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쓰레기 매립지
"이 눈깔도 적출해가자!"
정신이 흐릿하고 가물가물한 데,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가 날 깨웠다.
"멍청한 새끼. 눈깔은 시신경까지 살려서 적출해야하고 곧바로 저온보관해야해. 너 휴대용 냉동가방이라도 가져왔어?"
"브레드, 지금 누가 더 멍청한지 가려보자는 거야? 다른 장기는 몰라도 눈깔은 고이어 연구소에 팔면 돼."
"고이어 연구소? 데니스, 자네가 고이어 연구소에 줄을 댈 수 있다고?"
"내 처남이 그 연구소에서 경비로 일하는 건 몰랐나보지?"
그건 한국어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언어였지만, 어색하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 기이한 현상에도 신기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내 눈을 뽑아갈 지 말 지 논의하는 도둑놈들에게 집중하기엔 너무 강렬한 통증이 몰아쳐왔기 때문이다.
숨 쉴 때마다 타들어가는 듯한 숨구멍.
신선한 공기가 들어갈 때마다 두드려 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가슴.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이후, 안 좋은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기이할 정도로 또렷해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통과 의식을 분리하고 문제를 파악하려는 의식흐름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눈앞에 묘한 글씨가 떠올랐다.
< 기계안을 탈취당했습니다. >
< 좌측 시력과 통신기능, [전투보조 시스템]을 잃었습니다. >
< [생명유지장치]를 탈취당했습니다. >
< 호흡과 혈액유통을 도울 수 없습니다. >
< [베터리]를 탈취당했습니다. >
< 남은 에너지로 12분 17초 동안 가동할 수 있습니다. >
< 새로운 동력원을 확보해주십시오. >
< 사용자님의 건강상태를 분석해 생존가능 시간을 계산합니다... >
< 1시간 24분 이후 호흡이 불가능해집니다. >
< 경고! 조속히 생명유지장치를 확보하십시오! >
그건 명확한 한글이었다.
"너 누구야! 여긴 대체 어디고? 내 몸은 대체 왜 이렇게 아픈거지?"
난 메세지를 띄우는 미지의 존재에게 따졌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뭐야? 이 놈, 살아있잖아!"
방금 전까지 내 눈을 적출해가자던 데니스란 자는 내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브레드라는 남자는 달랐다.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했는데 말을 하네?"
그와 동시에 내 목 뒤를 더듬어 뭔가를 확인하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태연히 내 오른쪽 눈꺼풀을 뒤짚어보며 상태를 살폈다.
"이봐. 운 나쁜 친구, 날 알아보겠나?"
그 순간, 다시 눈앞으로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왔다.
< 우측 안구 적출 시 모든 시야를 잃게 됩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날 내려다보는 브레드라는 남자의 무감정한 눈동자와 시스템 메세지는 소름끼치는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 약탈자가 우측 안구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
< 적극적으로 대응하십시오! >
< 안구 적출로 추가 출혈이 발생할 경우 생존가능 시간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에 따라 브레드라는 놈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인 건 내 어깨 뿐이었다.
"이, 이게 뭐야...! 팔다리에 감각이 안 느껴져!"
< 양팔과 다리를 탈취당하셨습니다. >
< 기동력과 자기방어 능력을 상실하셨습니다. >
<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
끔찍한 시스템 메세지에 놀란 난 고개를 들어 팔다리부터 살펴보았다.
단지 고개를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깨져나가는 듯 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도 팔다리에 감각이 없다는 두려움을 이겨낼 순 없었다.
"뭐, 뭐야! 내 몸이 왜 이 모양이지?"
팔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에서, 다리는 고관절과 무릎 사이에서 절단돼 있었다.
문제는 방금 잘려나간 모습이 아니란 점이었다.
금속으로 마감된 절단면이 날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기계 의수와 의족 또한 탈취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의족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부터 의족 따위를 달고 있었다고?'
< 해당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
난 그제야 이 미지의 시스템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걸 파악했다.
< 약탈자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
< 유언을 남겨주십시오. >
하지만 놈은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고 유언 따위를 언급했다.
막다른 골목에 막힌 내게 유언을 남기란 건 마치 조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봐. 당황스러운 상황인 건 알겠지만 진정하라고."
내 팔다리와 왼쪽눈 그리고 목 뒤에 삽입되있던 생명유지장치라는 보조기구까지 약탈해간 주제에 브래드란 놈은 태평하게 얘기했다.
싸이코패스가 있다면 이런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정신을 차리자 놀랐던, 데니스란 놈까지 내 남은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몸으로 팔다리를 구분하다니, 이 정도면 신선한 편 아닌가?"
"수통에 넣어가면 변질되기 전에 팔 수 있겠어."
놈들은 이미 내 남은 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그걸 무슨 연구소에 팔면 돈이 될거란 사실까지는 알았다.
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두려움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느낀 그 순간이었다.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힌 정신과는 반대로 내 눈은 주변부터 살피고 있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눈은 돌파구를 찾았다.
분리수거도 하지 않고 쌓아올린 쓰레기 산.
그 중턱에 누운 나.
상의를 벗어 왼쪽 가슴부터 왼손 끝까지 기계로 개조한 모습을 드러낸 브래드.
양쪽 눈 모두 기계안으로 개조한 데니스.
'물리적으로는 대응할 방법이 없어.'
그 순간 두 사람이 옆에 내려놓은 커다란 짐더미가 보였다.
그 안엔 온갖 종류의 고철이 뒤섞여 있었다.
'쓰레기 장에서 고철을 줍는 사이보그 약탈자들이라...?'
그들의 짐을 살피고나서야 희망이 보였다.
그건 기이한 경험이었다.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힌 것도 나였고 두려울 정도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돌파구를 찾는 것도 나였다.
