는 앞장섰다.

난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연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고도 그저 밝게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세연의 연주를 듣고 평가가 아닌 미소로 갈음했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만만한 웃음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내 차례가 온 건 아니었지만 일찍 일어난 나는 언제 내 차례가 와도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도록 평소와 똑같은 루틴으로 아침을 보냈다.

연습까지 해서 아침 일과를 마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본관 로비 쪽으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몇몇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타티아나도 왔네.}

{루이랑 세연이 가는 거 보려고?}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

긴 기간 진행되는 파이널 라운드 동안 뮤직 샤펠에선 하루에 2명씩 나가게 된다.

크기만 클 뿐이지 이곳이 사실상 연주자 대기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대기실의 분위기는 콩쿠르마다 상이하다. 때론 서로 응원할 때도 있고, 어쩔 땐 아주 냉랭하고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다행히 뮤직 샤펠의 분위기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우린 그간 다투거나 한 적도 없었고 모두 각자의 실력을 최고로 끌어 올리기 위해 애써 왔다.

후회 없이 이 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만 모인 곳에선 으레 그에 걸맞은 뭉근한 열기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그 열기는 기분 좋게 사람을 달구고 웃게 만들었다.

실없는 잡담을 나누며 10여분 쯤 기다렸을까. 루이와 세연이 짐 가방을 들고 로비로 나왔다. 그 뒤편에선 직원들이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오, 가는 거야?}

{우리 버리고 가지 마.}

킬킬거리는 웃음과 농담이 쏟아지자 루이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약간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떠나는 것 자체야 이미 정해진 일이지만 그래도 그간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어차피 나가서 또 보면 되잖아?}

{다들 멀리 살긴 하지만…… 못 볼 건 없지. 안 그래? 아쉬워하지 마.}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요즘 시대엔 사실 언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볼 수 있었다.

루이는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틱틱거리며 대꾸했다.

{누가 아쉬워했다고 그래? 이제 나가서 자유를 누릴 생각을 하니 신나기만 하네.}

{그래, 그래.}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았다.

세연은 아예 다가와서 한 사람씩 포옹해 주었다. 정말로 어디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눈물까지 보이며 잠시 안녕을 고하던 그녀는 내 앞에도 다다랐다.

{타티아나…….}

세연은 뭔가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지 머뭇거렸다. 그래서 난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살짝 다가가서 안아 주었다.

{먼저 가서 보여 주세요. 세연이 어떤 연주자인지.}

{응…… 알았어.}

인사가 더 길어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해낼 테니까.

그렇게 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뮤직 샤펠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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