하지만 이 두 사고가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마치 내가 둘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두 분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돈될만 한 물건을 찾으셨나보군요?"
컴퓨터처럼 병렬사고하는 것에 놀라는 와중에도 난 두 약탈자에게 제안을 건넸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절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주신다면 사례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 관심없다는 태도였던 두 사람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려며 내게 물었다.
"병원?"
"네까짓 놈이 병원에 가겠다고?"
브래드와 데니스는 내 몸과 자신들이 훔친 내 팔다리를 번갈아보며 뭔가를 가늠하려는 표정이었다.
"원하시는대로 제 눈을 뽑아가면 얼마나 벌 수 있겠습니까? 전 몸에 지닌 것보다 계좌에 더 많은 돈을 보관해놨습니다. 절 병원으로 옮겨주시면..."
"계, 계좌? 브래드..."
데니스란 놈은 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표정을 굳히더니, 계좌라는 단어를 듣고는 브래드의 기계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내저어보였다.
"멍청한 새끼.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진 놈이 계좌가 있겠어? 저 놈이 살려고 구라를 치고 있는 거라고!"
브래드는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날 보는 눈에 서린 꺼림칙한 감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3등 시민일지도 모를 사람의 눈을 뽑자고?"
"이 놈이 3등 시민이었으면 진작 신고했겠지. 그랬으면 우린 벌써 시경찰에게 살해당했을 거라고!"
"저 놈이 정신차리기 전에 통신모듈이 달린 기계안을 적출한 건 우리야. 놈이 정신차린 후엔 신고하고 싶어도 신고할 방법이 없었겠지."
"네 말대로 놈이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면 놈이 3등 시민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니야?"
"그만. 그만! 겨우 몇백 크레딧 벌자고 그런 위험을 안을 순 없어. 만약 이 자가 3등 시민이면 생체정보도 등록됐을텐데, 그럼 고이어 연구소에 안구를 넘기는 순간 우린 죽은 목숨이야!"
"그럼 더 이 놈을 죽여야지. 이미 우리가 한 짓을 다 봤잖아?"
브래드의 독한 말에도 데니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짐더미에서 내 것으로 보이는 기계팔 따위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방치해도 알아서 죽을 놈인데 왜 내 손에 피를 묻혀야하지? 네가 원하면 이것들은 다 가져도 좋아. 난 이 일에서 손 떼겠어!"
데니스는 브래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이, 이봐! 데니스... 이 개자식!"
브래드는 데니스가 사라진 방향과 날 번갈아보며 갈등하고 있었다.
날 죽여서 범행의 흔적을 지워버릴지 아니면 데니스를 따라 도망칠지 고민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내 몸을 돌려주면 없던 일로 해드리죠. 원하면 날 따라오셔도 좋습니다. 친구분 몫까지 사례금을 드릴수도 있습니다."
"개수작 부리지마! C구역까지 데려가서 날 죽일 생각인 걸 모를 줄 알고?"
브래드는 내 달콤한 말을 듣더니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어차피 내가 손을 안 대도 몇 분 못 버티고 죽을 놈인데, 나 혼자 죄를 뒤짚어 쓸 필요는 없겠지."
놈은 곧바로 데니스가 버리고 간 내 팔다리를 주워들고 사라져버렸다.
"저런 병신같은 놈들 때문에 죽을 고비에 놓이다니...!"
겁만 많고 독하지 못한 놈들이었다.
3등 시민이 정확히 어떤 계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깔끔하게 죽여서 나중에 문제될 소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콜록, 콜록!"
긴장이 풀리자, 기침이 멈추지 않고 터져나왔다.
혀끝에서 쇠맛이 느껴졌다.
호흡기가 맛이 갔는지 피가 베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경고! 호흡기에 내부출혈 발생! >
< 생존가능 시간을 계산합니다...>
< 37분 이후 호흡이 불가능할 예정입니다. >
< 생명유지장치를 확보해주십시오! >
붉게 점멸하는 경고 메세지가 쉴 새 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한거지?'
난 분명 방금 전까지 내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지러움에 눈 한번 깜빡였더니, 팔다리를 잃고 쓰레기장에 버려진 신세가 돼버린 것이다.
마음 같아선 쓰레기 산을 기어내려가서라도 살길을 찾고 싶었다.
"콜록, 콜록... 칵, 퉷!"
하지만 기침할 때마다 이는 피거품이 숨구멍을 막지 않도록 뱉어내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내 의식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며 살길을 찾았다.
절망이란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아주 냉정하게 희망을 찾는 의식의 공존은 내가 느끼기에도 괴이했다.
***
몸이 바뀌면서 정신마저 어떤 영향을 받은 게 아닌지 걱정하는데, 멀리서 아련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멀었던 폭발음과 고성이 가까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꽈광! 하는 소음과 함께 날아와 땅에 처박힌 소녀와 거구의 남성.
하지만 일어난 사람은 찢어진 청바지에 탱크탑만 걸친 빨강머리 소녀뿐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와 새빨간 머리카락.
커다란 가슴과 대비되는 긴 팔다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달큰한 과일향이 났다.
< 언데드의 악취를 발견했습니다. >
< 데이터 베이스를 검색합니다... >
< 좀비의 악취와 유사도 14% >
< 연산능력 부족으로 상세분석이 불가능합니다. >
< 더 자세한 분석을 원하시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주십시오. >
시스템 메세지는 알 수 없는 글만 띄워올렸다.
'좀비?'
사이보그들이 쓰레기나 뒤지는 세상에 언데드나 좀비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난 시스템이 언급한 좀비의 악취를 달큰하게 느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좀비 냄새가 왜 달콤하게 느껴지는거지?'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오기도 전에 몇 가지 정보가 뇌리를 스쳐갔다.